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프레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에 크리스토퍼 말로를 공동 작가로 등재했다. 컴퓨터 언어 분석(스타일로메트리)을 통해 작품에서 말로의 뚜렷하고 실증적인 증거들을 입증해 냈다. 일관성 없는 문체와 급격한 변화는 이미 수 세기 의심을 낳았고, 이 연구는 그 추측을 확증했다. 셰익스피어 역시 혼자 잘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독한 천재라는 신화는 무너졌고, 발표는 학계와 공연계,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극작가 리즈 더피 애덤스도 그중 하나였다. 고전하는 배우로 극작을 꿈꾸던 애덤스는 항상 셰익스피어를 동경했고, 스파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말로의 생애를 연극으로 쓸 생각이었다. 기사를 접한 후, 애덤스는 깃펜 너머의 컬래버레이션까지 상상했다. 아직은 전설이 되지 못해 굶주린 야망 넘치는 두 젊은 극작가가 공동 작업을 한다면? 존경과 경쟁, 동경과 갈등이 교차하는 순간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 바로 < Born With Teeth >다. 2019년 휴스턴 앨리 씨어터 워크숍을 시작으로 2025년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The Royal Shakespeare Company)이 다니엘 에반스 연출로 런던 무대에 올렸다. <닥터후>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의 슈티 가트와가 말로를, <마이 레이디 제인> <킬링 이브>의 에드워드 블루멜이 셰익스피어를 맡았다.
왕의 스파이가 곳곳에 숨어 있고 종교적 긴장으로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던 1591년 런던. 그 불안한 시대 속에서 두 동갑내기 극작가가 한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양피지, 깃펜, 와인만이 놓여 있는 테이블 위에서 두 사람의 야망과 신념이 교차한다. 셰익스피어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안정적인 후원과 역사에 충실한 대본을 꿈꾸는 신예 작가다. 반대로 말로는 이미 명성을 얻은 대담한 도전자로, 권력을 조롱하고 논란을 즐기며 연극을 황홀과 위험의 무대로 여긴다.
1막, 둘은 『헨리 6세』를 두고 의견을 나눈다. 셰익스피어는 일관성과 진실을, 말로는 자극과 스펙터클을 주장한다. 대화는 곧 결투가 되고, 제안은 도전이 되어 테이블은 아이디어의 전쟁터가 된다. 그러나 긴 밤이 흐르며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농담과 술잔 속에서 서로의 재능을 탐색한다. 말로는 여유롭게 셰익스피어를 놀리고 유혹한다. 속세의 질서와 법칙을 가르쳐주며, 쉽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의 자신감을 동경하고 관찰하지만, 동시에 그의 무모함과 위험한 인맥, 무신론적 발언을 경계한다.
2막은 셰익스피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자신은 아니지만 가족은 여전히 가톨릭 신자임을 털어놓으며 불안한 현실을 드러낸다. 그사이 조금 더 유명해진 셰익스피어는 이제 말로와 비교 대상이 된다. 말로는 그에게 보호막이 필요하다며 정치적 연줄을 제안하지만, 셰익스피어는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칼을 쥐여주지 말라”며 거절한다. 각자 써온 『헨리 6세』의 3막 2장 장면을 재연하며 둘의 밤은 깊어지지만, 어느 것도 좁히지 못하고 헤어진다. 동경은 깊어졌지만, 불신도 마찬가지다.
3막은 고문을 당하는 말로의 영상으로 시작된다. 그는 살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내뱉고, 은신처로 그를 부른다. 다시 만난 셰익스피어는 이제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전염병으로 극장이 닫힌 상황에서도 후원자들에게 사랑받는 성공한 작가로 변해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먼저 말로를 고발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가르침을 마침내 받아들여 영악해진 셰익스피어에게 감명을 받은 것인지, 혹은 자신이 믿는 대로 삶을 즐겼기에 미련이 없는 것인지, 말로는 담담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며 이 배신이 가치가 있도록 자신보다 더 큰 인물이 되어주길, 자신을 더 사랑해 주길, 영원히 기억해 주길 부탁하며 떠난다. 셰익스피어는 말로가 진정 자신의 뒤를 쫓는 유령이자 악동 왕자님임을, 그의 삶의 방식이 결국은 자신을 구원했음을 고백하며 극을 마친다.
공연은 이 상상의 만남을 영속적이자 모던하게 풀었다. 영문학 수업에서 배웠던 셰익스피어와 말로가 아니라는 것을 공연의 시작 영상에서부터 제대로 찍어준다. 초반 둘의 열띤 토론은 빠르고 현대적이다. 쉴 새 없이 주고 받는 대사는 위트 있고 다이나믹하다. 2막에서 작품 속 씬을 직접 재연하는 장면은 대사와 매끄럽게 어우러지며 작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여 문학 덕후들이 아닌 관객들의 마음마저 사로잡는다. 자신과 서로의 극단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대화는 차분해지며 그들의 고전 텍스트와 더 가까워진다. 현재에서 역사 속으로, 젊은 야망가들은 전설이 된다.
조아나 스코처의 무대 디자인은 나무 벽, 테이블, 의자로 단조롭지만 효과적이고, 닐 오스틴의 조명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이를 살려낸다. 흔들리는 촛불, 드리우는 그림자, 약간의 밝기 변화로도 둘의 권력 싸움에 불이 제대로 붙는다. 미니멀한 비주얼 효과 위에 대사는 더욱 힘을 받아 작품을 끌고 나간다. 2인극으로써 두 캐릭터 간의 힘의 균형이 완벽했다. 어떤 캐릭터가 더 좋은지, 어느 배우가 더 잘했는지를 꼽을 수 없게 밸런스가 잡힌 대본이자 캐릭터라이제이션이었고 그것이 캐스팅과 연기로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 프로덕션이었다. 두 캐릭터는 처음에는 완벽하게 반대되는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작품을 보다 보니 오히려 같은 인물의 다른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점은, 각자의 접근과 상황이 납득되는 아주 입체적인 전개라는 것이다.
배우로서 두 차례나 올리비에 어워즈를 수상한 다니엘 에반스 연출은 2023년부터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공동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텍스트와 리듬, 연기에 집중한 연출로 대본에 충실하면서도 대담한 프로덕션을 이끌었다는 평이다. 두 아티스트의 예상 못 한 협업이라는 점에서 연극 < The Collaboration >(앤서니 매카튼, 2022, 앤디 워홀과 장 미쉘 바스키아의 협업을 소재로 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 The Collaboration >이 영상이나 색채, 대도구 등 비주얼 요소를 당연히 활용해 두 아티스트의 충돌을 보여준 것에 비해, < Born With Teeth >는 엄숙할 정도로 간결한 무대로 작품의 대사와 극중극의 텍스트, 그리고 간결함 속 전환으로 보이는 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에게 이번 프로덕션은 한 연극 프로덕션을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셰익스피어를 기념비적인 인물이 아니라 단점도 있고 야망도 짙고 경쟁심이라는 치졸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젊은 극작가로 그려낸다는 것은, 그를 보다 현대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로 표방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보여준다. 올 9월 발표된 다음 시즌 신작들은 새로운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다양한 형태를 아우르려는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지향점과 확장성을 분명히 했다. 가장 뚜렷한 우선순위는 고전 작품들의 새로운 시각과 해석인 듯하다. 이번 시즌 예정된 대극장 공연인 <맥베스>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 <포사이트 사가(The Forsyte Saga)>는 모두 고전이 정적인 유물이 아닌 현 관객들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스타일과 톤, 연출에 있어 새로운 상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또 눈에 띄는 점은 차세대 관객들을 위한 공연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첫 만남'이라는 레퍼토리 프로덕션으로 학교 및 지방에서 이해하기 쉬운, 짧은 버전의 셰익스피어 작품을 공연한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이 작품들은 실제로 많은 어린이에게 처음으로 셰익스피어 연극을 접하는 기회를 제공해 미래의 성숙한 관객들을 육성한다. 또한 장르의 확장도 주목할 만하다. 이번 시즌 가장 기대작은 윌리엄 캄쾀바의 <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의 뮤지컬 버전이다. 2010년 <마틸다>를 탄생시킨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 최근 들어 신작 뮤지컬 개발에 주력을 기울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방법을 찾으려 하는 듯하다.
< Born With Teeth >는 미국 공연 당시에도 평단 및 관객 모두의 호응을 받았던 공연이지만, 런던 프로덕션은 스타 캐스팅 덕분인지 개막 전부터 티켓 판매율이 높았고, 개막 후에는 입소문을 타며 더욱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가디언'은 “위험하고도 섹시한” 공연이라 평했고, '타임 아웃'에서는 “쉴 새 없는 속도로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퍼포먼스”라 칭했다. 스타 배우들을 보러 왔건, 셰익스피어와 말로에 대한 존경으로 왔건, 혹은 노림수 가득한 포스터에 홀려 왔더라도 원하는 걸 충족하고도 남는 공연이다.
역사적 인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재조명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유행할 정도로 역사의 재구성을 좋아하는 한국 공연계에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텍스트와 배우들의 연기에 큰 비중이 실리는 2인극에, 무대나 기술적 스펙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전개 역시 대학로에 맞춤이다. 아름다운 고전 텍스트, 현대적 속도감의 유머가 좋은 번역을 거친다면 관객들에게 쉽게 가닿을 것이다. 단순히 역사 속 전설로 남은 영국 극작가들의 이야기를 넘어 역사가 어떻게 기록되는지, 대화가 어떻게 상대방을 공격하는지, 불멸의 고전 뒤 질투와 선망, 경쟁과 동경으로 가득 찬 인간다운 창작의 공간은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언어와 역사의 장벽을 넘어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반응할 작품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