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런던 콘서트
조명이 꺼지고 단아한 한복 차림의 김수하 배우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2015년 <미스 사이공> 앙상블로 웨스트엔드에 데뷔했던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맡았던 캐릭터가 바로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의 ‘진’이었다. 9년 만에 런던 무대에 선 김수하는 담담하면서도 진솔한 고백으로 공연의 서막을 열었고, 무대는 한 편의 압축된 서사처럼 힘 있게 시작됐다. 배우들은 한국어로 공연했고, 무대 양쪽 모니터에 영어 자막이 제공됐다.
9월 8일, 런던 질리언 린 극장은 평소와는 다른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웃집 토토로>가 장기 공연되고 있는 극장에 단 하루, 한국 창작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콘서트가 올랐다. 웨스트엔드에서 한국어 뮤지컬을 경험할 기회가 흔치 않다는 기대감으로 1,300석이 가득 찼다. 교민과 유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관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채우면서, 런던이라는 도시의 다채로운 풍경이 그대로 객석에 모였다. 설렘과 긴장이 맴도는 이 공간에서, 무대를 둥글게 감싼 좌석 구조가 무대와 관객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1973년 1월에 문을 연 질리언 린 극장은 17세기 후반 모임 장소에서 출발해 수많은 변화를 거치며 현대식 극장으로 발전했다. 현재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LW Theatres가 운영하는 극장 중 하나로, <캣츠> 같은 상징적인 작품들이 다수 공연된 곳이다. 2018년,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 안무로 영국 뮤지컬 사의 한 축을 세운 거장의 업적을 기려 이 극장은 ‘질리언 린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같은 해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 이름은 웨스트엔드에서 왕족이 아닌 여성의 이름을 딴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영구적인 추모의 표지가 됐다.
이번 공연은 170분 분량의 정식 무대를 약 100분으로 재구성한 콘서트 형식이었다. 높낮이 차를 준 구조물과 간단한 도구로 장면을 표현했고, 빠르게 전환되는 조명이 공간을 채웠다. 한 달 넘게 이어진 서울 공연을 8월 말까지 마친 후 런던으로 온 배우들은 응축된 에너지로 장내를 뒤흔들었다. ‘단’ 역의 양희준은 랩과 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장난기와 비장함을 오갔고, ‘진’의 김수하는 섬세한 감정과 안정된 노래로 극의 중심을 단단히 지탱했다.
관객과 무대 사이의 긴장감은 ‘양반 놀음’ 장면에서 완전히 허물어졌다. 배우들이 객석으로 뛰어들어 노래하며 부채를 건네자, 객석은 놀라움과 환호로 들끓었다. 한국 공연장에서 하나의 밈으로 자리 잡은 “오에오!” 떼창은 런던에서도 자연스럽게 울려 퍼졌다. 한국어를 모르는 관객도 리듬에 맞춰 목소리를 냈고, 객석은 거대한 합창단이 되어 공연을 함께 완성했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무대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시조가 금지된 가상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다. 권력을 독점한 양반들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두려워하며 시조와 같은 문화적 표현을 억압한다. 그러나 비밀 시조단 ‘골빈당’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은 시조로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가 되어 맞선다. 작품은 억압과 권력에 맞선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 그리고 예술이 자유와 희망의 언어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조와 함께 목소리를 되찾은 백성들의 외침은 조선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도 확장된다.
무대는 세트 없이 단출했지만, 배우들의 움직임과 음악, 관객의 호응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전통 복식을 입은 배우들은 아크로바틱과 점프, 텀블링을 자유롭게 구사했고, 부채·붓·탈 같은 소품이 장면의 상징성을 더했다. 전통 악기의 연주가 서양식 밴드 사운드와 전자음악과 어우러지며 극장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실험의 장이 되었다.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은 전통과 현대의 요소가 억지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작품의 색깔을 만드는 핵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시조, 국악 장단, 탈춤, 부채 같은 전통적 요소는 힙합과 랩, 스트리트 댄스와 충돌하며 새로운 어법을 만들었다. 여기에 ‘민중의 목소리’라는 보편적 서사가 더해지며 관객은 언어를 알지 못해도 극의 정서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관객의 참여는 이 공연의 정체성이 됐고, 반복되는 후렴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입에 맴돌아 그 감정을 오래 붙잡게 했다.
대부분 흥겹고 좋았지만, 여러 국적의 관객 사이에서 공연을 보다 보니 몇몇 장면에서는 눈물과 절규가 다소 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격정의 클라이맥스는 한국 관객에겐 익숙하다. 혹독한 세월과 역사적 아픔 속에서 쌓인 ‘한’의 정서를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그 직접성은 외국 관객에겐 낯설 수 있다. 이번 콘서트 형식은 그 과함을 농축된 에너지로 전환했고, 음악과 리듬, 집단적 에너지가 그 거리를 메웠다.
콘서트에서 프로덕션으로: <스웨그에이지>가 보여준 확장 전략
2017년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태어난 이 작품은, 이후 갈라 쇼와 쇼케이스를 거치며 완성도를 높였고, 2019년 서울 초연에서 작품상과 안무상을 비롯해 다수의 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당시 신인 배우였던 양희준과 김수하는 남녀 신인상을 동시에 받으며 작품의 성장을 이끌었다. 작품은 매년 다른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관객과의 소통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이었다. 전 출연진이 모두 무대에 오른 ‘외쳐 잔칫날!’, 공연 직후 이어진 특별 무대, 온라인 뮤직비디오 제작, 콘서트 형식의 무대까지, 관객을 무대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작품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은 2024년 런던 릴리안 베일리스 스튜디오에서의 영어판 쇼케이스, 그리고 현지 제작사와 협업한 웨스트엔드 단독 콘서트로 이어졌다. 이번 무대는 그 오랜 시간의 실험과 소통이 맺은 결실이었다.
케이팝 그룹을 주인공으로 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이 기록적인 조회수를 올리고, 한국에서 출발한 뮤지컬이 토니상 여러 부문을 석권했다. 런던에서는 케이팝 콘서트가 꾸준히 열리고, 대학에도 케이팝 동아리가 생길 만큼 관심도 뜨겁다. 케이팝의 성장은 음악·춤·영상이 결합한 종합적인 공연 예술성과 연습생 제도를 통한 높은 완성도, 팬덤이 참여하는 공동체적 문화 등이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전략은 한국 창작 뮤지컬의 해외 진출에도 적용될 수 있다. 관객을 참여시키는 무대 형식, 전통과 현대의 결합, 팬덤의 힘은 강력한 동력이 된다. 케이팝이 세계 시장의 문을 열었다면 이제는 뮤지컬이 그 길을 뒤따를 차례다.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런던 콘서트는 가능성을 확인한 상징적 순간이었다.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를 잇는 시도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관객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끌어냈다. 웨스트엔드가 장기 공연과 안정적 관객 수요를 바탕으로 한 메가 뮤지컬의 본거지라면, 한국 창작 뮤지컬은 빠른 개발과 민첩한 업데이트로 경쟁한다. 이번 공연은 정식 라이선스가 아닌 콘서트 포맷으로 현지 반응을 살폈지만, 장르 혼합의 미학, 팬덤 기반 운영, 직관적 감정 전달력 같은 특성이 선명히 드러났다. 이제 과제는 이 경험을 풀 프로덕션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웨스트엔드는 수년 치 라인업이 이미 편성된 포화 시장인 만큼 지속적 투자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9월 8일 하루 열린 이 공연은 한국 창작 뮤지컬이 세계 무대에서 설 자리를 모색하는 역사적 시작점이었다. 다음에는 ‘콘서트’가 아니라 온전한 프로덕션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