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차 선후배가 전하는 행복 바이러스
2004년 초연 이후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김종욱 찾기>가 네 번째 시즌을 맞았다. 새로운 무대 연출로 선보인 시즌4 공연은 <김종욱 찾기> 1대 여주인공 오나라와 새롭게 투입된 10대 여주인공 전미도가 나란히 무대에 올라 눈길을 끈다. 따뜻한 햇살이 눈부신 4월의 어느 날, 십 년차 선후배 오나라와 전미도가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연습실을 나섰다.
오 : 연습해보니까 어때?
전 :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아웃라인만 파악한 상태라고 할까? 디테일한 부분을 살릴 새 없이 배우기에 급급한 것 같아요. 근데 언니가 한번 보여주시면 ‘아, 라인이 이렇고,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고 빨리 이해되는 것 같아요.
오 :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자기 생각을 충분히 습득하기 전에 남의 것을 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따라갈 수 있어서 위험한 것 같아. 그래서 연습할 때 나타나서 뭔가를 보여줄 때 미안한 감이 없지 않고. 내가 하는 오나라 역이 100퍼센트 완성되었다고 볼 수도 없는 건데, 알게 모르게 너희한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말야.
전 : 작품을 처음 만들 때 언니와 초연 배우들이 본인의 성격을 가지고 대사를 만들다보니 텍스트만으로는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그런 부분은 언니 연기를 보면 쉽게 이해되는 것 같아요. 언니 연기를 그대로 따라하려고 해도 내 것이 아니다보니 어색할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전미도의 감정을 덧입히려고 고민 중이에요.
오 : 넌 ‘어색하고 못하겠다, 왜 안 될까’ 하면서 앓는 소리를 하지만 내가 한번 보여주면 그걸 정확하게 파악해서 네 것으로 표현하더라.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라이벌 의식이 생기는 것 같아. 이전 배우들은 나와 색깔이 많이 달라서 몰랐는데 미도는 표현력이나 생각하는 부분이 나와 많이 비슷한 것 같아. 덕분에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야. 사실 <김종욱 찾기>의 오나라가 신선함을 잃어버리고 노련한 오나라가 되고 있지는 않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미도의 신선하고 파릇파릇한 모습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해. ‘치고 올라오는 무서운 후배들’ 7위에 너의 이름을 넣을까 고민하고 있어.(웃음)
전 : 제가 졸업하고 나서 첫 작품 할 즈음에 <김종욱 찾기>가 초연했었어요. 공연 기간이 겹쳐서 언니 공연을 못 봤지만 음악만 들어도 너무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노처녀 여자의 사랑이야기도 그렇고, 노래 중간에 들어가는 대사와 가사, 특히 ‘나라의 결심’을 들으면서 ‘이건 정말 내 성격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많이 어리게 생겨서 ‘혹시 서른이 되면 이 작품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혼자 꿈을 키우고 지냈죠. 근데 서른도 되기 전에, 게다가 초연 배우인 언니와 함께 작품에 출연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신의 아그네스> 때도 그랬지만 작품을 처음 만든 배우와 함께 해서 더 영광스러운 것 같아요.
오 : 어이구, 뭐가 영광스러워~. 그래도 뮤지컬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하고 싶어 하는 작품으로 <김종욱 찾기>를 꼽을 때면 자부심도 생기고 기분이 굉장히 좋아.
전 : 매력이 없으면 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가 잘 만들어놨기 때문에 ‘나도 한번쯤…’ 하고 욕심을 갖게 되는 거니까.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건, 윤석화 선생님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진짜 집요하신 것 같아요.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라는 공통점을 어제 발견했잖아요. 역시 한 배역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어요. 언니도 작품을 해오면서 영향을 받고 본받고 싶었던 배우가 있었어요?
오 : 있지. 연기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롤 모델이 됐던 분이 최정원 선배님이셔. 무대 위에서나 평소의 모습이 한결같은데, 늘 열정적이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신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후배를 품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전 : 어떤 작품에서 두 분이 만나신 거예요?
오 : <아이 러브 유>를 오랫동안 같이 출연하기도 했지만 정원 선배와의 인연은 훨씬 전부터야. 대학교 3학년 때 뮤지컬이 하고 싶어서 무작정 남경읍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마침 <사랑은 비를 타고>를 연습하고 있었거든. 매일 연습실에 찾아가서 커피 심부름도 하고 티켓도 팔곤 했는데, 그때 정원 선배님을 처음 만났어. 섹시하면서도 귀여운 매력덩어리 유미리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내가 뮤지컬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 5년 뒤에 <사랑은 비를 타고>에 출연하면서 꿈을 이루게 됐지. 나도 ‘언니처럼 되고 싶어요’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어.
전 : 전 언니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닮고 싶어요. <김종욱 찾기> 배우들이 굉장히 소극적이고 서로 말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일주일을 더 보냈잖아요.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제대로 소화할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거든요. 근데 언니가 하루 오고 간 다음날부터 연습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잖아요. “이것들이 다 숨기고 있고만. 내가 다 드러내주겠어” 하던 언니 모습이 생생해요. 가까이에서 언니를 처음 봤는데 사람들을 아우르는 에너지가 대단해서 정말 부러웠어요.
오 : 돌려 말하면 기가 세다는 거 아냐.(웃음) 내가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해서 더 그래. 또 선배가 되면 다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전 : 모든 선배님들이 언니 같지는 않잖아요, 아시면서.(웃음) 전 무대 위에서 상대 배우와 실제처럼 사랑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남자친구가 보고 질투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래서 (김종욱 역의) 강현이와 가까워지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거든요. 예쁘게 보이려고 네일 케어도 받고 트레이닝복도 색색으로 바꿔 입고 연습실에 가는데, 못생겼다고 놀림만 받아서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어요. 나한테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무대에서 다 드러날 텐데 싶어서요. 다행히 강현이도 저와 친해지려고 일부러 더 그런 것이더라고요. 요즘은 이러다가 진짜 좋아지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는데 언니는 어떠셨어요? 지금까지 여러 김종욱을 만났는데, 혹시 진짜 연애를 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배우는 없었어요?
오 : 있었어, 무열이. 하하하. 아~ 부끄러워. 무열이가 굉장히 남성적이고 섹시해서 인터뷰 할 때 간접적으로 애정공세를 많이 했지. 강현이가 열세 번짼가 열네 번째 김종욱일 텐데, <김종욱 찾기>는 어떤 배우와 호흡을 맞춰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품인 것 같아. 각자가 갖고 있는 매력을 찾으려고 노력하다보면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 해도 좋은 점이 보일 수밖에 없거든. 다시 한번 같이 무대에 서보고 싶은 김종욱은 엄기준. 처음에는 정신없이 무대에 서서 몰랐는데 생각해보면 김종욱을 가장 잘 표현했던 배우가 아닌가 싶어. 강현이에게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순수한 김종욱이 나올 것도 같아. 그래서 나도 강현이와 무대에 서고 말 테야.(웃음)
전 : 하하. 강현이 인기가 초절정인걸요? <김종욱 찾기>는 여섯 번째 작품인데, 언니는 그동안 몇 작품이나 출연하셨어요?
오 : 많이 했네. 나는 경력에 비하면 작품 수가 많지 않은 편이야. 스무 작품 정도 되나? 1996년 서울예술단원으로 뮤지컬을 시작했는데 앙상블을 오래 하다가 속 시원하게 연기를 한 건 2001년 즈음인 것 같아.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극단 시키 단원 오디션에 합격해서 3년을 일본에서 보냈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 시야도 넓어지고 배우로서 많이 배울 수 있었거든. 한국에 다시 들어와서 <아이 러브 유>라는 좋은 작품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지. 이후 출연작이 <김종욱 찾기>와 <싱글즈> 밖에 없는데, 세 작품 모두 한 2년씩 공연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더라. 관객들은 ‘왜 오나라 씨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같은 작품, 로맨틱 코미디만 고집하냐’, ‘변신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냐’ 하는 얘기도 하는데, 고집만은 아니야.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내가 작품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남들보다 좀더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어. 한 작품을 깊게 파면서 인물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연기도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느끼거든. 이번 <김종욱 찾기> 출연도 사흘 밤낮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어. 이번 공연을 통해 분명히 새롭게 느끼고 배울 점이 있을 거라고 믿었고, 또 오나라의 <김종욱 찾기>를 보지 못한 관객들이 많을 것이라는 데 용기를 냈어. 자기 합리화라고 볼 수 있겠지만, ‘오나라’ 하면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대단한 일 아닐까? 그런 수식어조차 없는 배우들이 많잖아. 나는 계속 뮤지컬을 할 거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너한테도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부분이 있어?
전 : 사람들이 저를 아직 잘 몰라요.(웃음)
(기자 끼어들어) 지난해 대한민국 연극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기대주로 떠올랐는데, 거기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요?
전 : 아, 맞아요.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 거품을 얹어서 표현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어요. <신의 아그네스> 이후로 제가 계속 진지한 작품을 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제 성격과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건 정말 뼈를 깎는 고통이에요. 연습실에서 말도 안 하고 소리 내어 웃지도 않았어요. 대신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은 엄청났죠. ‘와, 이게 진짜 연기하는 거구나’ 하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다음에는 무조건 즐거운 작품을 할 거라고 얘기하고 다녔어어요.
오 : 내가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게 내 삶 자체까지 어두워지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해. 나는 행복한 게 좋거든. 그래도 부럽다 얘. 배우가 그런 칭찬을 듣기가 어디 쉬운 일이니. 너무 부담 갖지는 말고 즐기면서 무대에 서면 좋겠어.
전 : 전 언니처럼 긍정적인 사람이 ‘나라의 결심’을 그렇게 절절하게 부를 수 있는 게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가슴 시린 첫사랑의 경험이 실제로 있어요?
오 : 난 인생 자체가 너무 긍정적인 사람이야. 한 사람을 10년 동안 만나고 있는데 애절한 사랑이 있었겠니? 넌 있었어?
전 : 만나면 상처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만나고 버림받고 상처받은 경험은 있었어요. 남자를 만나는 일이 아직도 두려울 때가 있고. 그래서 작품에 공감하는 부분도 많은데,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어요. 극 중 전미도는 스물두 살 이후로 연애 한 번 못해봤잖아요. 근데 어떻게 ‘나라의 결심’을 부를 수 있을까요. ‘차가운 말 하고 돌아서고 아름다운 추억을 잊어버리는 아픔’을 담은 가사를 읽으면서 이 사람은 구구절절한 사랑을 한번은 해본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해봐야 다음 사랑을 겁낼 수 있잖아요. 진짜 사랑을 못해본 여자는 극 중 김종욱과의 사랑을 꿈꾸거든요. 상처받아도 좋으니까 한 번쯤은 하고 말이에요.
오 :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어? 미도의 첫사랑은 언제야?
전 : 처음 한 사랑 말고, 제가 사랑이라고 느낀 것이 처음인 사랑이라고 한다면 현재 남자친구가 제 첫사랑인 것 같아요. <39계단>에서 여주인공 파멜라와 키스하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가 많이 났었거든요. 그래서 ‘두고 봐, 내가 김종욱과 어떻게 키스를 하는지’ 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죠. 하지만 누군가를 질투 나게 할 정도로 무대 위에서 잘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것은 없는 것 같아요.(웃음)
오 : 좋을 때구나? 스물아홉을 바라보는 심정은 어때? 넌 동안에 대한 콤플렉스는 없니?
전 : 당연히 있죠. 전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연기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어요. 오디션에서 뽑힌 후로는 <김종욱 찾기> 여배우들의 평균 외모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 고생을 좀 했어요. 남자배우들이 놀리기도 많이 놀렸고. 그래서 저는 외모를 포기하고 다른 걸로 승부하려고요. 음, 연기?(웃음)
오 : 콤플렉스가 있어야 성공하더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일을 열심히 하잖아. (전: 언니도 있어요?) 난 무용과를 나왔기 때문에 연기가 내 콤플렉스였어. ‘쟤는 춤추는 애니까 연기는 못할 거야, 노래가 안 될 거야’라는 선입견 때문에 연기할 수 있는 기회도 적었고. 지금도 연기에 대한 부족함은 여전히 느끼지만 그래서 좀더 진실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연기를 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서 얘기를 하자, 오버하지 말고 진실을 얘기하자’, ‘가창력이 풍부하지 않으니까 노래 말고 말을 하자’고 최면을 걸어.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은 ‘오나라 씨 노래는 가사가 참 잘 들려요’ 하더라. 얼마 전에 한 선생님께서 “네가 앙상블이었을 때도 무대 위에서 빛났다”는 말씀을 해주셨을 땐 정말 행복했어. 그때 난 이름 없는 앙상블을 연기할 때도 스스로 이름을 짓고 캐릭터를 만들어서 무대에 올랐거든. 친구들 뒤에서 앙상블 한다고 좌절하고 열심히 안 했다면 지금 내가 이 자리에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난 ‘어떤 역할을 맡아도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면 빛을 발한다’는 말에 힘을 얻고 살아. 비웠을 때 더 크게 얻는다고 하잖아. 지금 나는 더 성숙한 배우로 가는 길목에, 미도는 더 멋진 배우가 되어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우린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셈이야. 우린 얼마나 행복하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무대 위에서 행복해하고 있잖아.
전 : 맞아요. 좋은 사람들과 웃으면서 일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