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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라흐마니노프> [No.156]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HJ컬쳐 2016-09-13 4,012

긍정의 힘으로 지워버린

예술가의 고뇌 <라흐마니노프>



소재의 함정                         


재난 같은 더위 때문이었을까. 이번 여름의 극장에서 재난을 다룬 공연과 영화가 발휘한 힘은 막강했더랬다. 터널이 무너지든 막장이 내려앉든 좀비가 되든 간에 이야기의 핵심은 같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재난의 진앙이라는 것. 이야기의 구성과 진행도 대략 비슷하다. 비리와 모순이 드러나고 이기심과 양심이 갈등하지만 삶의 의지와 숭고함이 끝내 우리를 살게 할지니. 각각 다른 이야기라 해도 구성이나 주제나 결론이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재난이라는 소재가 같기 때문이다. 소재에는 이미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는 법. 소재를 선택하는 순간 이야기의 갈 길은 대략 정해지게 마련인 거다. 특히 대중 서사에서 소재는 그 자체로 장르의 공식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창작의 관건은 소재의 예상치를 어떻게 기대치로 바꾸느냐에 있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라흐마니노프>의 예상치는 분명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삶과 음악이 뮤지컬의 이야기와 음악이 될 거라는 당연한 예상. 그런데 이 당연한 예상치를 기대치로 연결시키기에는 도처에 함정이 많다. 실존했던 인물을 소재 삼을 때 빠질 수 있는 첫 번째 함정은 자칫 연대기의 나열에 그쳐버릴 수 있다는 것. 주로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우는 역사극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대개 이런 작품은 성실하긴 한데 관점이 없어 지루하기가 구만리다. 두 번째 함정은 지나친 픽션으로 흘러버린다는 것. 첫 번째 함정과 정반대의 경우이다. 기록이 충분치 않은 부분에서 상상력을 펼치는 건 좋다. 하지만 이런 경우 충분치 않은 기록을 상쇄할 만큼의 충분한 개연성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치해지거나 비장해지기나 황당해지기 십상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천재 예술가라면 얘기는 더 복잡해진다. 천재는 일상성의 범주 바깥에 있는 사람이니만큼 자기 스스로 극의 화자가 되기는 어렵다. 그는 누군가의 시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천재에게 언제나 거울 관계의 인물이 설정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좌우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미덕은 이 모든 함정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단 라흐마니노프의 일대기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가 좌절했던 시기에 관심을 집중한다. 집약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이 좌절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단서는 그의 전기에서도 그리 많이 깔려 있지 않단다. 빈약한 기록을 탄탄하게 하는 건 오직 상상의 두께뿐.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될 지점이 여기인가 보다. 상상력을 전개시킬 등장인물은 두 명이다. 라흐마니노프와 그를 지켜보는 정신의학자. 좌절한 천재와 그를 지켜보는 관찰자라는 설정은 서술자의 거리와 거울 관계의 밀착을 오가면서 극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소재에 걸맞은 적절한 배치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소재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하면서 오히려 소재의 이야깃거리를 효율적으로 끌어 나갈 수 있도록 판을 깔아놓았다. 포석이 좋다.



클래식 주크박스?                             


그러나 포석의 무난함에 비해 행마의 형국이 좋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 역시 소재에서부터 비롯되는 문제일 터. 행마에 걸림이 되는 소재는 다름 아닌 음악이다. 제목이 제목인지라 이 작품의 음악이 라흐마니노프에 토대를 둘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 활용의 방식이 효율적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과 피아노곡이 마치 주크박스의 음악처럼 활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소재가 되어야 할 음악이 뼈대가 되어버린 셈이다. 물론 라흐마니노프의 삶을 다루면서 그의 음악을 제쳐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해도 전체 뮤지컬 넘버의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채우는 것이 과연 창의적인 선택이었을까? 노래로 번역된 피아노곡이 매력적이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노래로 옷을 바꿔 입느라 오히려 난해해져버린 피아노곡의 예민한 음률은 아무리 들어도 친숙해지지 않는다. 원곡 특유의 분위기는 사라진 채 멜로디만 어려운 느낌으로 남은 모양새다. 라흐마니노프의 흔적은 남아 있지만 뮤지컬 넘버로서의 독립된 멋스러움을 장착하지 못한 음악에 관객의 귀는 원곡의 선율을 찾느라 산만해지고 만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아니라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만의 음악’을 기대했건만.


음악을 다루는 시각적 방식도 효율적이지 않긴 마찬가지다. 라흐마니노프의 연주 장면만 해도 그렇다. 다양한 작곡가의 작품을 신들린 듯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모습에 조명은 배우가 아닌 연주자를 비춘다. 연주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니 당연한 그림이겠지만 이 순간 불 꺼진 무대에 아무 설정 없이 고개 숙이고 있는 라흐마니노프 역의 연기자는 존재감을 잃고 만다. 무대 위 피아노 앞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연주하는 장면이 그려질 때마다 손가락 대역인 실제 연주자에게 시각이 분산되는데, 이런 장면이 반복될수록 무대 앞 배우를 보면서 라흐마니노프의 천재성에 공감하기는 어려워지더라. 액터 뮤지션이 아닌 이상 연주자로서의 주인공을 강조할 때 어쩔 수 없이 어색해지는 지점일 것이다. 이때 필요한 건? 실제의 연주자 앞에서 가상의 연주자인 배우를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연출의 솜씨가 아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운 것은 음악을 대하는 이 작품의 묘한 이분법이다. 현악사중주에 일임한 음악과는 달리 작품 안에서 소소히 활용되는 음악에 이 작품은 더없이 무신경하다. 천재 음악가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정신의학자의 비올라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악기 자체로 보든 악기를 연주하는 행동으로 보든 거기에는 아무런 극적 의미도, 상징도, 음률도 담겨 있지 않다. 농담이나 재치는커녕 장난조차 되지 못하는 이런 어이없는 설정을 심어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이런 설정이 작품의 음악적 진정성에 대한 신뢰까지 깎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는데. 음악을 기준으로 볼 때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소재의 함정을 잘 피해 갔다고 말하기는 여러모로 어렵겠다.



긍정의 힘이라니!                    


하지만 이 작품의 느슨함을 단지 음악 때문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고수의 포석에 못 미치는 하수의 행마는 이야기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도처에서 헛발을 내딛는다. 천재의 좌절도 극적으로 얽혀 있지 않아 맛이 심심한데, 그를 치료하기 위한 정신의학자의 묘사도 만만찮게 부실하다. 극의 전개를 이끄는 큰 틀이 정신의학적 대결과 치료라면 적어도 그 과정을 그려내는 치밀한 논리와 리얼리티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 대결 가운데서 극적 긴장이 생겨나고 극의 밀도는 치밀해질 거다. 하지만 이 작품의 문제는 치료의 리얼리티 이전에 치료의 대결 자체가 없다는 데 있다. 그러니 은폐하는 것도 드러나는 것도 없이 대사든 노래든 그저 혼자만의 회상이요 고백일 수밖에.


내용 없는 치료의 외피를 채우는 건 뜬금없게도 긍정의 힘이다. ‘할 수 있다 생각하면 작품도 쓸 것이고 사랑도 받을 것이다’를 반복하는 자기 암시의 격려라니. 프로이트의 제자로 설명되는 정신의학자의 치료 과정에 프로이트의 색채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극작의 준비 부족도 문제지만, 좌절을 극복하는 해법으로 대뜸 긍정의 힘을 제시하는 것은 천재 예술가의 삶이라는 소재의 이야깃거리로 볼 때 힘 빠지도록 싱거운 결론이다. 주제는 압축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무대 위 두 사람만 서로에게 감동하고 서로를 통해 변화한다. 과정이 있는 심리극이라기보다는 결론만 있는 상호 성장 드라마라고나 할까. 그리 길지 않은 극이 지루해지는 이유이다. 무대와 연기도 관객의 숨통을 틔우진 못한다. 공간을 메우는 데에만 집중한 것처럼 보이는 비좁은 무대 공간은 부족한 극의 밀도를 대신하느라 답답해져 버렸고, 무대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듯 속삭이는 김경수의 화술은 캐릭터 설정에서나 역할 전환에서나 대사 전달에서나 효과적이지 않다.


제작사 HJ컬처의 전작 <파리넬리>에는 ‘울게하소서’의 루이스 초이가 있고, <살리에르>에는 모차르트의 음악보다 더 유명한 살리에르의 질투가 있건만, <라흐마니노프>에는… 못 찾겠다, 꾀꼬리.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6호 2016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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