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문화 칼럼니스트가 한 편의 뮤지컬을 심층 분석하는 리뷰를 연재합니다.

“대왕께서 꾼 꿈 때문에 이 무슨 사단입니까?”
지난 설 연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뮤지컬 <몽유도원>(최인호 원작, 윤호진 연출, 안재승 작, 오상준 작·편곡, 양재선 작사, 서병구 안무, 이모셔널 씨어터 무대·조명·영상, 에이콤 제작)의 싱어롱 이벤트가 한창이었다. 메인 넘버 중 하나인 ‘도원은 어디에’의 후렴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를 관객들과 함께 부르려는 순간, 향실 역 서영주 배우가 여경 역 김주택 배우에게 농담 반 진담 반 한마디를 던진다.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졌지만, 막 캐릭터에서 빠져나온 무대 위 여경은 다소 당황한 기색이다. 꿈에서 본 이상향이라며 남의 아내를 탐하려다 광증이 도져 사사한 최측근 향실의 뼈 있는 농담이니 그럴만하다.
역사적 배경에 설화와 상상력을 더한 최인호 소설 원작 뮤지컬 <몽유도원>은 꿈에서 본 이상향의 여인을 찾아 왕비로 맞이하려는 백제 개로왕(재위 455~475) 여경(민우혁·김주택 분)의 강박과 집착이 주된 줄기이다. 우연히 찾아든 목지부족(한때 백제땅을 이끌었던)의 은둔처에서 족장 도미(이충주·김성식 분)의 아내 아랑(하윤주·유리아 분)을 보고 꿈속의 그녀임을 확신한 여경은 아랑을 빼앗기 위해 부족 전체에 압제를 가한다. 농토를 빼앗고 감금하고 타지를 떠돌게 만든다. 도미와 아랑, 목지부족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셈이다. ‘꿈처럼 이상향인 도원을 유영한다는 몽유도원(夢遊桃源)’과 정반대로, 여경은 폭군이 되어간다. 스스로를 파괴하고 주변 사람 모두를 죽음과 고통으로 이끈 이 사단이 단순히 ‘꿈’ 때문이었을까? 도미와 아랑은 여경으로 인해 눈이 멀고 얼굴이 망가졌으나 끝내 해후한다. 그럼 이 작품은 도미와 아랑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인가? 아니면 꿈을 빌미로 왕권 강화의 욕망을 실현하려다 자폭한 어리석은 왕의 자업자득에 대한 이야기일까?
여경이 ‘몽유’중에 발견한, 선녀들이 화무(花舞)를 추는 ‘도원’은 표면적으로는 이상향 같지만 닿으려는 순간 무너지는 신기루다. 꿈속에서 만난 여인을 현실로 끌어오는 순간, 유영하던 세계는 멈춘다. 여경은 진정한 ‘도원’에 대한 성찰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차지하려 했고, 결국 자멸에 이른다. 도미와 아랑은 변하지 않는 초심으로 여경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들과 공동체의 존엄을 지켜내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세상은 변했고 그들이 은둔할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다. 아니 그들조차 여경의 폭주에 의해, 혹은 욕망을 피하기위해 한번 쓰고 버릴 껍데기뿐인 표피의 아름다움은 벗어던진지 오래이다.
<몽유도원>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당신이 쫓는 도원은 타인을 배제한 채 홀로 유영하는 신기루인가? 아니면 부서진 조각배 위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함께 노 저어가는 실재하는 장소인가? 여경의 ‘사단(事端)’이 초래한 비극성 속에서 관객은 비로소 나와 타인이 함께 숨 쉬는 진짜 ‘도원’에 대해 돌아본다. 그곳은 ‘발견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수행되는 헤테로토피아’에 가깝다. 여경의 꿈이 불러온 비극적 사단은 아랑과 도미, 그들을 따르는 유민들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도원’을 견인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서로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는 동시대적 이상향이다.

이상향 서사의 역사와 <몽유도원>의 질문
뮤지컬 <몽유도원>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포괄해 ‘한국적 뮤지컬’이라는 정체성을 직시하는 대작이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의 1차 공연(2026.1.27.~2.22)은 미학적으로 이를 시각화한 첫 선언이기도 했다. 수묵 영상과 국악과 록, 탈춤과 컨템포러리 댄스가 결합된 군무 등은 ‘한국적 뮤지컬’이라는 오래된 화두를 동시대 언어로 재구성했다. 특히 몽유 장면의 영상 미장센, 목지부족과 백제 왕의 혼례 장면, 그리고 대표 넘버 ‘도원은 어디에’로 이어지는 공동체 중심 서사 구조는 작품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 다만 해오름극장의 양 옆으로 넓은 대형 무대는 작품의 스케일과 한국적 정서를 웅장하게 담아냈으나 장면 간 감정 밀도를 응축시키기보다 확산시키는 경향이 있다. 여경 서사의 개연성 역시 상징적으로는 설득력 있었지만 드라마적으로는 보강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40여 일간 재정비를 거친 후 개막한 샤롯데씨어터 2차 공연(2026.4.11.~5.10)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작품을 다시 조직한다. 뮤지컬 전용극장 특유의 옴팡진 공간은 넘버의 감정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대사와 가사, 안무의 보완으로 아랑에게 집착하는 여경의 속 마음이 드러나니 극적 재미도 살아난다. 오프닝 몽유 장면 역시 샤막 위에 어리어리하게 드리운 거대한 맹금류의 날개와 발톱 이미지가 확대되면서 영상과 맵핑하는 여경의 움직임이 더 섬세해졌다. 호족세력을 억누르기위해 왕권 강화가 급박해진 여경의 문제의식이 아랑과 목지부족에 대한 소유욕으로 발전되는 과정의 개연성이 보강되었다. 여경과 아랑의 첫만남에 드라마를 대신하는 안무와 액팅이 추가되어 서사가 더 단단해졌다. 따라서 이 글은 해오름극장 초연에 비해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샤롯데씨어터 2차 공연을 중심으로 한다. <몽유도원>이 어떻게 개인 설화에서 공동체 신화로 확장되는지, 그리고 왜 지금 이 작품이 동시대 한국 관객에게 특별한 감정적 울림을 만들어내는지를 분석해보자.
우선 이 작품의 본질을 찾아가기 위해 ‘도원(桃源)’에 대한 학문적, 문학적 메타포를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도원’은 복사꽃 정원이라는 의미 때문에 흔히 특정 공간으로 인식되지만 사실 동아시아 문학에서 도원은 단순한 장소라기보다는 질서가 잘 잡힌, 어떤 이상향의 상태를 의미해왔다.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 도원은 어부가 우연히 복사꽃에 이끌려 발견하는 숨겨진 마을이지만, 그 실체는 전쟁과 권력을 피해 스스로 세상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작은 은둔 공동체에 가깝다. 그곳에는 왕도 없고 권력도 없으며, 오직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부가 다시 그곳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도원은 발견되는 공간이 아니라 기억 속에만 남는 공동체의 가능성으로 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원’은 현실의 부재를 보충하는 상상력이고, 동시에 현실을 비판하는 은유다. 정치가 혼란할수록 도원은 선명해지고, 공동체가 해체될수록 도원은 더욱 절실해진다. 따라서 도원은 탈출의 공간이라기보다 다시 살아갈 방식을 상상하는 서사적 장치다.
만약 여경이 ‘도원’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했다면 단순하게 꿈에 본 이상향 여성을 찾다가 집착과 광증으로 자멸에 이르지는 않았을터이다. 따라서 <몽유도원> 서사의 한 축은 여경이 속한 백제 왕으로서의 세계관이다. 당연히 다른 한 축은 도미와 아랑의 목지부족 세계관이다. 즉 이 작품은 세 인물의 로맨스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는 이야기다. 인물의 감정을 통해 궁정과 목지부족. 권력과 공동체. 소유와 공유 등 상반된 두 세계가 어떻게 서로를 침범하는가를 보여주는 은유와 상징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백제 궁정은 위계의 공간이다.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관계는 명령과 복종으로 조직된다. 반대로 목지부족의 은신처는 순환의 공간이다. 질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관계는 제의와 노동, 기억과 연대 속에서 유지된다. 두 세계는 전혀 다른 질감의 군무와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영상디자인, 대비되는 미장센의 1막 목지부족의 혼례와 2막 백제 왕정의 혼례, 2막 전반 도미의 진혼굿과 2막 마지막 파괴된 심신이 정화된 도미와 아랑의 씻김굿으로 형상화된다.
여경은 꿈을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현실로 끌어내 소유하려 한다. 꿈속에서 본 여인을 현실에서 찾아내 왕비로 삼고, 공동체를 왕권의 질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순간, 몽유는 멈추고 도원도 사라진다. 유영하던 꿈은 고정된 대상이 되고, 그 대상은 곧 폭력의 이유가 된다. <몽유도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사랑 비극이나 설화 재현이 아니다. 권력이 공동체를 어떻게 침범하는가, 욕망이 어떻게 세계를 파괴하는가, 그리고 파국 이후 공동체는 어떻게 다시 스스로를 재구성하는가를 묻는 거대한 제의극에 가깝다.
달의 시간 대 해의 시간, <몽유도원>의 시간 구조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그 질문을 사건보다 장면화로, 가사보다 미장센으로 풀어나간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줄거리보다 이미지를 기억한다. 달빛 아래의 혼례, 바둑판처럼 갈라지는 군무, 일식 속 궁중 혼례, 강 위에 떠가는 짚 인형, 탈춤과 피리, 그리고 마지막 타오르는듯한 일출 배경의 조각배까지. <몽유도원>은 이야기라기보다 서로 다른 질서들이 충돌하는 이미지들을 감각하는 작품이다. 28개의 공식 넘버 가사를 하나하나 여러번 읽어보았지만 어휘 하나하나 힘은 대단하나 길이는 짧은편이고 반복되는 어휘들이 많다. 서사구조보다 이미지를 통한 각인 효과가 뛰어난 작품의 특징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작품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이야기순이 아닌 세 개의 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첫째는 여경과 궁정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세계다. 둘째는 목지 부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의 세계다. 셋째는 도미와 아랑의 사랑이 통과하는 경계의 세계다. 이 세 세계는 각각 다른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 궁정은 직선의 시간 속에 있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세계는 소유와 결정의 논리로 조직된다. 반대로 목지의 세계는 순환의 시간 속에 있다. 공동체는 제의와 노동, 기억과 연대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한다. 도미와 아랑은 그 두 질서 사이를 떠도는 경계의 존재들이다. 그들의 사랑은 로맨스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상실과 제의를 통과하며 공동체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몽유도원>은 이 상반된 질서들을 전혀 다른 무대 언어로 형상화한다. 백제 궁정의 직선적 군무와 권위적 공간 구성, 목지 부족의 유기적 움직임과 수묵화처럼 번지는 영상 디자인, 서로 대비되는 두 혼례와 진혼굿으로 시작해 씻김굿으로 마무리하는 제례는 권력과 공동체가 얼마나 다른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지를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달의 질서다. 목지 공동체는 달빛 아래에서 혼례를 치르고, 기도를 올리며, 죽은 이를 떠나보낸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삶과 죽음, 부재와 귀환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순환의 시간이다. 반면 여경의 세계는 직선적이고 권력형인 태양의 시간이다. 선택은 결정이 되고, 결정은 소유로 이어진다. 이 두 시간의 충돌이 바로 2막 궁정의 혼례 장면에서 등장하는 일식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비로소 씻김굿과 함께 찬란한, 타오를듯하지만 온순해 보이는 거대한 해가 서서히 떠오른다. 이 태양은 여경의 태양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다. 따라서 <몽유도원>의 마지막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과 상실, 애도와 제의를 통과한 사람들이 다시 공동체를 구성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며 이는 지금 동시대와 연결되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몽유도원>이 끝내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도원은 어디에 있는가.

권력의 세계, 꿈을 소유하려는 궁정의 시간
<몽유도원>에서 여경과 호족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권신들의 공간인 백제 왕궁, 즉 궁정은 단순한 공간적 배경이 아니다. 그들만의 특별한 세계와 시간체계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백제 궁정에서 질서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하향식 구조이다.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언어로 조직되고, 혼인은 사랑이 아니라 혈통과 동맹, 권력 재편의 문제로 기능한다. 이 세계에서 사람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권력 구조 안의 특정 위치로 작동한다. 이 질서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넘버가 1막 초반 ‘왕비를 정하소서’다. 해수(김진수 분)와 진림(유성재 분), 호족 세력은 왕비를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배치의 문제로 논한다. 누구와 혼인하는가가 곧 권력 지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이후 등장하는 목지 공동체의 혼례식 넘버인 ‘도원의 혼례’와 왕의 혼례 넘버 ‘일식’과 대조를 이룬다. 목지부족에게 혼례는 공동체를 연결하는 제의지만, 백제 궁정에서 혼례는 권력을 안정시키는 제도다. 여경의 욕망 역시 이 질서 속에서 발생한다.
넘버 ‘몽유도원’과 ‘꿈속의 여인’을 보면 여경은 꿈에서 본 세계를 현실로 끌어오려고 노력한다. 호족세력에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그의 무의식 속에서 꿈에서 만난 여성은 계시로 와닿았다. 불안과 고독이 극단에 처한 여경이 단순한 꿈을 예지몽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순수하기까지 하다. 꿈속 여인을 현실에서 찾아내 왕비로 만들려는 순간, 가속화되는 집착은 ‘억겁의 인연’에서 폭주로 전환된다. 제목만 보면 사랑가지만 실제로는 여러 욕망을 ‘인연’이라고 합리화 하는 착각의 노래다. 혼자서 뛰는 가슴을 억겁의 인연이라고 오독하는 여경의 자기 정당화는 결국 “누군가 그녀와 웃는게 내 것을 빼앗긴거 같다.”는 착시를 견인한다. 이제 여경은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한다.
여경의 가장 큰 문제는 꿈에서 보았다는 이상향인 ‘도원’에 가깝다고 내심 생각하는 아랑과 목지 부족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그는 소통과 공존의 과정을 거치기보다, 일방적으로 지시하며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존재를 이상향으로 규정한다. 그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것은 아랑으로 상징되는 목지 공동체의 질서 그 자체이다. 서로를 돌보며 삶을 순환시키는 세계, 특정 권력자보다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삶의 방식 등은 호족세력에 시달려온 여경에게 대안으로 다가온다. 향실을 통해 목지 부족의 이주를 제안하고, 아랑과 혼인할 경우 도미를 백제의 읍차(부족국가의 우두머리)로 삼겠다고 일방적으로 공표하는 행동은 그 연장선에 있다. 여경의 욕망은 사랑이라기보다 공동체를 향한 결핍 어린 환상에 가깝다. 문제는 그 환상이 끝내 타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소유의 욕망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향실은 여경의 서툴고 일방적인 욕망을 현실의 전략으로 바꾸는 인물이다. ‘억겁의 인연’이 여경의 자기기만적 욕망을 드러낸다면, 도미와 향실이 팽팽하게 맞서는 넘버 ‘계략’은 그 욕망이 정치의 언어로 직조되는 과정이다. 향실은 여경의 욕망을 정치적 전략으로 전환해 실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향실이 그저 단순히 여경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악역이 아닌, 끝까지 국가 질서 안에서 사고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전략은 목지부족에게는 잔혹하지만 동시에 철저히 합리적이다. 목지족을 국가 질서 속에 편입시키고, 도미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하며, 아랑을 왕비로 만들어 권력을 안정시키는 것. 향실은 이 모든 과정을 국가 운영의 논리 안에서 수행한다. 아랑과 도미,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천관녀 비아(홍륜희‧정은혜 분)조차 위험을 충분히 감지했으면서도 향실의 전략에 흡수되어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끝내 향실이 내세운 질서 바깥으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와 자율이 서서히 봉쇄되는 과정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그 체계 안으로 말려 들어가 버린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권력의 진짜 폭력을 드러낸다. 권력은 언제나 노골적인 강압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때로는 질서와 안정, 보호와 합리성이라는 명분을 동반하여 공동체가 스스로를 포섭하게 만든다.
이런 계략이 차곡 차곡 쌓여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넘버 ‘대왕이 수상해’는 또 다른 결을 형성한다. 표면적으로는 해수와 진림이 여경의 이상 행동을 의심하는 장면이지만, 실상은 권력 내부가 이미 균열에 이르렀음을 인식하는 장면이다. 호족들은 왕의 욕망을 정치적 위기로 읽기 시작한다. 이제 왕비족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침몰하는 이 국가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이다. 여경의 개인적 집착은 이미 국가 질서를 흔드는 수준으로 번져 있으며 그 균열은 여경과 도미가 인생을 건 바둑 장면 ‘흑과 백’에서 폭발한다. <몽유도원> 전체에서 가장 정치적인 이 장면은 바둑을 두는 여경과 도미는 무대 심부, 조명의 바깥에 위치짓는다. 바둑판은 무대 전체를 아우르는 넓은 공간이다. 십여명의 앙상블이 흑백 바둑알로 매칭되면서 예측 불허의 인간 바둑 라이브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바둑은 상대를 한 번에 제거하는 게임이 아니라, 서서히 포위하고 압박하는 게임이다. 국가 권력이 공동체를 흡수하는 방식을 시각화한 여경과 도미의 바둑 대결은 이 작품의 백미로 손꼽히는 만큼 섬세한데 역동적이고 전략적인데 관조적이다.
도미 입장에서 이 바둑은 부족과 아내를 모두 건 인생의 도박이다. 이미 향실의 계략으로 수를 다 읽혀 반드시 지는 게임임을 모르는 상태이다. 여경은 도미와 대결하지만, 실은 목지 공동체 전체와 싸우고 있다. 역으로 여경은 목지공동체 전체를 접수하기위해 계략을 써서 바둑 을 제안한 것이다. 이 바둑판은 연적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 사이의 전쟁이다. 흑과 백으로 갈라진 군무와 바둑판 같은 동선은 공동체를 판 위의 말처럼 다루는 권력의 시선을 드러낸다. 서병구 안무가는 흑집이 백돌을 둘러싸고, 반대로 백집이 흑돌을 둘러싸는 긴박감 넘치는 대결을 시시각각 해체하고 재조직하며 군무의 새로운 영역을 디자인해내었다. 흑백 의상의 앙상블이 택견과 컨템포러리 댄스의 융합으로 서로의 집을 빼앗는 안무는 움직이는 바둑판을 보는듯 박진감이 넘쳐난다. 샤롯데씨어터 1200여석 객석 어디에서든 모든 관객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라이브 바둑판은 결국 여경에게 승기를 안긴다. 이로써 도미는 모든 것을 잃지만 끝나도 끝난 것은 아니다.
2막을 여는 여경과 아랑의 궁중 혼례는 목지의 혼례와 정반대의 질감으로 연출된다. 목지의 혼례가 달빛과 원형의 군무 속에서 진행되었다면, 백제 궁중 혼례는 묵직한 국가 의례로 웅장하고 엄중하다. 무대 양 끝에서 두 대의 대북을 앙상블이 직접 타북하며 본격화되는 여경과 아랑의 혼례는 태양이 높이 떠 있는 낮 시간대 권신들이 보는 앞에서 거행된다. 원형으로 시작된 궁녀들의 군무가 V자 대열로 정렬되며 공동체적 질서는 권력의 질서로 재편되고 동시에 일식이 발생한다. 태양을 달이 가리는 일식은 그 자체로도 여경의 몰락을 상징한다.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태양이 순환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목지부족의 달에게 가려진 일식의 시간은 단순한 징조가 아니다. 달과 해, 공동체와 권력, 순환의 시간과 직선의 시간이 충돌하며 무대 전체가 붕괴의 상태로 진입한다. 덕분에 아랑은 탈출할 수 있었고 여경은 당혹과 혼돈에서 정신을 차리자 이내 아랑 포고령을 내린다.
향실이 아랑을 여경의 왕비로 삼은 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잘못된 선택임을 깨달고 놓아준 후에도 여경은 아랑에 대한 집착을 광속으로 부풀린다. 넘버 ‘내 것이다’에서 여경은 심신이 붕괴되었음을 드러낸다. 왕이지만 왕이 아니고 여경이지만 여경이 아닌 광적인 상황이다. 사랑도 국가도 아닌 오직 “내 것”만을 외친 그는 스스로 왕이기를, 인간 여경이기를 포기한 순간, 아랑을 놓아주었다고 밝힌 향실마저 사사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넘버 ‘공허한 포옹’은 이 연장선에 자리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궁정은 무너지고, 여경은 마지막까지 아랑을 찾아 헤매이나 그가 마주한 것은 더 이상 꿈에서 본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다. 스스로 얼굴을 지워버린 아랑 아닌 아랑이다. 그녀의 망가진 얼굴 앞에서 여경은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였고, 공동체가 아니라 지배였다. 그래서 ‘공허한 포옹’은 절망의 노래가 아니라 인식과 깨달음의 넘버이다. 이제야 여경은 도원의 소유 불가능을 깨닫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역사가 개입한다.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 장수왕의 화살이 빠른 속도로 여경에게 달려든다. 실제로 멀리서 화살을 쏘는 음향 디자인과 함께 날아와 박히는 화살의 사운드 이펙트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지만 아마도 더 놀란 것은 극중 여경 자신이었을 것이다. 의기소침하면서도 막무가내의 순수함을 드러낸 김주택 여경은 ‘공허한 포옹’에서 유럽 오페라좌를 뒤흔들었던 바리톤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화려하고 위풍당당한만큼 민우혁 여경은 ‘공허한 포옹’ 에서의 완전히 무너져 내려 안쓰럽고 슬프다. 정체 불명의 욕망의 실체를 마주한 여경의 죽음은 어쩌면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공동체의 세계, 도원을 함께 가꾸는 사람들
여경의 궁정이 위계와 소유의 질서로 작동한다면, 목지 부족의 세계는 전혀 다른 원리 위에서 움직인다. 이곳에서 삶은 누군가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공동체는 함께 노동하고, 함께 기억하며, 함께 제의를 치르는 과정 속에서 유지된다. 따라서 목지의 질서는 국가 이전의 원초적 공동체에 가깝다. 법률보다 관습에, 명령보다 기억에, 소유보다 공유에 가까운 이상향의 세계다. 이 질서는 ‘도원의 혼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목지 부족의 혼례는 백제 궁정의 혼례와 정반대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궁중 혼례가 수직적 권위와 긴장감으로 조직된다면, 목지의 혼례는 원형의 흐름 속에서 진행된다. 부족민들은 새부리 모양의 짚모자를 쓰고 새 형상의 지팡이(솟대)를 들고있다. 만월 아래에서 진행되는 혼례는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자연과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제의에 가깝다. 정월 대보름이라고 상상할만한 장면 속 시간성 위에서 부족민들은 다음 농사를 위한 불놓기를 준비하며 밤하늘로 화살을 쏘아 올린다. 공동체의 삶이 자연의 순환과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이미지들이다. 불은 파괴가 아니라 재생이며, 화살은 전쟁 무기가 아니라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생명의 신호가 된다. 아랑과 도미가 혼례를 올리는 이 장면은 목지부족을 상징하는 소품인 피리소리로 시작된다. 여러 국악기들이 하나씩 모여들면서 웅장한 고향악으로 확장되고, 부드럽고 따뜻한 비아의 창가가 공동체의 연대를 배가시킨다. 이 혼례에서 중요한 것은 아랑과 도미 개인의 사랑만이 아니다. 혼례는 두 사람의 결합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지속을 확인하는 의례로 기능한다. 따라서 ‘도원의 혼례’는 공동체의 존재 선언에 가깝다.
이어지는 ‘목지의 옛 노래’는 목지 공동체의 집단 기억을 담고 있다. 부족민들은 과거의 고난과 상실을 노래하면서도 그것을 개인의 비극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기억은 공동체 전체의 감각으로 공유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목지 사람들이 단순히 평화로운 이상향의 주민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박해와 유랑을 경험했다. 한때 백제의 전신인 마한을 이끌었으나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에 흡수되면서 목지부족은 견제의 대상이 되어왔다. 목지의 세계는 현실을 모르는 낙원이 아니라 상실과 고통을 견디며 유지되어온 오랜 연대의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의 시간성을 드러내는 넘버가 ‘아, 달님이시여’다. <몽유도원>에서 달은 단순한 자연 이미지가 아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난관을 버티며 살아낸 공동체의 시간 그 자체이다. 선사시대 농경사회가 대부분 그러하듯 목지의 세계 역시 달빛 아래에서 움직인다. 혼례도, 기도도, 애도도 모두 달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계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월력으로 농사를 짓는 농경사회의 습관처럼 삶과 죽음, 부재와 귀환이 서로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모두 달의 시간성 덕이다. 아랑과 비아가 함께 부르는 ‘아, 달님이시여’는 바로 그 순환적 시간에 대한 노래다. 달은 위에서 아래를 통치하는 태양과 달리, 조용히 공동체 전체를 비춘다. 이 빛 아래에서는 특정 개인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어둠과 같은 빛을 공유한다. 그래서 목지의 세계는 “누가 지배하는가”보다 “누가 함께 살아가는가”에 집중한다.
이 공동체적 감각은 2막에서 더욱 깊어진다. 2막을 여는 백제 왕의 혼례, 즉 여경과 아랑의 혼례가 갑작스러운 일식으로 혼돈인 상황에서 탈출한 아랑은 제일 먼저 목지부족을 찾아가 도미의 진혼례를 치룬다. 넘버 ‘진혼’이다. 비아의 집전 하에 부족민들이 애도의 퍼포먼스를 더하고 아랑이 상주가 되어 치루는 진혼굿은 도미를 대신하는 짚인형을 작은 배에 태워 강으로 흘려보내면서 마무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미의 죽음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목지족은 그의 부재를 공동체의 시간 안으로 받아들인다. 짚 인형을 조각배에 실어 강으로 띄우는 구조, 공동체의 합창과 제의적 군무는 한국 전통 진혼굿과 유사한 형식을 이룬다. 이 장면에서 공동체는 도미를 떠나보내지만 그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다. 부재는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의 형태가 되고 이 지점에서 2막 전체는 거대한 굿의 시간으로, 전통적인 한국무교의 제례 안으로 본격 편입된다.
도미의 진혼굿을 마치고 마땅한 지도자 없이 고통의 유랑을 거듭한 목지부족은 멈추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 중심에 있는 천관녀 비아가 있다. 넘버 ‘도원은 어디에’이다. 도원은 누군가 혼자 발견하는 이상향이 아닌 함께 찾아가야 하는 세계다. 도원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서로의 빛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상태라는 것이다. 도연명의 이상향 개념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가사들이다. 도원은 이미 존재하는 낙원이 아니다, 상실 이후에도 사람들이 서로를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만들어지는 매번 새로이 생성되는 이상향이다. 도미의 진혼굿을 끝내고 아랑은 자신의 고통이 아름다운 얼굴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한번 쓰는 껍데기인 얼굴을 훼손한 채 떠돌던 아랑은 맹인 도미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 해후하기에 이른다. 남편은 눈을 잃고 아내는 얼굴을 잃었으나 마냥 행복한 부부의 ‘인생은 한바탕 꿈놀이’는 공동체 정서의 절정이다. 탈춤을 추는 얼굴 잃은 아랑, 피리를 부는 눈 잃은 도미, 그들을 둘러싼 민중들의 서로를 위무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움직임은 이 작품 전체에서 가장 한국적이며 아름다운 장면이다. 상실 이후의 춤, 죽음과 애도를 통과한 사람들이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수행하는 제의에 가까운 장면이기도 하다. 탈은 얼굴을 감추는 동시에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낸다. 개인은 탈 속에서 공동체의 몸으로 확장된다. 따라서 ‘인생은 한바탕 꿈놀이’는 사랑의 회복을 넘어 공동체의 재생을 몸으로 수행하는 이상향 그 자체이다.
마지막 넘버 ‘다시 도원으로’에서 이 공동체는 다시 이동한다. 일출을 배경으로 조각배를 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아랑과 도미, 그리고 뒤늦게 무대 위 양옆에서 등장하는 비아를 비롯한 부족민들의 모습은 현실과 내세의 경계를 흐린다.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실명했던 도미의 눈은 다시 열리고, 얼굴을 스스로 훼손했던 아랑의 상처 역시 사라져 있으니 이 장면은 정화 이후의 존재 상태이다. 한많은 영혼을 정화하는 씻김굿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목지부족은 죽음과 상실, 욕망과 폭력을 통과한 뒤 비로소 새로운 시간 속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높이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며 새로운 도원을 향해 이동한다. 아마 그 도원은 전혀 다른 형태의 시공간일 것이다. 도원은 이미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끝내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이름이라는 것을 한번 더 각인하는 마무리이다.

경계의 사람들, 사랑은 어떻게 제의가 되는가
<몽유도원>에서 도미와 아랑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두 질서 사이에 놓인 경계의 존재들이다. 목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권력의 시선 안으로 끌려 들어오고, 사랑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공동체의 운명까지 떠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사랑은 개인적 로맨스에서 출발하지만, 점차 상실과 애도, 그리고 공동체적 제의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넘버 ‘그리고 그리며’가 그 시작점이다. 작품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지만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 세상을 다 헤매도 그대를 찾으리”는 작품의 복선이기도 하다. 도미와 아랑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래를 그리지만, 그 미래는 개인의 행복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언어에는 공동체의 지속과 삶의 순환에 대한 감각이 스며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사랑이 끊임없이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어 견제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향실은 이를 정치적 전략 속에 배치한다. 즉 도미와 아랑의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닌 백제와 목지부족 사이의 긴장관계 속 재물인 것이다.
권력은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바꾸려 한다. 넘버 ‘그대라도, 부디’가 절절한 이유이다. 도미와 아랑은 서로를 살리기 위해 거짓 이별을 선택한다. 자기 자신보다 상대의 생존을 우선시하고 사랑은 더 이상 소유의 감정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기위한 이타심으로로 변한다. 그래서 이 장면은 여경의 사랑과 정확히 대조된다. 여경이 “내 것”을 외칠 때, 도미와 아랑은 “그대라도 살아달라”고 말한다. 여경의 ‘소유’는 도미의 ‘내어줌’에 비할 수 없다. 여경과 도미가 연인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권력의 욕망과 공동체적 사랑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이 작품은 이 충돌이 폭발하는 ‘죽여주소서’를 배치해 전복시키기도 한다. 이 넘버에서 세 사람은 처음으로 완전히 정면충돌한다. 도미와 아랑은 서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고, 여경은 끝내 그 관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나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에게 사랑은 획득의 문제이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감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여경은 폭력을 선택한다. 흑화된 도미가 여경에게 반발하듯 “내가 죽은들 아랑을 잊겠는가”라고 외치는 순간, 여경은 자신의 비녀로 도미의 눈을 찌른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신체 훼손과 함께 공동체를 바라보는 감각 자체를 파괴하려는 폭력으로 확장된다. 권력은, 여경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끝내 제거해 버린다.
향실에 의해 조각배에 태워진, 두 눈을 잃은 도미의 표효는 넘버 ‘어이해 이러십니까’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피에 젖은 천으로 눈을 감싼 도미가 군사들에게 끌려와 조각배에 실려 떠내려가는 장면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처절한 순간이다. 여경의 폭주에 고뇌하는 향실은 끝내 도미를 직접 죽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정치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지만, 동시에 폭력의 끝을 목격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2막에서 아랑을 놓아주는 것도 연결된 맥락이다. ‘어이해 이러십니까’는 도미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안에 잠겨있던 본연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록 발성과 창극 발성을 넘나드는 도미역 이충주, 김성식 배우의 포효는 각기 다른 결이지만 가늠할 수 없는 무게의 감동으로 와닿는다. 이충주가 록 발성의 고음 향연과 창극 발성의 원숙한 전환으로 성숙함을 드러내었다면 김성식의 직설적이고 파워풀한 록 발성과 에너지는 청년 도미 고유의 분노와 애절함을 양껏 분출한다. 도미의 마지막 포효는 단순한 고통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와 연인을 모두 잃은 한 생명체의 원초적 절규이다.
2막의 진혼굿에 이은 넘버 ‘그대여’에서 아랑은 도미의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끝내 놓지 못한다. 개인적 상실의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슬픔은 곧 공동체적 제의 속으로 이동한다. 아랑은 혼자 울지 않는다. 비아와 부족민들의 애도 속에서 아랑은 점차 깨달음은 얻는다. 급진적인 아랑의 성찰은 ‘아랑은 없다’에서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훼손하면서 무거운 고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기에 이른다. 갈대밭에서 얼굴을 긁어 피를 흘리는 이 충격적 장면은 단순한 자기 파괴가 아니다. 여경이 욕망했던 것은 꿈에서 본 여인을 닮은 아랑의 얼굴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아랑은 여경의 집착과 욕망의 좌표를 스스로 지우고 권력이 부여한 대상성을 제거한다. 얼굴을 잃는 것과 동시에 공동체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는 셈이다. 하윤주 아랑의 절절한 극고음 창가와 유리아 아랑의 록킹한 파괴적 깨달음이 극장 전체를 가득 채우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넘버 ‘어둠이 깊어질수록’은 도미와 아랑의 해후를 담아낸다. 도미는 시력을 잃었고, 아랑은 얼굴을 잃었다. 즉 이들은 더 이상 외형으로 서로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나 사랑은 시선의 문제가 아님을 이들도 알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기억과 감각, 존재의 리듬이 이미 충만하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단순한 낭만적 감정에서 공동체적 감각의 연장으로 재정의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성찰은 ‘인생은 한바탕 꿈놀이’에서 마침내 제의로 확장된다. 탈춤과 피리, 군무와 합창 속에서 도미와 아랑은 공동체 전체의 몸짓 속으로 스며든다. 결과적으로 <몽유도원>에서 남녀간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해체되고, 상실되지만 다시 공동체 속에서 재구성된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작품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도원은 두 사람이 서로를 독점하는 세계가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의 빛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이름이라는 것을.
한국적 뮤지컬이라는 질문
<몽유도원>을 보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의 여운이다. “한국적 소재를 사용했다”고 단순화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성된다. 한국적 정서와 공연의 다채로운 변주가 어떻게 융합하여 동시대성을 만끽하게 하는지 골똘히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몽유도원>은 한국적 뮤지컬이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끌어오게 만든다. 오랫동안 한국 창작뮤지컬은 이 질문 앞에서 놓여왔다. 전통 설화와 역사를 차용하거나 국악을 삽입한다고 해서 곧바로 ‘한국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들이 소재는 한국적이지만 형식은 서구 뮤지컬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반대로 전통 양식을 과도하게 전면화할 경우 현재의 관객 감각과 멀어지기도 했다. <몽유도원>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양극단을 묘하게 피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전통 요소를 ‘사용’하지 않는다. 공동체와 시간, 몸과 제의를 조직하는 방식 자체를 한국적 감각 위에 구축한다. 즉 소재가 아니라 구조에서 한국성이 발생하도록 섬세하게 설계되고 안배된 작품이라는 의미이다.
가장 중요한 요인중 하나가 군무이다. <몽유도원>의 군무는 단순한 배경 퍼포먼스가 아닌 서사 그 자체다. 대표 넘버인 ‘흑과 백’은 “검은 점 하나/목숨을 건 한 수/고요함이 출렁이고/숨이 섞인다” 정도 길이의 가사가 4번 반복하는 것 외에는 모두 퍼포먼스로 채워진다. 4분이 넘는 긴 퍼포먼스로 바둑판을 실제로 보는듯하다. 움직임만 집중해서 보아도 가사가 움직임 끝에 따라오는 듯한 체험을 한다. 군무는 공동체의 감각 자체를 시각화한다. 궁정의 군무가 직선과 위계, 긴장감으로 조직된다면, 목지부족의 움직임은 원형과 순환, 유기적 연결 속에서 흐른다. 특히 ‘도원의 혼례’와 ‘도원은 어디에’, ‘인생은 한바탕 꿈놀이’ 등에서 드러나는 군무는 서구 앙상블 넘버의 집단 동선과는 다른 감각을 만들어낸다. 우리 고유의 움직임인 택견의 완급과 유연함, 마당놀이와 탈춤의 자유로움이 환상의 비율로 융화된 안무이다. 여기서 몸은 개인의 기교를 드러내기보다 공동체적 리듬 속에 스스로를 섞는다.
서병구 안무가가 구축한 움직임의 질감은 마치 한지처럼 스며들며 작품을 반복 관람할수록 새로운 풍미를 체험케 한다. 관객은 장면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감각”하게 된다. 이는 ‘인생은 한바탕 꿈놀이’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탈춤과 피리, 원형 군무와 집단적 리듬은 이 장면을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수행으로 만든다. 개인의 몸은 탈 속에서 익명화되고, 익명화된 몸들은 다시 하나의 집단적 감각으로 연결된다. 이때 무대는 이야기의 공간이 아니라 굿판에 가까운 공간으로 변한다. 이러한 제의성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2막 초 도미의 천도 장면은 진혼굿의 구조를 떠올리게 하고, 마지막 조각배 항해는 씻김굿의 정화와 이행 구조를 연상시킨다. 즉 <몽유도원>은 단순히 “굿을 소재로 삼는” 작품이 아니라, 서사 전체를 거대한 제의 구조 위에 배치한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서구 뮤지컬의 감정 구조와도 분명히 달라진다. 서구 뮤지컬의 감정이 개인의 욕망과 성취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몽유도원>의 감정은 공동체적 정동 속에서 확장된다. 슬픔은 혼자 울지 않고 함께 애도케 하며, 사랑은 두 사람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벅찬 장면은 의외로 도미와 아랑의 재회 장면이 아니다. 많은 관객들이 ‘도원은 어디에’와 ‘인생은 한바탕 꿈놀이’, 그리고 마지막 ‘다시 도원으로’에서 더 크게 흔들리며 환호의 박수를 보낸다. 개인의 감정이 공동체의 감각으로 확장되는 순간, 관객 역시 무대 바깥의 공동체 일부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이 감각은 특히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깊게 맞닿는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광장과 거리에서 반복적으로 공동체적 감각을 경험해 왔다. 촛불집회와 응원봉 시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집단적 발화의 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되었다. <몽유도원>이 동시대 관객에게 특별히 강하게 다가오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작품 속 목지 공동체는 단순한 과거의 부족이 아니다. 그들은 무너진 질서 속에서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형상, 즉 동시대 우리의 모습에 닿아있다. 따라서 마지막 조각배 장면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공동체가 끝내 새로운 시간을 향해 이동하는 이미지이며, 동시에 관객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가. <몽유도원>은 여기에 단순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감각을 남긴다. 공동체는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상실을 통과하고, 서로를 애도하고, 다시 관계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 그래서 <몽유도원>의 마지막 일출은 단순한 희망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창작뮤지컬을 넘어선다. <몽유도원>은 한국적 소재를 활용한 뮤지컬이 아니라, 한국적 공동체 감각과 시간성을 공연 형식 자체로 재구성한 작품에 가깝다. 결국 이 작품이 증명하는 것은 하나다. 한국적 뮤지컬은 전통을 재현하는 데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관객들이 서로의 빛이 되어 함께 살아갈 감각을 무대 위에서 다시 발견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