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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베르테르> 이지혜 [No.147]

글 | 송준호 사진 | 김수홍 2015-12-19 7,843

사람에 한 발짝 더 다가간

2013년, 이지혜의 롯데는 사랑스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설익어 보였다.  데뷔작 이후 두 번째 공연인 데다 베르테르와 함께 극을 이끄는 큰 역할이었으니  풋내기 배우로서는 당연한 한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2년 만에 다시 만난 이지혜의 롯데는  사랑스러움은 물론, 이제는 납득할 수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성장의 계기가 된 ‘롯데’

<베르테르> 개막 후 며칠이 채 안 된 주말 낮 공연. 롯데와 알베르트가 함께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 ‘달빛산책’이 뭔가 심상치 않다. 정적 가운데 오직 두 배우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선율만이 감미롭게 어우러져야 하는 이 장면에서 스피커가 ‘지지직’ 하는 불길한 소음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몇 초 후 ‘펑!’ 하는 굉음까지 터지자 객석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전날 파리에서 충격적인 테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 깊은 것은 이런 사고에도 아랑곳없이 끝까지 노래를 마친 배우들이었다. 특히 이지혜는 놀란 티도 내지 않고 알베르트 역의 이상현을 향한 집중력을 놓치지 않았다. 두 남자 사이에서 어떻게 할지 몰라 애매하고 우유부단해 보였던 초연 때와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전체적인 캐릭터 해석도 훨씬 나아졌다. 이지혜는 처음 느끼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2막의 롯데에서 다소 의문점을 남겼던 초연 때와 달리, 이번에는 입장을 정리한 듯 분명해진 모습을 보여줬다. 배우 내면에서 캐릭터에 대한 정리가 됐다는 뜻일 거다.


이런 변화는 그동안 수없이 롯데를 고민하고 분석한 결과일 테지만, 뜻밖에도 이지혜는 이번 공연에 참여하기까지 힘든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2막의 감정 처리에 대한 초연 당시의 트라우마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롯데의 감정선을 물 흐르듯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2막에서 롯데의 행동들이 이해가 안 됐거든요. 어떻게든 소화해 보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은 채로 연기하니까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죠. 그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뮤지컬 배우’로서의 자질을 떠나 당시 겨우 23세에 불과했던 이지혜에게 이런 벽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한 편의 뮤지컬을 했을 뿐인, 심지어 아픈 사랑의 경험마저 없는 어린 배우였다.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연출부터 선배 배우들까지 생짜 신인인 이지혜를 배려하고 도와준 결과 무난한 엠마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테르>의 롯데는 타인의 도움만으로는 표현에 한계가 있는 캐릭터였다. 남녀 간의 미묘한 감정과 욕망과 혼란을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노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연기의 기술과 인간의 이해가 축적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이지혜는 충분한 무대 경험과 다양한 인생의 감정들이 내면에서 숙성된 후 롯데와 다시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오필리어>와 <드라큘라>, <지킬 앤 하이드>를 거치는 동안 <베르테르>는 이지혜에게 항상 다시 도전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인터뷰 때마다 받는 ‘가장 하고 싶은 작품’에 대한 질문의 답도 항상 <베르테르>였다. 그런데 ‘서른 즈음’이라고 복귀(?) 시기까지 염두에 뒀던 이지혜에게 그 과제를 해결할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왔다. 기쁘기도 했지만 아직은 확신이 없었다. 출연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조광화 연출과 구소영 음악감독의 조언을 얻으면서 용기를 냈다. 처음에는 몸이 초연 때의 한계를 기억하고 있어서 잘 풀리지 않았지만, 그걸 해결하자 그동안 아무리 애써도 찾지 못했던 것들이 불쑥불쑥 다가와 이지혜의 것이 됐다. 2년 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경험들도 이번에는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예전에는 롯데를 남자의 첫사랑 같은 순수함의 상징이라고만 봤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복잡함을 느끼는 ‘여자’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이제 이지혜는 베르테르에게 흔들리는 롯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어장 관리녀(?)’라는 롯데에 대한 세간의 비난도 ‘본인이 그런 일을 겪게 되면 이해할 것’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 결과 예전에는 ‘두려움’으로 표현됐던 롯데의 행동은 이제 ‘혼란스러움’에 초점을 맞춰 그려지고 있다. 그 혼란스러움에는 베르테르에 대한 우정을 넘어선 감정, 단순히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건 2년 전의 그녀가 생각한 ‘연기의 기술과 인간의 이해’가 마침내 녹아든 결과다. 



배우의 길, 알수록 재미있다


<베르테르>에서 느낀 좌절감은 그녀가 처음으로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나는 안 되겠구나, 나는 배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 만큼 매일 깨지고 무너졌어요. 자존감은 떨어지고 계속 한계에 부딪히는 나날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그런 과정들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배우를 포기했을 것 같아요.” 


<베르테르>를 마치고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창작뮤지컬 <오필리어>를 선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나를 깰 수 있는 힘든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깨지고 좌절하고 고민하면서 배운 것들이 굉장히 많았으니까요.” 타이틀롤인 데다 공연 기간도 짧고, 게다가 창작이라는 점도 의욕을 북돋웠다. “이때가 아니면 못하겠다 싶었어요. 남장에 칼싸움까지 하는 역할이라 ‘어디 한번 부딪쳐보자’ 하는 마음으로 했죠.”  이런 수련의 과정들을 통해 기존에 해왔던 작품의 인물도 다시 보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즐겁게만 했던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도 그중 하나다. “사실 엠마는 루시보다 더 멘탈이 강한 여자예요. 겉으로는 청순한 소녀일지 몰라도 알고 보면 지킬보다 더 강단 있는 ‘쎈’ 캐릭터거든요.” 인물 해석에 대한 폭이 넓어지면서 이지혜는 자연스레 자신의 연기 폭과 이미지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됐다. 


그런 차에 만나게 된 것이 바로 <드라큘라>의 루시였다. 루시는 주로 단정하고 여성적인 캐릭터를 해온 이지혜가 처음으로 정반대의 유형으로 도전한 역이었다. “루시는 사실 저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까운 캐릭터였어요. 발랄하고 호기심 많은 모습에 저절로 마음이 끌렸고, 대본도 무척 재미있었어요.” <오필리어>와 <드라큘라>를 연달아 하면서 느낀 건 초연의 재미다. “물론 부담감도 엄청나죠. 이전에는 없던 상태에서 캐릭터의 원형을 제시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점 덕분에 오히려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더 커지고 ‘내 새끼’ 같은 느낌이 있어요. 다시 한다면 보완해야 할 점들도 더 명확히 보일 테고요.”


이제 겨우 네 작품을 거친 이지혜의 연기 스펙트럼은 아직 넓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어떤 역이든 다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나는 이런 역을 잘하니까 이것만 할 거라고 국한시키지 않고, 다양한 역할에 도전하면서 저한테 맞는 옷을 찾으려고 해요.”  데뷔 초와 달리 이지혜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번 음향 사고가 벌어지던 날의 의연한 모습이 그 증거다. “사실 무대에서는 소리가 엄청나게 컸거든요. 아마 옛날의 저였으면 주저앉았을 거예요. 그다음에 대사도 노래도 다 날아갔겠죠. (웃음)” 작은 대사 실수에도 개의치 않고 그다음 연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노련함은 조승우나 전미도의 연기를 보면서 항상 배운다. 또 성악과 출신으로서 데뷔 이후 줄곧 민감했던 ‘음이탈’도 너무 신경 쓰지 않게 됐다. “저에게 음이탈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첫 공연부터 엄청난 부담감에 말도 안 되는 음이탈이 나왔어요. 예전이면 바로 눈물이 터졌을 텐데 저도 모르게 그냥 웃으면서 바로 넘어갔어요. 순간 ‘우와~ 너 많이 컸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 


4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경력에서 이지혜는 벌써 대부분의 여배우들이 선망하는 두 캐릭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단순히 신데렐라처럼 운이 좋아서 그런 경력을 성취한 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부담감을 안고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난관을 극복한 결과다. 이는 ‘뮤지컬 배우’라는 자각이 없던 이지혜가 스스로 배우가 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이지혜는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라면 해보지 않았던 경험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돼 있다. 이제까지 주로 대극장 무대에 서왔지만 기회가 된다면 소극장 무대에도 서보고 싶다. 특히 최유하가 연기한 <난쟁이들>의 백설공주 역이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전미도가 보여준 태희는 보자마자 반해버린 캐릭터다. 성악과 출신인 만큼 양준모 연출의 <리타>도 언젠가 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그런 다양한 경험들을 쌓아 그녀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소통할 수 있는 배우’다. “관객들과 소통한다는 건, 내가 그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이 된다는 거잖아요. 그건 정말 크고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공연을 본 관객 중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게 두 명이 되고 다섯 명이 되고 몇십 명이 되는 과정까지 가는 게 목표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47호 2015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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