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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기획-2] 뮤지컬의 아름다운 다섯 콤비 이야기 [No.98]

글 |조용신(연출가 겸 공연 칼럼니스트) 2011-11-23 4,468

뮤지컬 역사상 주옥같은 작품을 만든 다섯 콤비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낭만적인 천생연분 : 로저스 & 하트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선후배 사이였던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 1902~1979)와 로렌즈 하트(Lorenz Hart, 1895~1943)는 당시 쇼비즈니스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학력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콤비를 이룬 해는 1919년으로 당시 브로드웨이는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공연 전체가 진행되는 이른바 북 뮤지컬(Book Musical) 시대 이전으로, 말 되는 드라마보다는 대중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노래와 춤이 중요했다. 따라서 로저스와 하트는 각각 작곡가, 작사가로 만나 1920년대에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하다가 대공황의 폭탄을 맞으며 브로드웨이가 불황에 빠지자 1930년대 초반 할리우드의 콜을 받고 함께 서부로 건너가 뮤지컬 영화를 만들다가 공황이 극복되던 1930년대 중반, 다시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총 24년간 무려 28개 작품을 함께 창작했다. 로저스의 감미로운 재즈 음악과 하트의 지적인 가사는 ‘마이 퍼니 발렌타인’(My Funny Valentine), ‘블루 문’(Blue Moon), ‘어디서 혹은 언제’(Where or When) 등의 수많은 히트 곡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하트의 건강이 악화되며 1943년에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두 사람의 협업은 끝날 수밖에 없었다. 하트가 투병을 시작하자 그가 죽기 몇 년 전부터 하트의 부재를 대비해왔던 제작자들의 주선으로 로저스가 만난 두 번째 파트너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로, 그들은 뮤지컬 황금기를 연 <오클라호마!>를 비롯해 엄청난 걸작들을 남겼다. 하지만 로저스의 진정한 천생연분은 사실 해머스타인이 아니라 로저스 하트였다. 하트와 함께했던 시기의 로저스는 머리 복잡한 드라마보다는 낭만적인 재즈 뮤직에 집중하면서 달콤한 멜로디에 빠져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트는 매우 박학다식하고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심리학적인 주제는 물론이고 당시에 이미 고사되어가던 영어의 옛말과 젊은이들의 신조어 사이의 의미를 오해하여 발생하는 코믹한 상황을 가사로 다루는 등 미국적인 소재와 언어를 개척한 선구적인 하트의 시도는 여타의 뮤지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시대의 거물 작사가인 아이라 거슈윈, 콜 포터 등과 대등한 위치에서 라이벌이라 불릴 수 있는 그 시대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두 사회주의자의 만남 : 바일 & 브레히트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한 쿠르트 바일(Kurt Weill, 1900~1950)은 망명 전에는 재즈를 추종해서 독일에서는 현재까지도 지나치게 미국적인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무겁고 진지한 독일 작곡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있다. 뒤집어 보면, 가볍고도 무거운 두 가지 재주를 모두 가진 바일이 뮤지컬 작곡가가 된 것은 필연이었다. 그의 파트너는 독일의 시인·극작가이자 서사·교육극의 이론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였다.
바일은 12세에 벌써 작곡을 시작해 베를린 음대에 진학했으나 보수적 교육에 반발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진로에 대해 방황하다 19살 때부터 뮤지컬 작곡을 꿈꾸는 한편 극장에서 지휘자 보조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작곡 수업을 재개했던 25살 무렵에는 독일 작곡계의 촉망받는 선두주자가 되었는데 평소 명랑하며 교육적인 텍스트를 선호한 그에게 마침 1927년 ‘바덴바덴 실내 음악제’의 한 집행위원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소개해 주었고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작업한 작품이 바로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였다. 미국 중부 사막에 위치한 개발 도시 전체가 도박에 빠지는 삶을 예리하게 풍자한 내용인데 마치 오늘날의 라스베이거스를 예언한 듯한 내용이라는 점도 놀랍지만 오페라와 뮤지컬의 경계에 있는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 사각의 복싱장 형태를 띤 실험적인 간이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두 사람은 3년 후 이 작품을 발전시켜 정식 공연장에서 초연을 올린다. 그 사이, 두 사람은 그 당시 독일에서 가장 실력이 있는 배우들을 선발해 미국의 랙타임, 재즈 등을 혼합한 유행가 스타일의 멜로디와 풍자적인 소재를 가진 코믹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즐겼고 그런 새로운 시도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서푼짜리 오페라>(1928), <해피 엔드>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 중에서 <서푼짜리 오페라>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각색해 18세기 원작의 인물들을 마치 1920년대 베를린 암흑가의 인물들인 양 각색해 그들 콤비 최대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두 사람을 처음 소개했던 축제 위원회는 그들에게 또 다른 작품을 위촉해
<린드버그 비행>(1929)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당시 라디오가 발명되어 큰 인기를 얻을 무렵이어서 1930년 한 해에만 이들의 작품 <린드버그 비행>, <승낙자>,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념하기 위해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인 <베를린 진혼
곡>이 모두 실황중계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협업은 거기서 끝났다. 공연에서 음악의 역할을 축소하려는 브레히트와의 갈등도 있었지만 유태인이었던 바일은 살기 위해 미국으로 망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바일은 무대디자이너 카스파 네어와 〈보석>(1932), 작가 게오르그 카이저와 <은색 호수>(1932)를 마지막으로 정치적 이념, 음악적 개념,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치의 박해를 받아 혼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고 그의 음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록 독일에서 금지되었다.

 

 

가장 인간적인 동지 : 칸더 & 엡
작곡가 존 칸더(John Kander, 1927~)와 작사가 프레드 엡(Fred Ebb, 1928~2004)은 뮤지컬 역사상 가장 인간적으로 귀감이 되는 콤비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1962년부터 프레드 엡이 노환으로 사망한 2004년까지 평생을 콤비로 지냈다. 이들을 소개한 것은 음악 출판업자 토미 발란도였고 이들의 첫 작품 <골든 게이트>의 프로듀서 겸 연출은 해롤드 프린스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프린스의 눈높이를 충족시키지는 못했고 결국 공연화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를 밑거름으로 세 사람은 1966년 공전의 히트작 <카바레>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의 공식적인 브로드웨이 데뷔작은 그보다 한 해 전 매카시즘을 풍자한 <좌익 플로라(Flora the Red Menace)>였다. 이 작품에서 라이자 미넬리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컬트적이며 풍자적인 유머 감각으로 큰 재미를 주었다.
<카바레>는 무대 버전이 1,100회나 지속되는 대성공에 이어 막을 내린 후에는 1972년 영화로 제작되어 아카데미 상도 휩쓸었다. 두 사람은 1975년에는 불후의 명작 <시카고>의 음악과 가사를 썼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보다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공연 중인 1996년 리바이벌 버전의 인기가 더욱 거세다. 2002년에는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시카고> 이후 이들의 주요 작품들로는 <올해의 여인>(1981), <더 링크>(1984), <거미여인의 키스>(1992), <스틸 피어>(1997), 엡의 타계 이후에 개막한 <커튼스>(2006), 생전의 마지막 협업 작품이자 지난해 토니상 후보에 올랐던 <스캇보로 보이즈> 등이 있다. 만약 아직 브로드웨이에 오르지 못한 작품들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을 하나 꼽는다면 2001년 9·11 테러 사건이 발발하면서 어두운 내용의 작품들이 줄줄이 막을 내리던 시기에 개막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던 <노부인의 방문(The Visit)>이 있다. 이 작품 역시 칸더의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쇼툰과 드라마와 잘 어우러지는 엡의 가사가 조화를 이룬 수작이다. 그들의 평생에 걸친 아름다운 우정과 협업은 후대의 뮤지컬 창작자들에게 여러모로 귀감이 되어 있기에 뮤지컬 장르가 소멸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한 이들 콤비는 창작자들의 마음속에 대표적인 롤모델로 남아있을 것이다.

 

 

최고의 작곡가와 편곡자 : 스티븐 손드하임 & 조나단 투닉
조나단 투닉(Jonathan Tunick, 1938~)의 이름은 뮤지컬 애호가들에게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스티븐 손드하임의 음반을 소장하고 이를 유심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그의 모든 음반에 등장하는 하나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1970년 <컴퍼니>에서부터 <리틀 나잇 뮤직>,
<스위니 토드>, <인투 더 우즈>, <패션> 등 현재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스티븐 손드하임의 모든 작품의 편곡을 맡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페임>의 배경인 르과르디아 공연예술고교와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뉴요커로 젊은 시절 클라리넷 연주자와 작곡가로 출발해 음악감독, 편곡자로 활동하고 있고 그동안 미국 쇼비즈니스의 4개 시상식(토니상, 아카데미상, 에미상, 그래미상) 음악 부문의 트로피를 모두 받은 실력자 중의 실력자다. 말하자면, 뮤지컬의 음악과 드라마의 화학작용을 손드하임이 제시하고 이끌었다면 투닉의 악보에서는 모던한 브로드웨이의 사운드 그 자체가 나온 것이다. 물론 그가 작가·작곡가·작사가와 같은 1차 창작자-크리에이티브 코어(Creative Core)는 아니기에 평생 손드하임 작품의 편곡만 담당한 것은 아니다. <약속, 또 약속>(1968), <코러스 라인>(1975), <나인>(1982), <타이타닉>(1997) 같은 또 다른 화제작에서도 편곡자로 일했으며 영화음악도 13편을 썼다 (물론 2007년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스위니 토드’도 그의 작품이다).
조나단 투닉의 나이는 지난해 팔순을 맞이한 손드하임보다 8살이 적지만 그 역시 이제 70대 초반의 노인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링컨센터에서 열린 ‘손드하임 80세 생일 축하 콘서트’에서도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칸더·엡과 마찬가지로 손드하임과 투닉이 서로의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함께 작업할 친구로 만나 함께한다는 사실은 평생 이들에게 뮤지컬이라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작업인지를 말해주는 소중한 증거다.

 

 

그녀의 옷을 만드는 사람 : 수잔 스트로만 & 윌리엄 아이비 롱
수잔 스트로만(Susan Stroman, 1954~)은 2000년대 이후 브로드웨이에서 안무가 겸 연출가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 크리에이터다. 전직 코러스 출신으로 남자들의 영역으로만 여겨지던 브로드웨이의 대표 안무가 겸 연출가의 위치에 올라있다. 오프에서 안무를 맡은 첫 뮤지컬 <좌익 플로라>는 컬트적인 인기를 모았고 칸더·엡 콤비의 히트곡을 모은 레뷔 <그래도 지구는 돈다(And the World Goes `Round >(1991)의 안무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이름을 알려 나갔다. 그녀의 장점은 5살때부터 발레와 탭댄스로 다져진 기본기에다 고등학교 때부터 안무를 해온 창의력, 창조적인 동선과 소품의 적극적인 사용에 있다. <크레이지 포 유>, <쇼 보트>, <오클라호마!>, <컨택트>, <뮤직맨>, <프로듀서스>, 손드하임의 <더 프록스>등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이외에도 뉴욕시티오페라단의 <돈 지오반니>, 뉴욕시티발레단의 <더블피쳐>의 안무를 맡기도 했다. 프러덕션 디자인 스태프를 결정한 권한을 갖는 연출가가 된 그녀가 선택한 의상디자이너는 바로 윌리엄 아이비 롱(William Ivey Long, 1946~)이었다. 그는 1978년 연극 <인스펙터 제너럴>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고 수잔 스트로만이 안무가로 데뷔한 <크레이지 포 유>(1992)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에도 아이비 롱은 예일 드라마스쿨을 졸업하고 <나인>(1982) 초연으로 토니상을 거머쥔 것을 비롯해 이미 다수의 연극 무대를 책임지고 있던 베테랑 의상디자이너였다. 그러던 그는 스트로만을 만나며 영역을 뮤지컬로 넓혔고 두 사람은 2000년대를 전후로 수많은 화제작들을 함께 만들었다. <프로듀서스>에서 게이 연출가 역할의 크라이슬러 빌딩 의상과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안무에 전혀 지장 없는 여자 앙상블의 과학적인 디자인이 두 사람의 작품이고 <컨택트>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3막의 노란 드레스의 여인 역시 협력의 산물이다. 아이비 롱의 작업은 유난히 꼼꼼하고 디테일한 디자인으로 배우가 극 중에 퀵체인지를 해야할 의상도 여타 공연들에 비해 많은 편이다(한국에서 초연된 <드림걸즈>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이는 대단한 무대 장치를 쓰지 않고서도 깜짝 놀랄 만한 장면전환을 만들어 내는 스트로만의 연출에 부응한다. 남편과 사별해 독신으로 살고있는 스트로만과 천상 게이 디자이너인 아이비 롱은 종종 함께 백화점 쇼핑을 나서는 등 현실에서도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이다. 아마도 아이비 롱은 여성들이 꿈꾸는 우아한 게이 코디네이터 친구의 전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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