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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록 권하기 애매한 사회 [No.69]

글 |김영주 2009-06-20 5,788

90년대 중반,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IMF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대부’ 신중현의 아들들이 이끄는 시나위에서 베이스를 치던 서태지는 몸을 일으켜 대중음악사를 바꾼 혁명아가 되었고 뒤를 이어 듀스, 김건모, DJ DOC 등이 그전까지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새로운 물결을 이루었다. 지금은 꿈처럼 들리는 음반판매 100만장 갱신 기록이 이어지면서, 가요는 대중문화의 꽃이자 왕자로 군림했다. 그 호시절에, 홍대와 신촌 사이에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거나 비켜간 이들이 모여드는 땅 밑 집결지가 있었다. 

 

 

지금과는 꽤나 다른 이미지였던 386출신 음악평론가들의 축사 아래 자의로든 타의로든 진정한 시대정신이자 청년문화의 기수가 되었던 이들의 면면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무게감이 상당하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위퍼, 노이즈가든, 레이니썬, 조금 분위기가 달랐던 델리 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 코코어, 후에 루시드 폴의 전신으로 기억되는 미선이 등등. 떠나고 흩어진 이들도 적지 않지만 아직 그 이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일까,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 아련한 향수 비슷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었고 PC통신을 통해 익명의 타인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 유니텔에는 록 음악 동호회가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밴드 멤버를 찾았고, 누군가는 교실에서는 만난 적 없는 ‘음악 취향 같은 친구’를 만들었다. 이런 소통의 장은 이제 월드와이드웹으로 옮겨와서 포털 사이트의 카페로 자리를 잡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있다. 큰 바다 건너 위대한 록의 세계와 이 협소한 분단국가 사이를 이어주는 나룻배 역을 했던 음악전문지들, 그러니까 핫뮤직과 GMV, 락킷과 서브는 모두 어디론가 표류해버렸다. 작은 시장, 적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쉽지 않은 항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사라진 것은 그들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건물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던 음감실 ― 낡은 소파에 몸을 묻고 불량식품 맛이 나는 달짝지근한 에이드나 350ml 병맥주를 홀짝이면서 딴 나라에서 온 좀 우울하고 서늘한 이미지들이 영사막 위로 흐르는 걸 바라보았던 그 어두운 공간도 더 이상 없다. 우리는 이제 좀 더 각자가 되어 ‘퍼스널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 손쉽게 고화질로 세계 각지의 라이브 실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빈곤국가 채무 완전 탕감과 아프리카 지원금 확충을 요구하는 라이브 8이나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라이브 어스와 같은 거대한 음악 축제를 세계인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24시간 동안 10개국(라이브 어스는 7개국)의 주요 도시에서 대형 록스타들의 콘서트가 연속으로 이어진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한 이들이 (주최 측 추산) 20억 명에 이르기 까지 인터넷은 TV, 라디오와 함께 큰 몫을 했다.

 

 

 

 

 

 

 

 

 

 

 

 

 

 

 

 

 

 

 

 

 

 

 

 

 

강과 산이 바뀌는 10년을 훌쩍 지나, 또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 다른 나라에서는 못 배우고 없이 자라서 사회에 불만 많은 애들이 하는 록 음악을 왜 우리나라에서는 학벌 화려한 명문대생들이 많이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은, 이제 영미권에도 사립학교나 예술학교 출신 록스타들이 적잖이 등장하면서 흐지부지 되었다. 풍요로운 문화적 혜택을 받으면서 세련된 취향과 감식안을 갖게 된 것이 그들 음악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콤플렉스가 된다는 건 묘한 일이긴 하다. 하긴 태어난 지 반세기를 겨우 넘긴 젊디젊은 음악 양식이 아닌가. 모순적인 선언일지도 모르지만, 이래야만 한다는 기준 자체가 이 저항의 음악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15년 전에 분명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증오했던 바로 그것이 되어간다는 절망감에 ‘천천히 소멸되는 것보다 한번에 타버리는 편이 낫다’는 유서를 남기고 엽총으로 제 머리를 겨누었던 미국의 자살자와, 너희가 노래하는 혁명을 진실로 믿고 있냐는 날카로운 질문에 면도칼로 자기 팔에 ‘4 real’이라는 답을 새겼던 웨일즈 출신 실종자, 그리고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공포와 절망만큼 질긴 희망을 붙잡았던 뮤지컬 작곡가. 커트 코베인의 자살(94년)과 리치 제임스의 실종(95년)이 <렌트>의 초연, 그리고 조나단 라슨의 죽음(96년)과 동시대에 일어난 사건임을 상기해보자. 살아남기에는 지나치게 치열했던 그들이 남기고 간 음악을 들으면서 기타 치고 노래를 쓰기 시작한 소년과 소녀들이 스물을 넘기고 서른 즈음을 향해 나이 먹어가고 있는 2009년. 음악이 단지 흘러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여서 깊은 곳까지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불꽃처럼 사라져간 위대한 실패자들의 노래는 다음 세대에 어떤 동기를 부여했을까.
이제 음악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덤비는 피 끓는 혁명가도, 장렬한 순교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음악으로 무엇을 하겠다기보다는 그냥 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어서 안 될 것도 없다. 뮤지컬 <오디션>에서 복스팝의 멤버들이 나누는 반쯤은 자조적이고 반쯤은 애틋한 대화 (‘우리 음악만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조금만 먹어’)는 음악으로 영웅이 될  운명도 아니고 그럴 욕심도 없는, 단지 음악이 자신들의 삶 그 자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어찌 보면 가장 큰 꿈을 꾸는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오디션>에서는 그 꿈을 잡을 수 있는 기회로 ‘하이서울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리는 최대 규모의 록 콘테스트가 등장한다.

 


사실 경쟁 형식의 가요제를 통해서 이름을 알리거나 스타가 된 록밴드는 찾아보기 힘들다. 굳이 찾아보자면, 대학가요제의 전설, 무한궤도 정도가 있을까. 그러나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이나 한국판 <렌트>라고도 불리는 같은 제목, 다른 내용의 뮤지컬 <오디션>에서 주인공들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한 번의 무대에 진심을 건다.
작정하고 국내의 온갖 가요제에 참가해서 모은 상금 680만원으로 연습실을 장만했다는 피터팬 콤플렉스의 사랑스런 성공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베이스, 기타, 드럼, 보컬, 네 명의 멤버가 한 팀을 이루는 ‘록밴드’에게 한판 승부로 결정 나는 인생역전의 기회란 애초에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 자신이 록 마니아여서 순정만화로는 드문 소재로 연재를 했던 천계영이나, 자전적인 이야기로 뮤지컬을 만든 박용전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사실주의 뮤지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디션>에서 가장 강력한 환타지는 그런 구체적인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인공들에게 쥐어준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많은 것이 달라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사실은 달라졌다. 십여 년 전이기도 하고 지난 세기이기도 한 그 때와 비교해서 오늘날의 음악이 별 볼 일 없다거나 뮤지션들의 마인드가 틀려먹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재미도 없고 근거도 없는 훈수를 두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대중예술이 그렇듯이 록 음악 또한 시대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면, 가장 젊고, 주체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이 음악이 현재 한국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형태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난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감성과 상처받기 쉬운 섬세한 영혼을 가졌죠’라는 듯한 힘 뺀 목소리로 일본 사소설 여주인공의 독백 같은 노래를 하는, 만화 속 캐릭터스러운 이름을 가진 일련의 ‘홍대 여신’들이 휴대폰 CM송이 목표인듯한 달달한 음악으로 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게 2009년의 ‘시대정신’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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