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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카파이즘> 로버트 카파 '한 발짝 더 가까이'가 만들어낸 영광과 슬픔 [No.212]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2-09-23 462

<카파이즘> 로버트 카파
‘한 발짝 더 가까이’가 만들어낸 영광과 슬픔

 

20세기의 유명 종군 기자이자 사진작가로 꼽히는 로버트 카파.그는 스페인 내전부터 베트남 전쟁까지 무려 5개의 전장에서 활약했으며, 죽음마저 전장에서 맞이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투철한 기자정신을 의미하는 ‘카파이즘’이란 말은 그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사진도 삶도, 남들보다 한 발짝 더 가까이에서 겪고자 했던 한 예술가의 삶과 업적을 되짚어 본다.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은 삶


로버트 카파, 본명 엔드레 프리드먼은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점점 심해지는 반유대주의에 쫓겨나듯 베를린으로 향한 카파는 그곳에서 처음 사진을 접하고 자신의 업으로 삼게 된다. 후에 스스로 설명했듯,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아온 그로서는 어디서나 통하는 이미지를 언어로 사용하는 사진이 모국어보다 더 편했던 것이다. 망명 중이던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의 연설 장면을 촬영한 것을 기점으로 카파는 본격적인 사진가 경력을 쌓게 되지만, 히틀러가 점차 위세를 키워가는 독일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파리로 향했다. 파리에서 카파는 여러모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운명적인 연인 게르다 타로와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권유로 ‘잘나가는 미국인 사진가’의 뉘앙스를 풍기는 로버트 카파로 개명해 본격적인 사진작가 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평생의 동료 데이비드 시모어 및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도 이곳에서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카파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아랍이스라엘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에 종군 사진기자로 참전해 전쟁 보도사진가로 이름을 떨쳤다. 1947년에는 시모어, 브레송 등 당대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을 설립해 프리랜서 사진작가들의 저작권과 자율성을 보장하고자 했다. 수많은 전장을 누비는 치열한 삶 속에서도 카파는 헤밍웨이, 스타인벡, 피카소, 마티스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속 깊은 교류를 나누었고, 여러 유명인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1954년, 카파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취재하던 중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겨우 41세였다.

 

짧기에 더 화려하고 강렬한


길지 않은 삶을 이미 예감했던 것인지, 카파는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삶을 즐겼다. 평생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으며, 늘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술과 담배, 도박, 연애를 이어갔다. 짧기에 더 화려한 삶을 추구했던 카파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과 연애였다. 진한 눈썹과 날카로운 눈빛,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카파는 수많은 여성을 매료시켰다. 그중에서도 게르다와의 사랑은 카파의 인생에 깊고 선명한 흔적을 남긴 중대한 사건이었다. 게르다는 카파의 연인이자 비즈니스 동료였고, 함께 전장을 누비는 동지였다. 파리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 위해 함께 떠났으나 그곳에서 게르다가 탱크에 치여 죽는 비극이 일어났다. 게르다의 죽음에 카파는 깊은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고, 이후 그의 인생에 커다란 구멍처럼 남게 되었다. 이후 불안과 고독으로 괴로워하던 카파는 수많은 여성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가장 유명한 연애사로는 은막의 여신이라 불리던 잉그리드 버그만과의 짧고 강렬한 연애를 들 수 있다. 순회공연 중이던 잉그리드와 우연히 마주친 카파는 도발적인 쪽지로 그녀를 유혹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랑은 이후 꽤 진지하게 이어졌으나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영원히 함께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조용히 헤어졌다.

 

전쟁의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


종군기자와 사진가로서 카파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늘 남들보다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카파의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혹은 어디서 이런 사진을 찍었는지 궁금해했고, 이런 사진을 찍고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그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전쟁의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 그는 전쟁의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였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웠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첫 번째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역사적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라고 말한 카파에게 전쟁은 제삼자들의 비극이나 끔찍한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는 총 대신 카메라를 들고 이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함께 먹고 잠자고 싸우던 전우들의 마지막 모습을 찍었다. 그에게 병사들은 피사체가 아니라 생사의 순간을 함께한 동료였다. 여기에는 당연히 깊은 인간적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지점이 그의 사진을 다른 잔혹한 전쟁 사진들과 구별되게 만들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사진은 피사체, 즉 대상과의 거리를 통해 작가의 시선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카파의 신념은 그의 삶과 예술 속에서 실제로 증명되었다. 그는 삶과 죽음이 간발의 차로 엇갈리는 전장 한복판에서, 대상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운명의 순간들을 찍었고, 오직 그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떨림과 긴장을 화면에 담아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사진들은 상당 부분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고 구도도 명쾌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사진에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흔들리는 흑백사진에 담긴 그의 용기와 열정, 그리고 대상에 대한 깊은 감정은 보는 이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인상을 남겼으며, 후대 사진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카파는 사랑을 할 때도 사진을 찍을 때도 슬픔, 환희, 고통 등의 감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생생하게 담아내고 또 절절하게 겪어낸 사람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든, 얼마나 경이롭든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이, 그의 사진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참고 문헌
『로버트 카파, 그는 너무 많은 걸 보았다』 알렉스 커쇼 저, 윤미경 역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 저, 우태정 역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2호 2022년 5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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