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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연극의 비중이 낮은 뮤지컬을 위하여 [No.78]

글|이영미(대중문화 평론가) |사진제공|Park’s Culture 2010-03-17 5,278

초기 우리나라의 뮤지컬은 연극계의 관할 영역이었다. 즉 연극인이 주축이 되어 음악과 춤 전문가를 불러다 함께 작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음악과 춤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20년 전의 뮤지컬만 해도 노래를 지지리도 못하는 배우가 무대에 섰고, 음악과 춤에 전혀 배려가 없는 연출들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의 뮤지컬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음악과 춤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뮤지컬은 용서받지 못하는 풍토가 되었고, 더 나아가 뮤지컬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하던 음악인과 안무자가 연극적 부분까지 모두 맡는 작품들도 늘어나고 있다. <오디션>, <퀴즈쇼>, <올 댓 재즈>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작곡가나 음악감독, 안무자가 왜 연극적 부분까지 맡겠다고 나서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뮤지컬에서 음악과 춤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작업을 하다 보면 연극이 전체를 주도하면서 음악과 춤을 부수적이거나 장식적 요소로 격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과 춤은 연극하고 전혀 성질이 다른 예술이므로, 양자는 종종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한다. 음악과 춤은 운문적이고 압축적인 데 비해, 극은 상대적으로 산문적이고 구체적이다. 전자가 진행되는 동안 시간이 종종 멈춰있다면, 후자가 진행되는 동안은 인물 간의 대립과 사건으로 시간이 멈추지 않는다. 문학에 비유하자면, 음악이나 춤이 시인 데 비해, 연극은 소설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연극에 음악과 춤이 들어갈 때에 종종 시간이 멈춰 버린다. 음악과 춤이 들어가면 시간을 타고 흘러가던 극적 갈등이 중지되고 갑자기 극적인 호흡이 늘어진다. 반면, 음악과 춤의 입장에서는, 연극이 들어가면 불필요한 설명을 자꾸 넣어 압축적으로 보여주던 강렬한 느낌이 줄어들고 맥이 풀려 버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조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고, 칼자루를 쥐고 있는 연출자의 폭력에 음악과 춤이 희생되고 도구화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오디션>, <퀴즈쇼>, <올 댓 재즈> 등 음악인과 무용인이 연출까지 맡은 작품을 보면, 하나같이 연극적 측면의 부실함이 결정적인 결함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이 오히려 음악과 춤까지 돋보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작품에서 문제는 여전히 극작과 연출, 그 중에서도 특히 연출이다. 극작이 다소 부실해도 연출이 이를 보완하고 교정하면서 극을 전개할 수 있지만, 연출이 부실해지면 극작 부분을 통제하고 조정할 능력이 없어 작품 전체가 파탄이 난다. 아무리 음악과 춤이 중요하다 해도, 작품의 모든 부분을 아우르는 꼭대기 통제탑은 여전히 연출이며, 이는 상당한 수준의 연극적 형상화 능력을 요구한다. 음악적 요소가 연극보다 훨씬 강한 오페라나 창극조차 연출이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가, 연출적 핵심을 얼마나 제대로 잡고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품격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오페라와 창극조차 이런 실정이니 뮤지컬에서 연출은 훨씬 더 중요하다. 뮤지컬의 음악과 춤은 ‘넘버’라고 불릴 만큼 무한선율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도막도막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연극은 이러한 음악과 춤을 하나의 일관된 뮤지컬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연극적 요소가 어떻게 버무려져 있는가에 따라 뮤지컬의 품격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올 댓 재즈>는 뮤지컬 안무에서 일가를 이룬 서병구가 안무는 물론 연출까지 맡은 창작뮤지컬이다. 제목은 이 작품이 재즈 중심의 음악을 구사하는 뮤지컬인 동시에, <카바레>, <시카고>의 안무가 밥 포시에 대한 오마주를 드러냄으로써(밥 포시의 작품 제목을 고스란히 가져다 썼다.) 이 작품이 춤을 중심으로 한 작품일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런 창작자의 의도는, 뮤지컬에서 춤이 연극의 보조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춤 중심의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서도 좀더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이 작품은 재즈 음악인 지나가 다양한 종류의 재즈 음악을 화려하게 보여주면서, 거기에 서병구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춤으로 승부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갈라쇼인 것은 아니다. 사랑과 그리움, 오해 등으로 얽힌 극의 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케이블 TV의 PD인 서유라는 뉴욕에서 세계적인 안무가로 성장한 유태민을 취재하러 가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다. 서유라는 유태민과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댄서이자 애인이었고, 미국에 건너간 후 소식을 끊어버려 그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한 유태민이 오로지 서유라를 지정하여 인터뷰를 허락했고, 서유라는 어쩔 수 없이 뉴욕에서 그를 만난다. 유태민의 옆에는 마치 애인처럼 보이는 남자 무용수 데이비드가 분신처럼 그의 춤을 추고 있고, 유라는 태민이 데이비드 때문에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각을 세운다. 그러나 결국 유라는, 태민이 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어 자신과 연락을 끊었고, 그를 구출해준 뒷골목의 젊은이가 데이비드였음을 알게 된다. 태민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 자신과 함께 출 춤이라고 유라에게 연습시켰던 춤 <올 댓 재즈>를 이번 공연에 올리고 싶어 하고, 바로 그 춤을 데이비드와 유라가 함께 춰주기를 원한다. 고민 끝에 유라는 그것을 수락하고, 태민의 분신 같은 데이비드와 태민의 춤을 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작품의 중심은 춤이다. 그렇다면 사실 연극적 요소란 그 춤들을 일관되게 잘 연결해주는 접착제, 혹은 각 춤을 멋지게 디스플레이 할 수 있는 진열장 틀 같은 역할에 불과하다. 이런 컨셉을 잡은 것까지는 문제가 없다. 뮤지컬은 다양하며, 극적 요소를 약화시킨 뮤지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접착제 혹은 진열장이 제 구실을 못하여, 그 음악과 춤을 모아주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돋보이게 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음악과 춤이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에 비해, 연기 중심의 장면이 펼쳐지면 갑자기 그 질이 추락하는 현상은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얼마 되지도 않는 연극적 장면이건만, 그조차 뻔하고 지루하며 무엇보다도 음악·춤과 분위기가 조율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공간의 활용이다. 이 작품의 춤이 대극장에 어울리는 춤이어서, 비좁은 소극장 무대가 부담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러나 무대 공간이 연극적으로 분할되고 의미화되지 못하는 것은 문제이다. 이 작품의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울의 사용도 볼거리를 강화시키고 인물의 등·퇴장을 용이하게 하며 춤 동작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에 그칠 뿐, 공간을 분할하여 의미화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다 보니 춤의 공간적 운용 또한 단순해졌다. 즉 연극적으로 의미화된 전체의 공간 구도 속에서 춤이 배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그림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 전체를 보게 하지 못하고, 자꾸 춤꾼의 춤 하나하나에만 집중하도록 만드는 이유는, 바로 공간 전체를 운용하는 구도가 별 의미가 없고 단순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극작과 연출의 뒷받침이 제대로 안돼 훨씬 돋보일 수 있는  춤과 음악이 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연극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적 요소를 더 약화시키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런 정도의 간단한 줄거리란 해설이든 자막이든 사진 영사든 시낭송이든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도 전달 가능하다. 대신 연극적 요소는 비중이 작지만 세련되고 깔끔하게 다듬어, 춤과 음악을 돋보이게 해주어야 한다. 연출은 자신의 연극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시공간을 관리해줌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현대연극의 다양한 형상화 방식을 생각하면, 이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십수 년 전 박정자의 연극 <11월의 왈츠>라는 작품이 있었다. 희곡을 써보지 않은 여성지 기자가 서정적인 수필처럼 써내려간 극본에 스타 박정자의 카리스마가 결합되어 있는, 결코 쉽지 않은 조합이었다. 극본은 중년 여인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고 전혀 극적이지도 않았으나, 이 작품을 ‘연극이 되도록’ 만든 것은 피터 브룩 스타일로 시공간을 정돈해준 장두이의 연출력이었다. 서정적 수필 같은 넋두리를 구태여 극적 갈등으로 구축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 서정성에 몇 가지 소품을 이용한 놀이적인 연극성을 얹어 작품의 품격을 유지한 것이다. 이 작품에도 이렇게 다양한 연극적 표현을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춤을 살려주는 관리형 연출자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8호 2010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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