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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LONDON] 퀴즈쇼의 만화경 같은 세상을 담은 뮤지컬<스펠링 비> The 25th Putnam County Spelling Bee [No.90]

글 |정명주 (런던통신원) 2011-03-28 5,406

The Spelling Rules
돈마르의 협력 감독이며 뮤지컬 <피아프>와 <패션>을 연출했던 제이미 로이드가 연출을 맡은 <스펠링 비>는 아담한 무대 위에 책상과 의자, 배너만을 활용한 단순한 세트에, 수시로 의자를 넘어뜨리며 종횡무진 무대를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활발한 미국 아이들로 분한 젊은 영국 배우들의 활기가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특히 와이어리스를 사용하지 않고, 스탠딩 마이크와 핸드 마이크를 사용하면서 의자 위로 올라서서 공격적인 태도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영어 단어의 스펠링을 맞추는 퀴즈쇼, `스펠링 비`의 사회자, 로나 역으로 등장하는 캐서린 킹슬리의 과장된 아메리칸 액센트를 시작으로 막을 연 공연은 영국의 극장을 미국의 한 작은 마을의 중학교로 옮긴 듯했다. 체육관을 나타내는 농구대가 하나 뒷벽에 설치되어 있고, 미국 국기와 학교의 교기가 극장 곳곳에 걸려있으며, 극장 스태프들은 모두 퍼트남 카운티의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리고 똑똑하지만 모자란 듯한 여섯 명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고 잘난 척 대장인 과학 천재 윌리엄 역의 데이빗 핀, 6개국어를 하는 다재다능한 한국 소녀 마시 박 역의 마리아 로우슨, 작년 우승자이며 자랑스런 보이스카우트 단원 칩 역의 해리 헤플, 엄마는 인도로 정신수양 가시고 아빠는 바빠서 못 오셨다는 소녀 올리브 역에 해일리 갤리번, 학교에 안다니고 집에서 공부를 한다는 의상 디자이너 소년 리프 코니베어 역에 크리스 칼스웰, 그리고 혀짤배기소리를 내는 게이 커플의 딸 로게인역의 이리스 로버츠. 이상 모든 배우들은 젊은 성인 뮤지컬 배우들이지만, 퀴즈쇼 출연을 신나하며 온몸으로 춤을 추는 그들의 산만한 행동과 활기 넘치는 제스처는 마치 실제 아이들을 보는 듯한 현실감이 있다.

 

 

 

이어서 점잖은 듯하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하면 말릴 수 없는 부교장 선생님 역의 스티브 펨버튼이 등장하고, 공연 전에 미리 선별된 4명의 관객들이 추가 스펠링 선수들로 등장한다.  그리고 나머지 관객들과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창하게 미국 국기에 대한 맹세를 시행한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흑인 배우인 위로사 미치 역의 아코 미첼이 등장하여, 영국 관객들이 따라 할 수 있도록 미리 맹세의 내용을 일러 주었고, 많은 수의 관객들은 엄숙함을 가장하며 흥겨이 노래에 동참했으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장난을 치는 관객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영국인들의 미국인 흉내내기는 장난기를 발동하며 재미있는 시작을 열었다.

 

 

My Friend, The Dictionary
미국 퀴즈쇼 ‘스펠링 비’는 영국에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TV 프로그램이지만, 난이도 높은 영어 단어의 스펠링을 맞추어야 한다는 퀴즈쇼의 설정은 낱말 놀이 보드게임(Scrabble)이나 신문의 십자 낱말 맞추기를 즐기는 영국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듯 보인다. 실지로 웬만한 영국 사람도 알기 어려운 단어들, 스트러비즈머스 (Strabismus, 사시), 캐퍼바라(Capybara, 남미 수중 설치 동물), 보앤트로피(Boanthropy, 자기가 소라고 생각하는 환각증) 같은 단어는 성인 관객들에게도 고난이도의 단어들이다. 특히 무대로 초대된 4명의 관객들은 어려운 라틴계열의 단어들을 신기하게 잘 맞추어 큰 박수를 받았다. 미국 공연의 경우에는 관객 참여자에게 맥시컨즈, 엘러펀트, 하스피털, 크레용과 같은 상대적으로 쉬운 단어들을 문제로 내어 배우들과 편차를 두었지만, 이번 영국 공연의 경우에는 관객들에게 난이도 높은 단어들이 제시되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스펠링을 맞추며 무사히 첫 번째 라운드를 통과했다. 단, 두 번째 라운드에서 한 젊은 남자 관객에게만 쉬운 단어 카우(Cow)를 제시하여 다른 출연자들의 불만을 크게 야기했는데, 이는 뮤지컬 넘버 <인생은 복마전> (Life is Pandemonium)이라는, 인생의 불공평함을 노래하는 곡으로 넘어가기 위한 불가피한 설정으로 보였다.  관계자에게 확인해 보니 관객 참여자들은 공연 30분여 전에 미리 신청을 하고, 대충 무대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지만, 미리 단어를 알려준 것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국 관객들의 스펠링 수준은 가히 대단한 셈이다. 특히 중년의 한 영국 신사는 스펠링 추측 실력이 상당이 뛰어나, 결국 기억할 수도 없게 긴 조합어를 만들어 내어 억지로 떨어뜨려내야 할 만큼 훌륭한 단어 실력을 보여서 큰 박수를 받았다. 공연에 참여한 관객들이 스스로 즐기는 편안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뉴욕에서의 공연과는 달리, 영국인 특유의 수줍음과 어색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스펠링을 맞추느라 집중하는 무대 위 중년 관객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큰 웃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극의 재미는 퀴즈쇼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차례로 자신들의 속사정을 털어놓으며 사실은 행복하지 못한 현실을 밝혀가는 잔잔한 드라마가 줄기가 되고, 어려운 단어를 맞추는 과정 자체가 파편적이지만 큰 웃음을 제공한다.  실제로 몇몇 객석의 관객 중에는 작은 노트를 꺼내놓고 낱말 맞추기를 하듯이 스펠링을 적어가는 사람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배우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회자, 로나 역의 캐서린 킹슬리는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미모의 여배우로 능숙한 코미디로 극의 분위기를 살렸다. 그녀는 코미디 연극 <39계단>의 전국 투어 프로덕션를 비롯하여 다양한 영국 지방 극단에서 활동해온 젊은 연기자로 능청스러운 미국 액센트와 호들갑스러운 제스처로 웃음을 자아냈다.  특히 관객 참여자들에 대한 애드리브가 뛰어나, 머리에 꽃을 달고 나온 여자관객에 대해서는 ‘헤어살롱의 부사장이고 헤어 코사지가 전문’이라고 소개하여 출연자를 쑥스러워하게 하는 등 즉흥연기의 맛을 살렸다. 부교장 선생님 역의 스티브 펨버튼은 뮤지컬 <록키 호러 쇼>, 연극 <아트> 등 굵직한 런던 무대에서 활동해 온 중견배우로 영화와 TV에도 다수 출연한, 영국인들에게 얼굴이 꽤 알려진 배우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발음이 정확한 단어 제시자로서, 말의 속도를 빨리했다 늦추었다 하는 능숙한 말솜씨를 자랑했다. 또한 참가비를 못낸 올리브에게 특별 2등상 상금을 현금으로 지갑에서 꺼내주는 마음 좋은 교감 선생님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평생 교장 한번 못해보고 교감으로 인생을 마감할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과 이 때문에 때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양면성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My Favorite Moment of The Bee
잘난 척 대장 윌리엄 역의 데이빗 핀은 런던의 프린지 연극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요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조연으로 출연한 바 있는 영국 배우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미국 코미디언 잭 블랙을 연상케 하는 작고 통통한 외모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천재소년 역을 맛깔나게 연기했다. 단어를 맞출 때마다 ‘정답입니다’ 하면 ‘나도 알아요’ 하고 쏘아 붙이는 그의 태도는 정말 재수 없을 정도로 얄미운 버전의 잭 블랙을 닮았다. 또한 프랑스 식 이름 바페이(Barfey)를 사회자들이 매번 ‘바피’로 잘못 발음할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고쳐주다가 결국 자기 입만 아프다며 짜증을 내는 모습은 연기라기보다는 혹시 원래 성격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실감이 났다. 동료 참가자들에게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오만한 태도가 많은 웃음을 자아냈다. 특히 그가 발로 철자를 적은 모습은 짧은 다리와 심각하게 위쪽으로 올라붙은 아랫입술이 묘하게 어우러져 만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색소폰과 피아노를 연주하며 리본체조에 덤블링까지 다재다능함을 과시한 한국 소녀 마시 박 역의 마리아 로우슨은 한국 배우가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미스 사이공> (2002)의 스웨덴 프로덕션에서 지지 역을, <애비뉴 Q> 런던 프로덕션에서 일본인 테라피스트 크리스마스 이브 역을 맡은 바 있고 작년에 공연된 연극 <레논>에서는 오노요코를 연기한 아담한 체구와 동양적인 느낌의 여배우이다. 길포드 연기 학교를 졸업한 후 지방 무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기 경험을 쌓아 왔다. 이번 공연에서는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만능천재 한국 소녀를 연기함에 있어 다양한 기예를 선보여 큰 박수를 받았지만, 연기 면에서는 자연스러움이 부족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객석의 가상 소녀 때문에 성적으로 흥분하여 일차로 탈락 케이스가 되는 칩 역의 해리 헤플은 극 중간에 객석으로 사탕을 던지면서 ‘나의 불행한 발기’ (My Unfortunate Erection)라는 사뭇 도발적이면서도 좌절스러운 내용의 뮤지컬 넘버를 열창하여 큰 박수를 받았고, 나중에 극 중 인물 마시 박의 환상에 등장하는 예수 역으로 깜짝 출연하여 또 한번 웃음을 자아냈다. 왕립연극학교 RADA를 졸업하고 런던의 <아가씨와 건달들>, <빈 소우 롱> (Been So Song) 등 다수의 뮤지컬 작품에 출연한 바 있으며 국립극장과 로열코트극장 등 메인스트림에서 활동하는 신예이다.
바쁜 엄마, 아빠의 무관심 속에 사전을 친구 삼아 외톨이로 지내는 올리브 역의 해일리 갤리번은 오시지 않을지도 모르는 부모님을 위해 객석에 자리를 맡아놓았다는 내용을 담은 뮤지컬 넘버 ‘마이 프렌드, 딕셔너리’, 그리고 인도에 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의 노래 ‘아이 러브 유 송’ 등을 차분한 연기와 고운 미성을 자랑하는 가창력으로 열창하여 눈에 띄었다. 최근 <그리스>를 비롯하여 <스프링 어웨이크닝> 등 주요 런던 프로덕션에 출연한 바 있고,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영국 투어에 참가하는 등 촉망받는 뮤지컬 신예이다.


프린지 연극계 및 지방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두각을 나타내어 처음으로 런던 주요극장에 출연하게 된 여배우 이리스 로버츠는 이번 공연에서는 혀짤배기소리로 훌륭하게 스펠링을 맞추는 소녀, 로게인 역을 무난하게 소화했다.  또한 많은 식구들 등살에 구박덩이로 소심하게 자란 소년, 리프 코니베어 역의 크리스 칼스웰, 그리고 사과 주스를 나누어 주며 탈락자를 객석으로 인도하는 미치 역의 에이코 미첼 등이 무난한 연기로 선전했다. 

 

 


이번 런던의 <스펠링 비>는 2005년 뉴욕에서 공연했던 버전을 업데이트한 작품으로 주요 제시 단어들이 대폭 교체되었고, 노래 가사의 내용들도 일부 교체되었다. 전반적인 내용과 음악은 원작을 그대로 따랐다. 영국 배우들의 연기는 전반적으로 열정이 담뿍 담겨 있었지만, 미국 배우들이 공연했던 브로드웨이 공연과 비교할 때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부족했다. 자기들이 신이 나서 즐기며 연기하는 모습이 영국 배우들에게서는 쉽게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힘을 들여 열심히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 반면, 능청스럽게 어린아이 역할을 연기하며 스스로 즐기는 자연스러움이 보기 좋았던 미국 프로덕션의 맛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미국적인 소재의 미국 뮤지컬을 영국의 주요 극장에서 선보인다는 사실이, 그것을 영국 관객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관람할 수 있는 트랜스내셔널한 상황이, 한때 이 작품을 번역했던 역자로서 보기 좋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0호 2011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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