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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블랙메리포핀스> 이해준, 세상이 그에게 알려준 비밀 [No.206]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20-12-08 4,657

<블랙메리포핀스> 이해준
세상이 그에게 알려준 비밀  


세 편의 뮤지컬과 두 편의 연극. 1년 남짓한 시간에 이해준이 자신에게 새겨 넣은 작품은 모두 다섯 편이다. 그것들 전부 젊은 배우라면 누구나 욕심날 만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데, 이해준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오기까지 그는 누구보다 무대를 향한 절실한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작품을 만나면 잘 해내겠다는 마음보다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는 배우. 그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기대되는 이유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그를 단련했으리란 믿음 때문이다. 



멈추지 않고 성장하기 위해    

<블랙메리포핀스>는 처음 참여하는 작품이에요. 어떻게 출연을 결정하게 됐나요?
오래전에 초연된 스테디셀러이다 보니 주위에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몇 년 전에 공연 볼 기회를 놓친 후 한동안 공연 소식이 안 들려오더라고요. 잘되는 작품들은 보통 2~3년 주기로 재공연을 하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 건가 궁금해하다 잊고 지내게 됐죠. 그러다 이번에 출연 제의를 받게 돼서 반갑고 신기했어요. 제작사 피디님이 제가 이전에 참여했던 뮤지컬을 좋게 보셨나 봐요.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하고 공연 일정이 조금 맞물려서 처음엔 망설였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재공연인 만큼 놓치면 아쉬울 것 같았어요.

공연된 작품의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관객 후기를 검색해 볼 수 있잖아요.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관련 정보를 찾아보는 편이에요?
저는 관객 후기를 잘 안 찾아봐요. 물론 제가 모르는 작품의 경우에는 공연 리뷰가 작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순 있겠죠. 하지만 제 생각에 관객이 봤을 때 좋은 작품과 배우 입장에서 좋은 작품이 꼭 일치하진 않거든요. 작품 선택에서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이걸 했을 때 배우로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가’예요. 그런 면에서 무언가를 얻고 배울 수 있는 작품을 하는 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 번 참여한 작품은 다시 잘 안 하는 편이에요. 아직까진 새로운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서 새롭게 부딪치고 성장하고 싶거든요.

혹시 뮤지컬이나 연극 작품 선택 기준에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장르든 상관없이 첫 번째 기준은 대본이지만, 뮤지컬은 노래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요. 노래를 처음 딱 듣는 순간 첫인상에 ‘이 작품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저는 뮤지컬을 보러 갈 때 첫 번째 곡에 대한 기대가 큰데, <블랙메리포핀스>는 작품 전체를 압축해 표현한 듯한 ‘오버추어’가 정말 좋았어요. 그림자극처럼 만든 장면 연출도 인상적이고요. 전체적인 곡 분위기가 오묘해서 참 매력적이에요. 밝고 어두운 느낌이 공존하죠. 그리고 연출님이 대본을 쓰고 작곡도 하셔서 그런지, 이야기와 노래가 자연스럽게 연결돼요. 소위 말해 드라마에 노래가 잘 붙는다고 해야 하나. 극 중에서 노래가 시작되는 장면이 튀지 않아서 좋아요.

이번에 맡은 헤르만은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마음이 불안정하다’고 설명돼요. 캐릭터에 다가가는 데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헤르만은 어린 시절 한 집으로 입양된 네 아이들 가운데 누구보다 사랑이 고픈 아이였어요. 그래서 한스와 안나, 요나스한테 사랑을 많이 표현하는 편이었는데, 소중했던 형제들이 흩어지는 걸 막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돼서 그에 대한 미안함을 느껴요. 다른 둘보다 유독 안나와 유대 관계가 돈독했던 터라 특히 안나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크죠. 이십 대에 미술가로 성공했음에도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이유는 그래서예요. 어릴 적 헤어졌던 형제들을 12년 만에 다시 만나기로 하는 것도 미안한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가족들 간의 사랑이 그립기도 했을 테고요. 다만,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 헤르만이 안나에게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지, 그 마음을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 중이에요. 제 솔직한 마음은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뭐해!’거든요. (웃음) 헤르만을 멋있어 보이는 남자로 표현하진 않을 거예요.

아픈 기억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을 다시 마주하는 감정은 어떨 것 같아요?
네 사람은 피가 섞인 형제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유대감을 나누었을 거예요. 자기 인생에 처음 생긴 소중한 존재였으니까요. 따뜻한 손길과 사랑을 원했던 아이들이 천사 같은 보모 ‘메리’를 만나 행복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들이 입양된 이유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였잖아요? 서로가 서로의 실험 감시자였단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게 네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했을까요. 하지만 넷이 함께한 시간은 짧았더라도 행복했기 때문에 성인이 됐을 때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거죠. 아무도 우리를 보듬어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서로를 보듬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감추고 싶었던 기억조차 감싸 안을 줄 아는 용기는 제가 살아가는 데도 필요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한 것처럼 행복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불행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이 작품의 메시지잖아요. 그 이야기에 쉽게 공감했어요?
네, 완전히요. 극 중 네 사람은 실험을 통해 서로 발가벗겨진 듯한 모습을 봤을 테잖아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처음엔 자기가 알게 된 진실을 회피하고 싶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일상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겠죠. 미술가인 헤르만을 예로 든다면, 여성을 그릴 때 그림이 그로테스크해지는 식으로요. 그건 헤르만이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아마 계속 그럴 거예요. 무엇으로도 과거를 바꿀 순 없겠지만, 상처를 직시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인생은 행복한 순간 20퍼센트, 어렵고 힘든 시기 80퍼센트로 채워진다고 생각해요. 사는 게 너무 힘들기만 하면 버틸 수 없으니까, 힘듦과 힘듦 사이에 행복이 보상처럼 주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시즌은 막내 요나스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거라죠. 공연을 통해 무엇을 얻길 기대하고 있나요.
보통 창작 뮤지컬은 표현에서 배우에게 맡겨지는 부분이 큰데, <블랙메리포핀스>는 라이선스 뮤지컬처럼 형식화된 느낌이 있어요. 여러 시즌 공연된 데다 연출님이 디테일한 디렉션을 주셔서 그런가. 새로운 헤르만을 표현하려고 하기보다 프로덕션 내에서 공유된 내용을 잘 따라가려고요. 그래야 이 작품이 지닌 틀을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기존에 공연됐던 대본을 바탕으로 요나스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맺는데, 이전에 한스와 헤르만 버전으로 공연됐을 때도 같은 방식이었대요. 무대 위에서 네 남매가 만들어가는 분위기만으로 작품이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가장 최근에 참여했던 뮤지컬 두 편 다 2인극이었기 때문에 네 명의 시너지는 어떨지 그만큼 큰 에너지를 낼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어요.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행복  

동국대 연극학과를 나와서 2013년에 <웨딩 싱어>로 데뷔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뮤지컬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학교 다닐 때 ‘동대 부심’이 있었어요. 동국대, 중앙대, 한예종처럼 많은 배우들을 배출한 학교를 나오면 다 잘될 줄 알았죠. (웃음) 근데 졸업하고 밖에 나와 보니까 오디션 서류 전형에 붙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연극 전공이라 뮤지컬로 데뷔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졸업 공연으로 한 <레 미제라블>이 신기한 인연으로 이어졌어요. 당시 뮤지컬해븐의 박용호 대표님께서 그 공연을 보러 오셨거든요. 그날 공연 끝나고서 직원들한테 저 마리우스 하는 애 누구냐고, 쟤 <번지 점프를 하다> 오디션 보게 하라고 그러셨대요. (웃음) 아쉽게 <번지 점프를 하다> 오디션에선 떨어졌지만, 뮤지컬해븐의 다음 작품이었던 <웨딩 싱어> 앙상블에 합격하면서 데뷔하게 됐죠. 

첫 뮤지컬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았어요? 뮤지컬에 대한 열정을 더욱 키워줬나요?
그럼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오디션 때 10분 정도 안무를 가르쳐주고 그룹별로 나눠서 춤을 추게 했어요. 열의라도 보여야겠다 싶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막춤을 췄죠. 춤은 배워본 적이 없어서 너무 어렵더라고요! (웃음) 그땐 뮤지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선배님들이 하는 대로 열심히 따라했어요.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대사하는 선배님들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도 언젠간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마음먹었죠. 근데 솔직히 말해, 뮤지컬에 대한 소중함은 드라마 촬영을 해보고 나서 느꼈어요. 2016년 <알타 보이즈>를 한 후에 감사하게도 몇몇 작품 제의가 있었는데, 당시 소속사 뜻에 따라 아침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거든요. 드라마는 뮤지컬하고 작업 방식도 다르고 신인 배우로서 상처받는 일이 많아서, 이런 환경에서 연기해야 하는 거라면 돈을 못 벌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뮤지컬은 오디션이 많지 않아 작품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어떻게든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9년 <쓰릴 미>를 시작으로 일 년 사이에 네 편의 출연작이 늘어났어요. 이전에도 꾸준히 무대에 섰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이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쓰릴 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오디션을 봤어요. 그런데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주위에서 걱정하면서 만류하더라고요. 훌륭한 배우들이 많이 거쳐 간 사랑받는 작품에 괜히 잘못 덤볐다가 상처받지 않겠냐면서요. 그때 제가 공연을 쉬다 돌아온 상태였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은 아니었어요. 전작에서 임금 체불 문제로 개런티를 못 받아 고생했는데, 그 시기에 집안 사정까지 안 좋아져서 돈을 벌다 보니 일 년 반이란 공백이 생겼거든요. 공연을 쉬는 동안 레스토랑 서빙부터 연기 학원 아르바이트까지 별별 일을 다 했어요. 주위에서 말렸을 때 이 공연을 해도 될지 두려웠지만, 저한테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누구도 제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순 없잖아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진짜 열심히 했어요. 

힘든 시기를 겪고 다시 무대에 선 기분은 어땠어요?
공연을 쉬면서 학생들 연기 레슨을 해줬을 때,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었어요. ‘어떻게 먹고 살지?’ 하는 현실적인 고민에 부딪쳤던 시기에 수입이 안정적인 일을 하게 되니까 마음이 혹하더라고요. 근데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게, 돈을 많이 벌어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배우가 되고 싶다는 학생들의 꿈을 키워주고 있는데, 정작 저는 배우로서 제 꿈을 이루지 못한 거잖아요. 그래서 <쓰릴 미>로 다시 공연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공연 수입의 90퍼센트를 저금하고 있어요. 혹시라도 작품을 못하게 될 때를 대비해 레슨받을 돈을 모아놔야겠다 싶어서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저는 정말이지 평생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지금 같은 행복이 계속될 거란 생각은 안 해요. 배우가 배우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선택이 필요하니까 언젠간 힘든 시기가 또 찾아오겠죠. 그래도 고생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값진 보상을 받게 됐다고 생각하면 다시 힘들어져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를 시작했을 때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을 듯 싶은데 꿈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는 것 같나요?
데뷔 초에 엔터테인먼트 소속사에 들어갔을 때, 소위 말하는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방송으로 잘돼서 돈을 많이 벌면 부모님을 더 행복하게 해드려야지 그런 마음이 컸어요. 이제는 그런 생각 안 해요. 지금처럼 꾸준히 작품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어요. 이 일은 내 뜻대로 안 되는 직업이라는 걸 분명하게 느꼈더니, 거창한 목표 때문에 아등바등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요즘 코로나19로 공연계의 모든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잖아요, 각자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 보면 상황이 더욱 힘들어질 테니, 서로 조금씩 배려하고 양보해서 힘든 시기를 잘 버텨냈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6호 202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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