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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렁스> 이진희, 좋은 세상을 향한 고민 [No.200]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20-05-18 1,732

<렁스> 이진희
좋은 세상을 향한 고민 


오는 5월 국내 무대에 처음 오르는 <렁스>는 젊은 커플이 등장하는 남녀 2인극이다. 2011년 워싱턴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어떤 가정을 꾸릴 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문제에서 출발해 온 세계가 직면한 환경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사회적 화두로 질문을 확장해 간다. 자신의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거대한 질문을 책임져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없는 빈 무대에서 말의 힘으로 관객들을 집중시켜야 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작품. 준비 과정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만큼 큰 즐거움을 느낄 거라 기대한다는 이진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랜만에 찾은 삶의 행복
                     
<렁스>는 오랜만에 하는 신작이에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요.   이 작품은 특이하게 아프리카에서 대본을 읽게 됐어요. 최근에 참여한 영화 촬영 때문에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세 달 넘게 아프리카에 있었거든요. 해외에서 오랜 기간 머무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한 번에 한 가지의 일만 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연습이든 공연이든 촬영이든 한두 가지씩 같이하게 되니까 아무래도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에는 촬영 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잖아요. 매일 촬영이 끝나면 남은 시간은 제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시간에 쫓긴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대본을 읽는 것도 그랬어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읽을 수 있었고, 지금 이 시기에 관객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연습에 들어가면 엄청 고생하겠다 싶었지만. (웃음)

자유로이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잖아요. 뭐가 가장 좋았나요.    숙소가 바닷가에 있어서 거기 머문 3개월 동안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계절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자연을 마음에 담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어요. 창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이고, 또 해변을 걸으면서 산책하고, 오랜만에 하루를 천천히 보내다 보니 오히려 시간이 귀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게 정말 좋았어요. 한국에 돌아가면 또다시 바쁘게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날들이 저한테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프리카에 다녀오고 나서 뭐가 하나 달라졌냐면, 요즘엔 새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게 너무 예뻐 보여요. 근데, 꽃이 눈에 들어오면 나이 든 거라고 하던데 좋아할 일이 아닌가. (웃음) 

공연에 참여하게 되는 작품은 대본을 읽을 때 ‘이건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렁스>는 어땠나요.   아뇨, 저는 어떤 대본이든 내가 할 거란 생각 없이 읽으려고 해요. 예전에는 ‘내가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대본을 읽었는데, 그런 시각이 작품 전체를 보는 데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순수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대본을 읽으려고 하죠. 특히 <렁스>의 제작사인 연극열전은 너무 잘 아는 단체니까 더욱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려고 하고요. 이 작품 첫인상은 솔직히 캐릭터에 호감이 가지 않았어요. 관객분들이 이 여자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걱정이 됐죠. 그런데 작품에 담긴 이야기가 우리 모두 한 번쯤 생각해 보고 같이 나누면 좋겠다 싶었어요. 저한테 언제나 제일 중요한 작품 선택 기준은 지금 이 공연을 하는 이유거든요. 물론 사람 관계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게 될 때도 있지만요. 

이 작품은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서 환경 문제라는 넓은 주제로 나아가잖아요. 평소 고민했던 부분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였을까요.   임신과 출산, 육아는 제 연령대 여성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보는 문제일 거예요. 결혼 유무를 떠나서요. 솔직히 저한테 임신은 지금도 고민 중인 현실적인 문제고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성분들에게 이 공연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지만, 젊은 여성분들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요. 반면 환경 문제는 막연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주제예요. 평소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재활용 같은 부분에만 신경 쓰는 정도? 환경 문제에 깊게 파고들면 일상생활에서 신경 쓸 일이 많아지니까 어쩌면 너무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번에 기후학자 캐릭터를 맡으면서 이것저것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를 많이 찾아봤거든요.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환경 운동가들이 잠을 못 이룰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환경 문제라는 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전에 제가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했던 문제는 너무나 작은 부분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인간이 태어나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환경을 망가뜨리고 있고, 지금 환경이 변해 가는 속도를 보면 바로 내 세대가 어떤 자연재해를 맞이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조금 조심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지만, 혹시 어떤 부분에서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 고민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무래도 경력 단절 문제가 제일 고민이었죠. 물론 아이를 낳고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저는 쉽게 그렇게 못 할 거라는 걱정이 으레 앞서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과거에 비해 아이가 자라는 데 부모의 많은 서포트가 필요하잖아요. 제 삶의 많은 부분이 아이에게 맞춰져야 할 텐데 내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죠. 그리고 아주 솔직히 말하면, 저는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라 스스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혹시라도 제가 원하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제 자신에 대한 스트레스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 것 같거든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닌데,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두려워서 겁이 많아져요.




새로운 인물을 통한 사고의 확장
                      
배우가 맡은 인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도 어렵잖아요. 보통 그 인물에 천천히 스며드는 편인가요, 아니면 어느 순간 특정 계기로 인해 확 마음이 열리는 편인가요.    그건 매번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가운데 이해가 가장 쉬웠던 인물은 <킬 미 나우>의 트와일라였어요. 트와일라는 대본을 처음 읽자마자 ‘이 사람 나 같다’고 느꼈죠. 하지만 <렁스>의 여자는 저한테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어요. (웃음) 제가 맡은 캐릭터와 저라는 사람의 성격에 차이가 클수록 부딪히는 지점이 많거든요. 여자는 예를 들어 설명하면 자기가 주문한 커피가 맛이 없을 때 ‘더럽게 맛없네’ 하고 입 밖으로 표현하는 솔직한 사람이에요. 실제 저하고는 많이 달라서 제 입장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고? 굳이?’라는 생각이 들죠. 저하고 여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서로 다른 게 당연하지만, 이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만약 제가 이 사람이 여기서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서 ‘그렇다 치고’ 넘어가면 무대에 올라갔을 때 관객분들이 곧바로 알아차릴 거예요. 연습은 풀지 못한 숙제를 하나씩 줄여 나가는 과정 같아요.

여자는 생각을 매끄럽게 정리해 말한다기보다 생각의 흐름대로 툭툭 단어를 내뱉을 때가 많잖아요. 매끄러운 문장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대사를 외우는 건 어렵지 않나요.   공연 속 대화는 보통 극 중 상황에 맞게 흘러가잖아요. 그래서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대사가 쉽게 외워지는데, 이렇게 맥락을 종잡을 수 없는 공연은 처음이에요. (웃음)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하다 갑자기 다른 주제를 확 끄집어내고 원래 이야기하던 주제로 금세 다시 되돌아가는 게 여자의 화법이거든요. ‘커피 맛있다, 내일 뭐 하지? 커피 맛있는데?’ 이런 식으로요. 대본을 읽다 보면 ‘이 생각에서 왜 저 생각으로 넘어갔지?’ 싶은 순간들이 수십 개도 넘어서 이 여자처럼 생각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 대사를 외울 수가 없어요. 달리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대본 전체를 녹음해서 출퇴근길에 오며 가며 계속 듣고 있죠.

극 중 남녀 캐릭터의 흥미로운 점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반복적으로 말하지만, 정작 누가 봐도 선뜻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이에요. 꼭 우리들의 실제 모습처럼요.   맞아요, 그런 점이 저하고 좀 비슷해요. 저는 극 중 여자처럼 강박에 가까울 만큼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늘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거든요. 마음으로만 항상 그러길 바랄 뿐이죠. 아마 사람들 앞에 서는 공연을 하다 보니 더 그런 책임감을 느끼나 봐요. 저라는 사람이 공연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면, 실제 제 자신도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이어야 할 것 같거든요. 사소하게는 내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말을 내뱉지 말자 같은 자기 검열을 많이 하는데, 어떤 때는 주위 사람들, 특히 제 남편이나 저희 부모님, 동생이 저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어요. 제가 생각해도 전 가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숨 막히게 하는 것 같거든요. 좋은 사람이라는 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를 텐데, 이 작품을 통해서 더욱 생각이 복잡해졌죠. 이런 과정을 통해 무언가 배우는 거겠지만요.

앞서 기후학자들이 환경 걱정에 잠을 못 이룰 것 같다고 말한 것처럼, 혹시 배우로서 어떤 생각에 골몰했던 적이 있을까요.   저는 오랜 시간 무대에 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적이 있어요. 두려운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게 아니라 멀쩡하게 공연하다 갑자기 숨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한 번씩 몰려왔어요. 상대 배우도 쉽게 눈치 못 챌 정도로 짧게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그런 감정을 한 번 느끼고 나면 그 문제로 한 달 가까이 고민하게 되는 거예요. 저는 그 순간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거든요. 처음하는 공연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상태에 빠졌던 걸까. 그 이유가 뭐였을지 계속 생각했죠. 사실 무대 공포증은 지금도 여전히 있어요. 

어떤 두려움 때문인지 그 이유는 찾았어요?   처음엔 제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서일 거라 생각했어요. 배우는 무대 위에서 평가받는 직업이라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갖기가 쉽지 않거든요. 제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 낼 거란 믿음이 없어서 무대가 두려운가 보다 생각하고 그럴수록 더 깊게 작품에 파고들고 연습도 더 열심히 했죠. 특히 재공연에 참여할 경우엔 초연부터 이 작품을 사랑했던 관객분들이 저보다 작품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어요. 그런데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도 작품을 사랑해 주는 관객분들이에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배우와 스태프 들만 한 팀이 아니라, 객석에 앉은 사람들까지 전부 한 팀이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공연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아닌데 제 혼자 힘으로 이겨내려고 해서 힘들었나 봐요.

언제나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프리카에서 촬영하는 동안 동료들하고 서로 장점 말해 주기 게임을 한 적이 있어요. 학교 다닐 때 이후로 그런 게임은 처음 해봤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제가 생각지 못 했던 이야기를 듣게 된 거예요. 정확한 단어는 기억나지 않지만, 거기서 만난 동료들이 저보고 사람을 편견 없이 대하고 쉽게 평가하지 않는대요. 성격이 밝다, 분위기를 잘 띄운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그렇게 고맙고 따뜻한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그게 제가 바라는 인간상이거든요! (웃음)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에요.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 늘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0호 202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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