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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리뷰] <THE WASP> '틀' 바깥으로 나온 여성들 | 예스24

글 |나혜인(여성신문 기자) 사진 |해븐프로덕션 2026-04-06 1,018

 

포털 사이트 뉴스 탭에 “틀을 깼다”라는 문장을 검색하였다. “틀을 깼다”는 다양한 장르, 분야에서 고정된 관념을 탈피했다는 의미의 관용구로 쓰이며 ‘신개념’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 다시 성별로 나누어 사용 빈도를 분석하자, 여성에게 쓰이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세부적인 수식어를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의 기사에 ‘유리 천장’, ‘파격 인사’ 등 한계를 돌파했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반면 남성을 향한 수식어는 흥미롭게도 ‘남성성’에서 벗어났다는 내용이나 퀴어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틀’은 가부장이 규정하는 ‘정상’ 남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가부장 시스템은 여성에게 틀 안이 안전하다고 세뇌하며, 틀 바깥은 여성이 버틸 수 없는 곳이라고 주입한다. 틀 내부는 일본의 인기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인물들이 거인을 피해 높은 벽을 세우고 그 안이 최고라 믿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성은 쉽게 탐색할 수 없는 미지의 세상, ‘틀의 바깥’은 가부장의 으름장과 달리 나무에 권력이 열리고, 밭에서는 재력이 솟아나는 비옥한 땅이다.

 

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 그대로 ‘틀을 없애는 것’이다. 앞선 언론 보도 분석처럼 우리는 일반적으로 남성을 향해 “틀을 깼다”고 말하지 않는다. “틀을 깨는” 주체는 보통 여성이다. 말에는 아이러니한 힘이 있어서 특정 프레임을 부정할수록 도리어 그 프레임을 강화한다. 그러니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말대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자’. 틀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프레임을 재구성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연극 < THE WASP(말벌) >은 상연 자체로 갖는 의미가 크다. 2016년 영국 런던 초연 이후 한국에 닿기까지 10년이 흘렀지만, 제작사 해븐프로덕션이 판권을 사들인 시기는 한참 전이다. 제작자의 시선으로 볼 때 작품은 이미 수년 전부터 한국에 필요한 이야기였다는 의미다.

 

2016년은 “여성 주연 뮤지컬은 흥행이 부진하다”는 보도가 아무렇지 않게 쏟아지던 때였다. 여성 소비자는 증가하는데 여성주의 작품은 손에 꼽는다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그럼에도 해븐프로덕션은 < THE WASP >(<더 와스프>)를 통해 코끼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프레임에 반기를 드는 상상을 품었다.

 

< THE WASP >는 학창 시절 절친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멀어진 헤더와 카알라, 두 여성의 재회를 담은 2인극이다. 두 여성의 외형은 확연히 다르다. 한 사람은 완벽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재력의 상징을 쥐고 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부른 배를 감추는 펑퍼짐한 옷차림에 손에는 담배뿐이다. 무대 위에 저울이 있다면 1막의 저울은 카알라에게 기울어져 있다. 헤더는 눈치 보기 바쁘고 카알라는 떵떵거린다. 그러던 저울이 점점 헤더 쪽으로 기운다. 기울고 기울던 저울은 결국 고꾸라져 두 사람 모두를 내던진다.

 

작품 속 여성은 친절하거나 온순하지 않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여성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을 빌미로 발생하는 갈등은 없다. 끔찍한 사회의 희생자인 두 인물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처절함만 존재한다. 작품은 인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배우 김려원, 한지은, 권유리, 이경미, 정우연의 얼굴을 하고 관객의 마음속 저울은 어느 방향으로 기울었느냐고 물을 뿐이다. < THE WASP >는 국내 상업 공연 중 여성이 이토록 처절하게 파멸하며 질문하는 작품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김성모 화백은 만화 『대털 2.0』에서 “일격을 위해서는 추진력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밈’(Meme)이 된 말이지만, < THE WASP >가 관객을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소비자가 작품을 다양한 시각으로 읽어낼 힘을 기르기까지의 시간을 추진력 삼아, 마침내 여성 배우들에게 무대를 선물하며 기존 상업 연극이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일격을 가한다.

 

최근 10년 사이 국내 여성주의 공연의 변곡점은 크게 세 가지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2018년 공연계 미투(#MeToo), 2022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엔데믹이다. 여성주의 공연은 쇠퇴와 부흥을 반복하며, 부흥기가 돌아올 때마다 이전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였다. 소비자 역시 성장하였다. ‘여성주의는 팔리지 않는다’는 분석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최근 ‘제18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인 여성 청소년 서사 연극 <디사이딩 세트>, 젠더 프리 전통예술 <봄을 안고 온 아이> 등은 신작임에도 매진 세례를 기록하며 호평 속에 종연하였다.

 

이처럼 무대 위 여성 캐릭터는 진일보했고 시시각각 변주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 배우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틀을 깼다”는 시혜적인 칭찬이 아닌, ‘더 많은 이야기’와 ‘더 많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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