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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 한국 뮤지컬 제작 환경의 '탈장르'와 '탈경계'에 대하여

글 |이주영(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이모셔널씨어터 2026-02-20 580

 

지난 2월 2일과 3일, 대학로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소극장 이티 씨어터 원은 생각지도 못한 실험 뮤지컬 열기로 가득했다. 세 명의 작곡가가 서로 다른 세 명의 캐릭터를 중심으로 초단위 서사와 음악을 나누는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 사운드 이스케이프형 작품(<독백의 수치>)이 있는가 하면 대사와 넘버 보다 움직임과 분장이 더 강렬한 작품(<호스페스>)도 있다. 수천 권 책들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도 쏟아지듯(<평화와 풍요의 시대>) 다가온다. 이모셔널씨어터의 랩퍼토리(LABpertory) 세 번째 시즌 현장이다. ‘한편의 공연이 되기 전의 자료들’이란 부제가 무색하다. 리딩 쇼케이스라고 부르기에는 완성형이고, 대중 공연이라기에는 예술적 실험으로 가득하다. 넘버 중심의 이야기이니 뮤지컬이긴 한데 또 어떻게 보면 ‘뮤지컬인가?’ 싶기도 하다. 김성수 음악감독의 첫 작‧작사‧연출, 이현정 안무가와 김하진 작가의 첫 연출이 라인업에 있어 기대는 했으나 이 정도로 실험적인 예술작품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김성수 음악감독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광화문 연가><꾿빠이, 이상>, 넷플릭스 <오징어게임><피지컬100>, AI 활용 록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 등 섬세하고 실험적이면서 동시에 스펙터클한 사운드의 장인이다. 이현정 안무가는 배우들의 춤선과 기량을 고려한 맞춤형 움직임 스토리텔러이다. <이프덴><보니 앤 클라이드><아몬드> 등 작품의 독특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움직임으로 전환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김하진 작가는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제시의 일기><수레바퀴 아래서> 등 촘촘한 서사구조와 맛깔난 가사로 일상에 스며드는 이야기꾼이다. 로비를 가득 채운 관객들의 열기 속에서 이 특별한 창작진들이 각자 직접 연출한 신작 리딩 쇼케이스를 몰입해서 보니 한국 뮤지컬 제작의 새로운 지형도가 그려진다.

 

 

리딩쇼케이스의 진화

한국 뮤지컬 신작 개발에서 리딩 쇼케이스는 중요한 통과 의례이다. 창작진과 제작사, 경우에 따라 관객까지 합류해 작품을 처음 공유하는 자리로 기능한다. 산업의 발전과 확장에 따라 리딩 쇼케이스는 형태와 의미가 진화해왔는데 최근 2~3년의 경향성을 본다면 대략 두 가지 축으로 나누어볼 수 있겠다.

 

첫 번째 축은 신진 창작자 육성형 리딩 쇼케이스다. CJ 스테이지업, 우란문화재단 등 대기업 계열 문화재단이 지원하는 경우와 한예종이나 한양대 등 대학에서 졸업생 중심으로 지원하는 경우,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콘텐츠진흥원 등과 엮인 국가 지원 프로그램,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등 지역 중심 지원 등이다. 예비예술인 최초발표지원사업, 창의인재동반사업, 차세대 뮤지컬 페스티벌 비욘드 대학로, 지자체 뮤지컬 아카데미 등 주관 기획사와 플랫폼에 따라 지원 형태와 양식도 매년 달라진다. 신진 창작자 대상으로 멘토링과 워크숍을 통해 짧게는 6개월 전후, 길게는 9개월 넘게 중견 창작자들과 매칭하는 멘토링이 시작점이다. 작가와 작곡가, 연출 등 핵심 창작진들이 팀을 구성해 체계적인 교육으로 작품을 기획하고 개발해 다듬은 뒤 리딩 쇼케이스 형식으로 발표하는 구조다. 창작자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확인하고 데뷔하는 첫 무대이자 전문인력 양성 프로그램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두 번째 축은 제작사 중심의 신작 개발 과정으로서의 리딩 쇼케이스이다. 작품 발표 경험이 있는 작가와 작곡가, 연출가들 중심으로 진행된다. 상업 뮤지컬 신작 개발은 작품을 선보이는 것과 동시에 투자 유치와 시장 반응 점검도 이뤄진다. 아르코 창작산실 등 국가 지원이 여전히 중요한 여건이기도 하다. 스포일러 등 우려가 있어 비공개 쇼케이스가 많지만 최근 들어 트라이아웃 단계처럼 유료 티켓을 오픈하고 적극적으로 시장 반응을 모니터링하는 경우도 늘어가는 추세이다. 대학로 소극장 개막을 시작으로 중대극장 스케일업도 감안하며 관객 반응을 살핀다. 궁극적으로 해외 진출까지 염두에 두려는 행보이다. 지난 2025년 2월 리딩 쇼케이스 반응이 좋았던 <이름 없는 약속들로부터>(배시현 작‧연출, 강철 작곡, 오차드뮤지컬컴퍼니 제작)는 8개월여 만인 2025년 10월 대학로 극장 온에서 개막하면서 주목받았다. 콘서트형 리딩 쇼케이스도 적지 않은데 대부분 중대극장 개막을 목표로 하는 경우이다. 라이브 밴드 오케스트라와 조명디자인과 영상디자인 등을 작품 세계관에 맞춰 세팅한 본격 트라이아웃 공연들이다. 2023년 7월 뮤지컬 <설공찬>(추정화 작‧연출, 허수현 작곡, 이비컴퍼니 제작) 리딩 쇼케이스와 2024년 6월 뮤지컬 <타임트래블 러브송>(오서은 극본‧작사, 이응규 작곡, EG뮤지컬컴퍼니 제작) 등이 그러하다. <설공찬>은 2025년 7월 딤프를 통해 공식적으로 선보인 후 연이어 서울에서 개막한 바 있다. 이 경우 리딩 쇼케이스는 교육이나 실험의 장이 아니라 제작 런칭을 위한 전략적 단계가 된다.

 

주목할 현상은 이처럼 전형화되어가는 리딩 쇼케이스와 조금씩 다른 새로운 형태들이다. 이른바 ‘탈경계’, ‘탈장르’ 적 실험이 포괄하는 이런 시도들은 신진 창작자 플랫폼도, 중견 제작사의 런칭 리딩도 아닌 좀 더 집약된 장기적 기획을 갖고 선행된다. 제작극장을 갖고 있거나 제작극장과 협업하는 제작사들이 시도하는 방식이다. 자체적으로 브랜드를 내세워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인큐베이팅형 리딩 쇼케이스로 대표적인 경우가 서두에서 언급한 이모셔널씨어터의 ‘랩퍼토리’이다. 실험(Lab)과 레퍼토리(Rep)를 결합한 이름처럼, 이 프로젝트는 일회성 쇼케이스가 아니라 작품을 축적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장기적 제작 시스템에 가깝다. 이모셔널씨어터의 오필영 대표는 랩퍼토리를 통해 초연한 작품은 개발이 끝난 형태가 아닌, 본격적으로 개발을 시작하는 단계라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랩퍼토리는 공개 개발의 첫 단계이다. 특히 이번 랩퍼토리 시즌3부터 관객은 완성된 공연을 소비하는 존재라기보다, 작품이 형성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동반자로 위치한다.

 

 

뮤지컬 안에서의 탈장르와 탈경계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랩퍼토리 시즌3의 여섯 작품은 개별 공연이라기보다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주제별 실험으로 읽힌다. 뮤지컬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장르’, 음악과 움직임, 서사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구조 안에서 재배치되고 배우와 관객의 허들이 사라지는 ‘탈경계’의 순간들이 그러하다.

 

<독백의 수치>(김성수 극작·작사‧연출, 김정하·박민주·서동민 작곡)는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세종문화회관의 차세대 예술적 실험인 씽크 넥스트에서나 체험할 법한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 사운드 이스케이프형’ 작품이다. 공간적 배경은 서울 어딘가의 시위 현장이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같은 장소, 혹은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시선들이다. 초 단위로 바뀌는 사유와 성찰을 다시 나노 단위로 분절해서 서로 다른 음률과 사운드 이스케이프로 감각케 한다. 현재에 있는 관객과 역사적인 역동의 순간에 있는 캐릭터들은 어느새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서로를 동일시하거나 해체한다. 교차점이 있는 시공간은 시적인 대사와 넘버로 형상화되고 해체되며 각자의 차원으로 다시 환원된다. 시공간을 흐뜨려 놓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 <인터스텔라>와 <테넷> 등이 연상되지만 전혀 다르다. 사운드가 기반이기 때문에 비주얼보다는 오디오 레이어가 훨씬 더 생생하게 와닿는다. 관객 입장에서는 이티 시어터 원의 음향 장치들이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처음 체험하게 한 작품이다. 60분 러닝타임의 이 작품은 사적 기억과 공적 역사를 소환하며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마침표를 찍지만 여운이 길어 한동안 어느 시공간에 있는지 되뇌어야 했다. 별도의 무대 장치 없이 조명 디자인과 사운드 이펙트만으로도 충분히 성립 가능한 다차원 융합 작품이기도 하다.

 

김성수 음악감독은 필자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한국 사회의 분열과 개인 내부의 갈등에 대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부연했다.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재난과 분열, 그리고 촛불 이후에도 개인 내부에서 심화되는 갈등이 또 다른 분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증언하는 구조, 타임루프, 성장 서사 등 다양한 장르 문법을 결합해 하나의 음악적 구조로 재배치한 배경이다. 그는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각자의 내부에서 독백을 듣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중복과 분절의 시퀀스를 사용했고, 반복 자체가 작품의 문법이 되었다. 비선형 구조가 만들어내는 체험이 곧 결말을 향한 과정이라는 인식이다. 이번 리딩 버전은 전체 구조의 일부에 해당하며, 전막 공연으로 확장해 더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다는 의지도 밝혔다. <독백의 수치>가 보여준 것은 기존의 뮤지컬 문법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이다. 음악과 서사, 시간 구조를 분리했다가 다시 결합하는 방식은 반복과 분절이 형식적 장식이 아니라 인물의 균열을 드러내는 문법이 될 때, 장르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흔들림을 체험케 한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김보영 원작, 김성수 연출‧각색‧작사‧작곡‧음악감독)는 잘 알려진 원작을 토대로 창작자의 심연을 드라마적으로 재현한 듯 섬세한 감정과 사운드의 매핑이 인상적이다. 시적 대사들에 어우러지는 음절들은 원작에서 표현하는 다른 시공간 다른 행성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평생 그리워하는 연인의 환희와 절망을 손에 잡힐 듯 감각하게 한다. 황순종 배우의 감수성과 비음, 박새힘 배우의 슬픔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초반부터 함께 우주를 유영하게 된다. 서로 다른 우주에서 다른 궤도를 도는 두 인물의 감정은 후반부에 이르러 음악과 서사로 온전히 융합되며 휘몰아친다. 돌이킬 수 없는 비극에 잠식된 듯한 고통이 우러나오는 듯하다. 이머시브형 다원융합 작품으로 개발되면 어떨지 상상하며 객석을 나서게 만든다.

 

 

뮤지컬 <호스페스>(이현정 안무‧연출, 성종완 극작‧작사, 하태성 작곡‧음악감독, 이한비 조연출, 오령준 음악조감독)은 영화 <알 포인트>(2004)에서 영감을 받은 이현정 안무가의 역동적인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리딩 쇼케이스에서는 극히 드문 본격 신체 움직임 뮤지컬이다. 오프닝 군무와 알 포인트식 유령 분장 퍼포머의 등장은 긴장감과 공포를 극대화한다. 전쟁의 공포와 트라우마를 심리 스릴러 형식으로 짧고 굵게 압축한 작품답게 사운드 이펙트와 움직임이 대사와 넘버를 이끌고 간다. 의상·소품·분장까지 무대화 단계에 가까운 정교함으로 포진한 높은 완성도의 작품이다. 공포 스릴러 방탈출 게임이 상해와 런던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새로운 한국적 공포 스릴러 이머시브 뮤지컬로 확장될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이현정 안무가는 필자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 작품이 본공연으로 이어질 경우 “무용의 움직임과 마술이 섞이면서도 뮤지컬 느낌을 만들어내는 무대를 시도해보고 싶다”고 강조했다. “쉽지 않겠지만 그만큼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도 덧붙인다.

 

그녀는 또한 이번 랩퍼토리 과정에서 가장 크게 변화한 지점은 ‘슈미트의 일지’ 처리 방식이었다고 부연한다. 공연 전에는 지문을 누가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는 작품 특성상 외부 화자가 개입할 경우 흐름이 끊긴다는 판단하에 결국 인물이 실험일지를 직접 읽는 방식으로 수정되었고 리허설을 통해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리딩 쇼케이스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여러 배우들이 각자의 대사와 역할을 하면서 관객 앞에서 본격적으로 세계관 안에 진입하는 실험들이 작품 구조 자체를 어떻게 수정하고 보완하는지 확인하게 한다. 움직임과 텍스트, 사운드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호스페스>가 지향하는 탈경계의 방향성이기도 하다.

 

<평화와 풍요의 시대>(김하진 작·연출, 배영은 작곡 음악감독, 박해인 조연출, 손봉기 음악조감독)는 전쟁 속에서도 책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고 꿈을 키우는 아이들의 연대와 전쟁 저널리즘의 윤리를 다루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전쟁 속 약자들의 연대를 다루는 대학로 뮤지컬은 적지 않지만 아이들의 연대와 섬세한 캐릭터 구축, 이를 취재하려는 전쟁기자의 윤리와 허상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따뜻하게 담기는 경우는 희소하다. 김하진 작가의 <제시의 일기>,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등과 함께 전쟁과 폭력을 다룬 서민 연대 시리즈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시도이다. 김하진 작가는 이 작품을 특정 형식으로 확장하기보다 “이야기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를 하나의 서사로 긴밀하게 엮어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전쟁을 다루는 것이 아닌 21세기 전쟁을 다루는 현재 진행형 서사라는 것도 특별하다. 또한 김하진 작가는 “특정 사건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는 구조가 되기를 바란다”라며 전쟁 속 개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극적 디테일을 지향했다고 덧붙였다.

 

<아웃랜더스>(김승철 극작‧작사, 김준호 작곡‧음악감독, 박한근 연출, 황자람 조연출, 이조은 음악감독)는 대학로 뮤지컬 단골 주제인 16세기 세익스피어 시대가 배경이지만 소재에 차별화를 두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주민들의 비참한 삶과 서민들의 봉기, 이를 억압하려는 왕정의 여론 조작 등 생소한 소재이다. 동시대에도 심각한 이주난민 문제는 600여 년의 시공간을 오고 가며 현재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게 이끈다. 이미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와 <캐빈> 등을 통해 여론 조작과 소외된 피해자를 다룬 바 있는 박한근 연출은 자신을 운이 좋은 연출이라고 말한다. 일부러 연결된 문제의식의 작품을 선택하는 것은 아님에도 작품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 배우 시절부터 함께해온 창작진들과의 협업 속에서 이야기를 듣고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역할이 빛을 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한근 연출은 랩퍼토리를 통해 개발된 작품들이 본공연으로 이어지는 자체 인큐베이팅 과정은 일상적인 업무와 같은 맥락이라고 부연한다. 같은 건물 위아래층에 있는 창작진들이 항시 의견을 나누고 반영할 수 있으므로 여느 작품들보다 무대화의 진행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그가 이번 랩퍼토리 시즌3에서 발견한 공통된 정서는 ‘위로’였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이야기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는 관계의 서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열린 구조 속에서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시도하는 것이 랩퍼토리의 방향이라는 설명이다.

 

 

초연은 기획 개발의 시작점

새로운 형태의 리딩 쇼케이스로 예를 든 이모셔널씨어터의 랩퍼토리 시즌3의 여섯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들이 여기까지 구체화된 과정에 주목하게 된다. 한국 창작뮤지컬에서 리딩은 오랫동안 ‘공연 이전의 단계’로 이해되어 왔다. 완성된 무대를 향해 가는 중간 과정, 내부 점검의 자리, 혹은 창작자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번 랩퍼토리는 여기에 다른 가능성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단 이 작품들은 기존의 리딩 쇼케이스에서 하듯 ‘미완성 작품을 보고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조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차원의 감각을 깨워내는 체험’에 가까웠다. 특히 <독백의 수치>와 <호스페스>에서 그 변화는 확연했다. 사운드 스케이프와 분절된 구조, 움직임 중심의 심리 스릴러 구성은 랩퍼토리를 하나의 새로운 미학적 선택지로 인식하게 한다. 완성된 무대를 향한 예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된 공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랩퍼토리는 기존의 두 축—신진 창작자 육성형과 제작사 개발형—사이의 중간이 아니라, 또 다른 방향에 놓인다. 오필영 대표는 필자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실험을 일회성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실험이 축적되어 결국 극장의 정체성을 이루는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이모셔널씨어터에게 랩퍼토리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제작 철학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어떤 세계를 축적할 것인지, 어떤 관객 경험을 설계할 것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통한 기획을 선행한 뒤, 창작자들과 함께 그 기획 방향에 따라 작품을 만들어간 결과가 이번 시즌 작품들인 것이다. 오대표는 또한 “작품을 선택할 때 단기적인 흥행 가능성보다, 장기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세계와 구조를 먼저 본다. 오랜 시간 국내외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가, 여러 시즌을 거쳐도 다시 프로그래밍할 가치가 있는가, ET라는 극장 안에서 다른 작품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레퍼토리 극장은 한 작품이 아닌, 작품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창작 과정을 닫힌 완성형으로 보지 않으며, 빠르고 집중적인 개발을 통해 우선 무대에 올리고, 실제 관객과 만나며 작품을 다시 다듬는 방법론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반복해서 강조하듯 랩퍼토리 철학에서 초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시장과 관객은 중요한 동반 창작자가 되는 것이다.

 

박한근 연출이 말한 ‘위로’라는 정서는 이 구조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장르적 실험과 구조적 해체의 시도들이 단지 형식적 전위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향으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보듬는 이야기, 각자의 질문을 끝까지 따라가는 구조, 내부의 독백을 듣게 하는 사운드. 이 모든 시도는 장르를 넘어서는 형식 실험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감각에 대한 응답이다. 탈장르라는 단어는 흔히 형식의 혼합이나 경계 파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러나 랩퍼토리 시즌3에서 드러난 탈장르는 단순한 장르 혼합이 아니다. 오히려 제작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 음악과 움직임, 서사를 위계 없이 배치하고, 리딩을 하나의 공연 형식으로 확장하며, 관객을 개발 과정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구조다. 장르의 경계는 완성된 무대 위에서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재배치된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뮤지컬 신작 개발에 대한 문제의식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다. “이 작품은 어떻게 관객에게 다가갈 것인가?”가 아니라 “이 작품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는가?”이다. 보다 본질적인, 한국 뮤지컬 제작과정의 정체성에 돌아보는 질문이 선행되는 것이다. 성공적인 초연과 흥행보다 제작에 대한 철학을 함의한 새로운 정의를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의 가능성을 획득하는 방안이 갈급해지는 순간이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다음 단계는 어쩌면 이 지점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단발성 프로젝트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시간을 축적하고 레퍼토리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리딩을 단순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공연 형식이자 제작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랩퍼토리 시즌3는 아직 진행 중인 질문을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완성된 답을 제시하기보다, 장르의 경계가 이동하는 과정을 관객과 함께 공유했다. 리딩이 공연이 되는 순간, 장르의 경계 또한 고정된 선이 아니라 움직이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한국 뮤지컬은 새로운 제작의 언어를 모색하게 된다.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로 확장되기를 바라는 의도다.

 

랩퍼토리는 공공지원금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형 리딩과 달리, 자체 제작 철학에 따라 작품을 선별하고 개발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는 단발성 지원 사업이 아니라, 레퍼토리를 축적하는 제작극장 모델의 가치와 힘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지원 사업은 결과를 남기지만, 제작극장은 시간을 남긴다. 이 지점에서 랩퍼토리는 기존의 공공지원 플랫폼형 리딩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CJ 스테이지업이나 차세대 뮤지컬 페스티벌, K-뮤지컬 마켓과 같은 프로그램이 창작자를 발굴하고 실험을 장려하는 ‘사업 구조’라면, 랩퍼토리는 자체 재원과 제작 철학에 따라 작품을 기획하고 축적하는 ‘제작극장 구조’에 가깝다. 공공지원 플랫폼은 연 단위 공모와 선정, 개발과 리딩, 결과 보고라는 프로젝트 중심의 시간 구조를 따른다. 이는 분명 건강한 창작 생태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장치다. 그러나 랩퍼토리의 경우, 리딩은 사업의 결과물이 아니라 레퍼토리를 축적하기 위한 시간의 일부로 작동한다. 초연은 종료가 아니라 시작이며, 리딩은 내부 점검이 아니라 공개 개발 단계다.

 

차이는 시간의 설계 방식에 있다. 지원 사업이 결과를 남긴다면, 제작극장은 시간을 남긴다. 랩퍼토리 시즌3가 보여준 탈장르와 탈경계의 실험은 바로 그 시간 축적 구조 속에서 가능해진 선택들이었다. 따라서 탈장르라는 단어를 단순히 형식의 혼합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장르를 흔드는 힘은 무대 위의 실험 이전에, 작품을 어떻게 기획하고 개발하며 축적할 것인가에 대한 제작 시스템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랩퍼토리 시즌3가 보여준 변화는 개별 작품의 형식 실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제작 시스템의 설계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공공지원 플랫폼이 창작 생태계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면, 제작극장형 인큐베이팅은 시간을 축적하고 레퍼토리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리딩이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될 때, 장르의 경계는 무대 위가 아니라 제작 구조 안에서 먼저 이동한다. “작품은 한 번의 공연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재개발과 재연을 거치며 생명력을 획득한다.”는 오필영 대표의 제작 철학이 오랫동안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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