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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다이애나와 홍련의 멜랑콜리, '말해지지 않은 것'을 기억하는 방식

글 |현수정(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사진 |. 2026-04-30 83

현수정 공연 평론가가 하나의 테마를 정해 뮤지컬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뮤지컬 <홍련>(2024) 공연 장면.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상실의 경험 속에서 의식의 작용은 미미하게 느껴지곤 한다. 무의식이 탈출할 수 없는 게임처럼 작동하기 시작하면, 꼼짝없이 사로잡혀 증상을 반복하게 된다. <홍련>(작·작사 배시현, 작곡 박신애)의 홍련과 <넥스트 투 노멀>(작·작사 브라이언 요키, 작곡 톰 킷)의 다이애나가 그렇다. 이들의 고통은 왜 그리도 끈질기게 지속되는 것일까.1)

 

금지된 애도, 멈춰진 시간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을 때 슬픔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거나 어떠한 이유로 상실을 마주할 수 없으면 대상을 떠나보내는 대신 자신 안으로 끌어들여 동일시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그 부재함을 받아들이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상실의 순간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어떤 것에도 의욕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애도가 지연되면 멜랑콜리로 이어질 수 있다.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함이 아닌 병리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애도와 달리 멜랑콜리는 의식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다. 그런 만큼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누구를 잃었는지 알더라도 그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로 인해 자신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2)

 

멜랑콜리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환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넥스트 투 노멀>의 다이애나는 게이브의 현존을 느끼고, <홍련>에서 홍련은 자신이 아버지와 동생을 처단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이들이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를 허용하지 않는 환경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국의 교외 지역에서 중산층 가정의 주부로 사는 다이애나. 언뜻 그녀에게는 상실을 극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오프닝 넘버의 첫 가사가 “완벽한 내 가족”, “행복한 날들”인 것처럼. 하지만 알고 보면 그와 같은 시선이 바로 17년이 지나도록 게이브를 놓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다이애나는 한 살도 안 된 게이브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제대로 애도할 수 없었다. 당시 병원에서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에게 4개월 이상 슬픔이 지속되는 것이 병적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사람에 따라 애도의 방법과 기간은 천차만별임에도 사회는 ‘매뉴얼’ 대로 감정을 통제하려 든다. 파인 박사는 다이애나가 약물 치료로 무기력해지자 안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매든 박사 역시 전기충격 치료 후에 그녀가 기억을 상실하자 성공적인 결과로 판단한다.

 

여기에 ‘단란한 가정’을 강박적으로 낙관하는 남편 댄 또한 그녀를 버겁게 한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반복적인 위로는 ‘괜찮아져야 한다’는 부담감을 키울 뿐이다. 그는 다이애나의 기억 상실을 반기며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다이애나는 헨릭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노라와 비교할 수 있는데, 노라가 남편 헬메르에게 “당신은 날 이해하지 못해”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다이애나도 댄에게 “넌 몰라”라고 노래한다.

 

이들은 다이애나에게 이성중심적이고 가족주의적인 환경을 형성한다. 서구 문화의 근간을 이룬 논리적이고 언어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방식과도 연결된다. 다이애나의 말에서 논리적인 문제가 드러나지 않으면 괜찮아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언어에 담기지 못하는 감정과 정서다. 게이브는 바로 그렇게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존재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2022) 공연 장면. 사진=엠피앤컴퍼니

 

한편, 홍련은 ‘천도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원귀로 불려온 그녀의 죄는 특이하게 소개된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우를 해쳤다고 주장 중”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장 중”이라는 말이다. 홍련은 다이애나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상실의 시간 속을 헤매고 있다. 멜랑콜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자기 비난과 자기 처벌의 망상”3)이다. 잃어버린 대상과 자신을 동일화하면서 그에 대한 다양한 감정도 스스로를 향하기 때문이다.

 

천도정은 사실 재판장이 아니다. “길 잃은 망자들을 씻김으로 천도하는” 곳이다. 저승차사들의 수장인 강림이 밝히는 것처럼 “망자가 재판의 형식을 빌려 말을 하고 싶어 했기에, 그리 한 것뿐”이다. 홍련의 내면에는 매우 복잡한 움직임이 얽혀서 일어나는 중이다. 언니 장화가 세상을 떠나게 된 진짜 이유를 알게 된 후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진실을 몰랐다는 것과 장화가 새어머니로부터 학대당하는 상황을 외면했던 행동에 대한 지독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과 무력감은 망상으로 재구성된다. 자기 비난과 처벌의 비틀린 형태다.

 

그런데 홍련이 상실한 대상은 장화뿐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언니와 함께 아버지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왜 네 가장 큰 단죄의 대상은 아버지지?” 천도정의 재판관인 바리의 질문은 사뭇 날카롭다. 홍련의 칼날은 모든 것을 주도한 새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향해 있다. 바리가 그러했듯 홍련도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고 ‘거절당한 딸’인 것이다. 그녀가 만들어낸 혐의는 자신 안으로 내면화한 아버지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바리가 홍련의 씻김을 집요하게 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이번 재판은 “십삼만 구천구백 하고도 아흔여덟 번째”다. 끊임없이 똑같은 과정이 반복되어왔다. 저승차사들의 수장인 강림이 왜 이리 저 망자를 놓지 못하냐고 질문하자 바리는 “나 같아서”라고 대답한다. 바리는 일단은 애도 작업을 어느 정도 잘 이뤄냈던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망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부모에게 향하던 마음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도라는 것이 어디 완전하게 완료될 수 있는 일이던가. 여전히 내면에 존재하는 상처받는 아이는 닦아내도 조금씩 차오르는 눈물샘처럼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닦아 줘야 한다.

 

비체, 거부된 것의 귀환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이애나와 홍련의 슬픔은 오래된 상실과 맞닿는다. 아버지의 언어가 지배적인 이 세상으로 나오기 전, 아이는 어머니를 밀어내고 그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아브젝시옹’이라고 일컬은 과정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잃을 때면 이 “기억도 없이 우리 안에 기재되어”4) 있는 합일의 흔적이 밑바닥에서 조용히 출렁인다.

 

거부당한 ‘아브젝트’는 위협적이고 거부감이 들거나 오물처럼 더럽다고 여겨지는 것의 의미를 포함한다. 비체(卑體)라고도 번역된다. 다이애나와 홍련의 이야기는 이러한 비체의 귀환으로도 읽을 수 있다. ‘노멀’한 사회와 가족의 서사를 위해 억압되고 배제된 존재들로서. 그리고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어머니의 애도다. 다이애나뿐 아니라 홍련에게도 해당된다. 매장이 금지된 오빠를 목숨 걸고 묻어주던 안티고네가 ‘같은 자궁에서 태어난 존재에 대한 사랑’을 추구한 것처럼.

 

비체는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채 경계에 남아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5)이기도 하다. 환상인 게이브와 혼령인 홍련은 애도가 금지되어 억압된 것을 불러낸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은 논리적인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표현된다. 거친 소리와 리듬, 반복과 변주, 시적 발화 등이 감각을 깨운다.6)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2022) 공연 장면. 사진=엠피앤컴퍼니

 

<넥스트 투 노멀>에서 게이브는 록 발성과 함축적인 가사로 다이애나의 무의식을 대신 노래한다. “나는 너의 꿈, 두려움, 뭐든 원하는 건 다 돼 줄게. … 나는 기억 그 이상, 난 어둠, 안개, 나는 미스터리.” 그의 대표적인 넘버인 ‘난 살아 있어’의 가사다. 리프라이즈에 담긴 “난 영원히 흐르는 시간, 난 사장된 모든 멜로디”라는 가사는 그가 다이애나에게 절대로 사라질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애프터쇼크’는 다이애나가 전기충격 치료로 기억을 잃은 직후 게이브가 잔잔하게 부르는 곡이다. 그렇지만 “악마를 몰아내고 찾은 잠깐의 휴식”이라는 가사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존재가 가져올 균열을 예감하게 한다. 그는 다이애나를 깨우고 그녀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고 지금까지의 삶을 전복할 수 있게 해주는 틈새다.

 

한편, ‘내 신경 정신과 의사와 나’에서는 파인 박사가 차가운 말투로 온갖 약의 사용법을 읊는 가운데 다이애나가 그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충동을 노래한다. 경쾌한 왈츠와 불협화음이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기괴함이 증상을 통제하려 드는 의사와 다이애나의 분열된 정신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홍련>에서 ‘담장 안 소녀’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마음속 소리를 들려준다. “내 비명은 안 들린데도 아버지가 지른 비명은 세상에 들리겠지. 아주 멀리까지 들리겠지.” 원작은 1656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소설인데 참으로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5음 음계가 국악 풍의 느낌을 주는 가운데 록 사운드가 그녀의 억눌린 감정을 묵직하게 밀어 올린다. ‘내 비명’이라는 가사 부분에서는 블루노트 음계의 색채로 자조적인 슬픔을 감지하게 한다. 2도의 온음이 반복되는 것은 담장 안을 넘어가지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상실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착상태를 느끼게 한다.

 

뮤지컬 <홍련>(2024) 공연 장면.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이와 같은 2도 진행은 작품의 전반에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대표적인 모티프다. 스윙 재즈로 통통 튕기며 경쾌하게 진행되는 ‘죽어야만 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죽어야만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절망적이고 시니컬한 가사가 어우러지며 음악적인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음악적으로 낯설게 하며 생각을 유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빈 무대 위에서 강림이 사회자로서 극을 진행하고 바리와 차사들이 극중극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메타적인 연출 양식(이준우 연출)과도 잘 어우러진다.

 

음악이 여러 장르를 변화무쌍하게 아우르는 것은 멜랑콜리의 조울증적인 특징과도 연결된다. 힙합을 활용한 ‘돌림노래’는 지독하게 반복적이고 끈질긴 증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박신애 작곡가는 망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다양한 장르를 활용하는 콘셉트를 설정했다고 한다.

 

‘괴물’은 하드록 스타일의 격정적인 넘버다. 홍련은 자신을 요물이라고 주장하며 소환된 아버지의 영혼이 ‘장화’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자 분노를 폭발시킨다. “열여섯 소녀가 사랑 없이 죽어갈 때 당신들은 뭘 했지”라는 가사는 세상을 향한 절규다.

 

그런가 하면 바리가 정성스럽게 부르는 ‘씻김’은 초반부에서 씻김굿을 제대로 구현한다. 계면조의 진행과 목소리에서 꾸며지는 시김새, 그리고 사설까지. 이후 점차 뮤지컬 음악으로 전개되는데, 이때에도 허스키한 호흡과 흘러내리고 도약하는 발성 등이 씻김의 정서를 전한다.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2022) 공연 장면. 사진=엠피앤컴퍼니

 

뮤지컬 <홍련>(2024) 공연 장면. 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두 죽음 사이, 기억의 공간

게이브와 홍련은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애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을 대변한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에 따르면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두 번 죽는다. 그리고 애도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하면 죽은 자는 ‘두 죽음 사이’의 기괴한 존재가 된다. 일종의 유령처럼 나타나 세상의 부조리한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7)

 

극 중 이들이 출몰하는 3층 공간과 천도정은 경계적인 성격을 지닌다.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 3층은 시간이 멈춘 듯 게이브의 유품들이 고스란히 보관된 곳이고, 천도정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이는 “동질적인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며, ‘정상성’으로부터 일탈된 ‘타자의 공간’”8)이다. “모든 장소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 일종의 반공간”9)이기도 하다. 이곳들은 탈출할 수 없는 무의식의 게임처럼 다이애나와 홍련을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이들이 세상의 이면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다이애나는 노라가 그러했듯이 집을 나간다. ‘노멀’이 지속되는 ‘그저 또 다른 날’이 아닌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는 삶을 향해서. 그리고 딸 나탈리에게 말한다. “너한테만은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난 그게 뭔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처음으로 게이브의 죽음에 대해서도 직접 이야기해준다. 상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치유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홍련은 바리와 차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넘어선다. 그녀가 변화된 것은 씻김을 해주기 위해 애를 쓰다가 바닥에 쓰러진 바리를 발견하면서다. 바리 역시 홍련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다시금 감싸 안고 다독일 수 있었다. 홍련과 바리가 서로의 애도를 돕는 것은 상호구원인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애도는 기억을 지우고 봉합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구멍 뚫린 상태로 피가 흐르는 가운데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나아가는 것이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다락방과 천도정은 폐기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애도와 멜랑콜리 사이를 진동할 수밖에 없으니. 이때 멜랑콜리는 배제된 것들을 기억하며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들어줄 수 있게 한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살아가게 한다.

 


[1] 이 글에서 <넥스트 투 노멀>에 대한 해석은 필자의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현수정, 「뮤지컬에 등장하는 문제적 어머니들의 억압과 전복 ― <베르나르다 알바>, <넥스트 투 노멀>, <형제는 용감했다>를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67, 한국연극학회, 2018. 

[2]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10, 246-247쪽.

[3] 맹정현,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책담, 2015, 43쪽.

[4] 줄리아 크리스테바, 『검은 태양』, 김인환 옮김, 동문선, 2004, 27쪽.

[5]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1, 25쪽.

[6]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242쪽.

[7]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219쪽.

[8] 현수정, 「사회적 재난 소재 뮤지컬에서의 예외상태와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 -<숲속으로>, <여신님이 보고 계셔>, <컴 프롬 어웨이>를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84, 한국연극학회, 2023, 169쪽.

[9]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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