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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정동환 [No.205]

글 |박병성 사진 |김지현 2020-10-21 993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정동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무신론적 사회주의자 이반, 그의 대서사시에 등장하는 대심문관은 이반의 페르소나다. 세상의 지식을 탐구하며 신을 따르지만 메피스토의 내기에서 갈등하는 파우스트와 대심문관이 만난다. 연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는 인간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는 두 인물을 오롯이 배우 혼자 연기하는 작품이다. 이 어려운 시도 앞에 배우 정동환이 섰다. 수많은 도전을 해왔지만 이번이 가장 어려운 도전이라고 말하는 그는, 어렵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그것이 연극 정신이라고 말한다. 




도전해 볼 만한 일인극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엮어낸 일인극입니다. 이전에 일인극을 하신 적이 있나요?
없어요. 생각도 없었어요. 게다가 이 작품은 보통의 일인극하고도 달라요. 작품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보통의 일인극은 역할 전환을 할 때 다른 인물을 보여주면 되거든요. 이 작품에서는 모든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어야 해요. 이반과 알료샤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이반이자 알료샤여야 하는 거죠. 짧은 대화에서 변화를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시도되지 않았던 실험적인 도전이죠. 두 사람이 서로 반대 논리를 지니고 있거든요. 보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아요. 그게 이번 연극의 관건이니까. 

대본을 보니 거의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꽤 되던데요. 연출적인 변화를 주나요?
모자를 벗었다 쓴다거나, 의상으로 인물을 표현한다거나 그런 연출은 하지 않아요. 약간의 움직임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얼굴 안에 상대 얼굴이 혼재되어 있도록 보여주려는 게 이 작품의 특징이에요. 저는 이 작품을 그렇게 해석하고 연기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이런 일인극 방식을 선택한 극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천사와 악마,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우리 인간 안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게 각색자나 연출가의 의도라고 보고 있어요. 연극적으로 풀어내야 할 일이에요. 설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을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각색자나 연출가의 뜻을 존중하는 게 내가 할 일이죠. 연출에 변화를 주면 연기하기는 편하겠지만 타협할 생각은 없어요. 이건 내 몫이고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죠. 관객들 중 어떤 사람들은 뭐 이런 연극이 다 있냐고 할지도 몰라요. 작품에서 서사나 스타일이 아닌 인간 내부에 혼재하고 있는 내면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연극을 보는 이유가 아닐까요.

오롯이 배우가 짊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인물에 접근하실지 상상이 안 됩니다. 
나도 그래요. 연습하면서 어떨 때는 내가 메피스토인지, 파우스트인지 혼란스러운 때도 있어요. 이 작품이 내 연기 인생을 끝내는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할 때도 그랬어요. (그는 2017년 동일 단체인 극단 피악의 연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7시간 동안 도스토옙스키, 조시마 장로, 대심문관, 식객 네 인물을 연기했다. 특히 대심문관 장면에서는 20여 분간 독백을 쏟아냈다.-편집자 주) 대심문관 대사는 까먹으면 어물어물 다른 대사로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거죠. 그 작품 인터뷰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작품이 끝날 때까지는 해냈다는 말을 못한다. 작품이 끝나야 정말 끝나는 거니까.” 이 작품도 마찬가지에요. 결코 자신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니에요. 도전해 볼 만한 일이니까 다른 작품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노력하는 거죠. 




대심문관과 파우스트의 만남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역할을 맡으셨어요. 특히 대심문관은 같은 극단의 작품에서 연기하셨는데 인물에 대한 해석이 동일한가요.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없어요. 단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20여 분의 대사를 한 장소에서 쭉 했는데, 지금 작품에서는 예수를 수조에 두고 이야기한다는 게 다르죠.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조는 어지러운 이 세상일 수도, 마음을 흔드는 어떤 곳일 수도 있겠죠. 수조 주변을 돌면서 이야기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예요. 그 차이로 인해 연기 자체도 달라질 것이고 다른 형상으로 표현되겠죠. 

괴테의 『파우스트』나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엮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확한 것은 연출가나 각색자에게 들어야 하겠죠. 파우스트나 대심문관은 깊은 사유를 해온 인물이잖아요. 이들을 만나게 한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봐요. (『신곡』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천 년의 시간대를 넘어 동시대에서 만나요. 시도할 만한 사고의 실험이라고 생각해요. 

대문호가 말년에 완성한 두 작품은 모두 신과 인간,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과 대립하는 인물이 대심문관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예수와 대심문관 중 어느 쪽에 생각이 더 가까우신가요.
다 조금씩은 있어요. 어떨 땐 대심문관의 말이 너무 통쾌해요. 이반의 생각을 반역이라고 보고 부정하는 분들이 여전히 있지만 이반의 생각도 귀한 것이라고 봐요. 각각의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들의 생각에 빠져보려고 애를 쓰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게 옳고 그른지 명확하게 정리가 안되요. 

작품에서 파우스트는 연극 놀이를 통해 이반과 대심문관을 만납니다. 이 작품은 대심문관과 파우스트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연극에 대해서 말하는 메타 연극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요. 
희랍 비극이 유행했을 때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은 연극을 싫어했어요. 그래서 희극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희곡에서 소크라테스를 뜬구름 잡는 사람으로 풍자하기도 했잖아요. 연극은 그저 연극일 뿐이라고 비판하는데, 실제 연극은 인간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에요. 희랍 비극은 인간의 삶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줘요. 연극이 삶의 허상이라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삶 이상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작품은 바로 인간 안에 다양한 생각이나 인물들이 혼재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해요. 연극적 구조를 가져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봐요.

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연극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연극이 귀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에 대해 외우는 문장이 있어요. “연극이란 무엇인가? 연극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극한의 고통과 고뇌, 내적 갈등을 겪고 마침내 존재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 노정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유 의지를 넘어선 우주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일이고, 이는 곧 우주와의 화해이며 인간에 대한 무한 긍정이다.” 난 이게 연극 정신이라고 봐요. 내 생각은 아닌데 이 글이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디에 있는 글을 모아서 기억하는지도 모르죠. 연극은 모든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에요.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두운 공간에서 연극을 경험하는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나요. 
연극의 기원을 희랍 비극부터 보면 대략 기원전 500년이에요. 그러고 나서 르네상스가 16세기에 시작하잖아요. 근 2000년 동안 사람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으려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예요.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현실은 어떤가요. 앞선 시대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직이나 정의, 공정, 평등의 가치가 사라져버린 사회가 됐어요. 공부 열심히 한 사람이 지식으로 세상을 좌우하려고 하는데, 세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냔 말이에요. 평소 세상의 논리를 따라가지 말고 인간의 논리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논리를 붙잡고 가는 것이 중요하죠.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연극이에요. 연극은 인간을 연구해서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인간다움을 알려주잖아요. 나는 누구이고,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질문하는 게 연극이에요. 

코로나19로 사회가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연극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연극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럴 때도 있는 거죠. 이것보다 더 나빴던 때도 있었어요. 전염병 창궐이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오이디푸스 시절 테베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유럽에 페스트나 흑사병이 만연했을 때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상황에 맞게 대응하고 극복하려고 애를 쓰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수용하느냐도 중요해요. 세상과 화해한다는 게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 더 좋은 세상이 있을 거예요. 비대면 방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고,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귀하게 살아왔고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기회가 될 거예요. 

지금까지 매 순간 많은 작품과 인물에 도전해 왔습니다. 아직도 더 도전하고 싶은 작품이 있으신가요?
그럼요. 무한하죠. 어떤 나이가 되면 어때야 한다는 게 있기 마련이에요. 나는 그런 게 싫어요.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관객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요. 성패에 상관없이 도전해야 해요.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도전은 무엇이었나요?
지금이 가장 큰 도전이에요. 공연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이 작품이 어떻게 전달될지 나도 궁금해요. 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아! 이것이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나는 이 작품이 세상을 바꾸는 물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 아니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5호 2020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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