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인터뷰 | 뮤지컬 배우로 늙어간다는 것 - <몬테크리스토>의 류정한 [No.79]

글|박병성 |사진|김호근 2010-04-12 6,239

 

Grow Old as a Musical Actor

류정한은 다작을 하는 배우는 아니다. 요즘같이 작품이 많이 올라가고, 더블을 넘어 트리플 캐스팅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그가 욕심을 냈다면 훨씬 더 많은 작품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해에 서너 편의 작품을 게으르지 않게 고르고 성실히 연기해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쫓아다니지도 않고, 부러 대중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도 유독 뮤지컬계에서 두드러진 배우로 남는 것은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고 그 길만을 고집 있게 추구하기 때문이다. 류정한은 먹의 농담으로만 깊은 맛을 내는 수묵화를 닮았다. 오랜만에 고향에 들러도 한결같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나무가 있어 마음이 든든하듯, 류정한은 뮤지컬계에서 그러한 존재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힘


모든 배우가 그렇겠지만 특히 류정한은 작품을 꼼꼼하게 고른다. <맨 오브 라만차> 재공연에서 한층 성숙한 돈 키호테를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은 후 그가 선택한 작품은 유럽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이다. 유럽 뮤지컬은 음악적인 요소가 강해서 클래식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이 작품을 택한 이유는 음악보다는 텍스트 때문이었다. “애정을 갖는 작품 중 하나가 <스위니 토드>인데,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스위니 토드>의 토대가 되었던 소설이라고 들었어요. 실제로 내용이 비슷해요. 예전에는 단순하게 음악이나 뭐 하나가 좋으면 했었는데, 작품을 거듭 하다보니까 스토리가 빈약하면 음악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음악성이 약해도 텍스트가 좋으면 음악마저도 좋게 들리는 경우가 있죠.”


한 평범한 남자를 광기 어린 살인마로 만들었던 <스위니 토드>와, 건실한 청년 에드몬드를 복수의 화신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만든 <몬테크리스토>의 구조가 비슷하긴 하다. 그러나 그는 두 캐릭터에 조금 다르게 접근한다. <스위니 토드>에서 그가 연기한 스위니 토드는 광기 어린 살인마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잃은 불쌍한 존재였다. 류정한은 살인을 저지르는 스위니 토드일망정 관객들이 이해하고 동정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몇몇 관객들은 이미 DVD로 익숙한 스위니 토드가 아닌 류정한이 창조한 무기력한 스위니 토드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스위니 토드와는 반대로 접근한다. “에드몬드는 20대에 선장이 될 정도로 강한 뱃사람이에요. 그는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니죠. 그렇게 무섭게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그가 강하기 때문이에요. 아직 의견이 합의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치밀하게 복수하는 냉혈한이 되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어요.”

그는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예전보다 한결 여유로웠고 그래서 편안해 보였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서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공연 하면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편이었다. 공연을 망쳤다고 생각하면 잠도 못 이루고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 그런 긴장감이 더 나은 무대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이 프로페셔널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말하더군요. ‘왜 너가 좋아하는 공연을 하면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니? 너에게도 좀 너그러워져 봐.’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마음을 고쳐먹고 행복하게 공연을 하니까 연습 때도 더 웃게 되고 장난도 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늘 그의 옆에서 지켜준 팬들이 그에게 힘이 되어 준다. 성악을 전공하고 연극을 통해 무대에 데뷔한 그가 뮤지컬 배우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팬들의 변함없는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오페라의 유령> 라울 역으로 서는 마지막 공연 때였다. 7개월간 4~5번을 제외하고 무대를 지켜왔다. 그런데 공연 마지막을 하루 남겨두고 발목을 크게 다친 것이다. 2막은 서지 못하고 커버가 출연했다. 침을 맞았지만 다음 날 발은 더 부어서 딛기도 힘겨운 상태였다. 결국 마지막 날 낮 공연은 커버가 무대에 섰다. 너무 억울했다. 마지막 공연은 자신이 서고 싶었다. 그래서 아는 의원에서 강한 진통제를 맞고 괜찮다며 무대에 오르겠다고 고집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공연 전에 객석에 캐스팅을 발표했거든요.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라울 역에 류정한’이라고 하니까 함성이 들리는 거예요. 저희 팬들이 제가 부상당했고 낮 공연에 못 섰다는 소리를 들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캐스팅이 발표되자 함성이 터져 나온 거죠. 마지막 공연 표라 구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백 명이나 단체로 구해서 왔던 거예요. 함성을 듣자 눈물이 마구 흘렀어요.” 그 눈물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눈물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무대에 서려고만 했지, 정작 자신을 아껴주는 팬들을 생각하지 못한 반성의 눈물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람이었네


말 습관은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 류정한은 ‘~경우도 있지만, ~하지만’이란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그가 자기 생각을 분명히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두기 때문이다. 류정한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그는 어느새 어느 것에도 유혹됨이 없다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들어선다. 각 나이대별로 의미를 붙인 공자의 분류라면 그는 지금 이순(耳順, 귀가 순해진다는 나이 60세)에 이른 듯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배우는 자의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을 그려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예민하고 섬세하다. 반면 생각지도 못한 무수한 삶을 살다 보니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도 한다. 류정한은 지금 후자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같이 일하는 후배들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어요. 뮤지컬이 아닌 분야의 사람들로부터도 많이 배우고요. 때로는 주위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더 커 보일 때도 있어요. 배운다는 게 대단한 사람들에게서만 배우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주변에서 그런 것을 느낄 때가 많아요.”


배우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배우라고들 한다. 바꿔 생각하면 많이 배울수록 좋은 배우가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배운다는 것은 지식을 늘린다거나 학식을 높인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보다는 인간을 이해하는 그릇이 커진다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류정한은 <맨 오브 라만차> 초연 때 노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 파고다 공원을 자주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거동이 불편하지만 유독 목소리가 꼬장꼬장했던 한 노인을 발견하고 그 노인의 몸짓이나 목소리를 열심히 따라 하려고 연습했다. 당시 관객들은 젊은 세르반테스에서 나이든 알론조 노인으로 변하는 류정한의 연기에 많은 박수를 보냈다. 이제 그는 캐릭터에 접근하기 위해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좀 더 캐릭터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함께 공연하는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좋은 악기가 물기가 적당히 말라가면서 좋은 소리를 내듯 인물에 대해 이해를 높여서 자신의 몸을 좀 더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로 만들려고 한다.


그는 뮤지컬 배우로서 자부심이 누구보다도 강하다. 그래서 뮤지컬 배우를 그저 엔터테이너로 보는 시각이 못마땅하다. 뮤지컬 배우는 연예인도 아니고, 연극배우도 아니다. “뮤지컬 배우는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해야 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느 장르에 못지 않는 예술가로 대접받아야 해요. 그런데 가끔은 사람들이 뮤지컬 배우를 가볍게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런 그에게 뮤지컬 이외에 본인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게 무엇이냐고 했더니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사람’이라고 했다. “제가 많은 사람들하고 친하지는 못해요.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대학교 친구들을 주로 만나는데, 고등학교 친구들은 뮤지컬에 관심도 없지만 고민을 이야기하면 잘 맞장구쳐주고 좋아요. 대학교 친구들하고는 주로 듣는 편인데 요즘 오페라나 클래식계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재밌어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즐겁게 들어요. 앞으로는 그 사람들로 인해 행복해지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을 더 해야겠어요.”


뛰어난 배우는 뛰어난 재능을 가져야 하지만,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성실한 태도, 명민한 이해력을 지닌 류정한은 뛰어난 배우로도 손색이 없지만 좋은 배우,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는 나이가 들면 후배들의 무대에 조연으로 서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뮤지컬계에 작은 일이라도 하면서 늙어가고 싶다고 한다. 그가 뮤지컬 배우로서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가 궁금하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9호 201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배우와의 인터뷰는 <더뮤지컬> 홈페이지(www.themusical.co.kr)에서 동영상으로도 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