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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변함없이 반짝이는 정선아 [No.206]

글 |안세영 사진 |김현성 stylist | 천유경 make up | 오길주 hair | 도은 2020-12-08 8,548

변함없이 반짝이는 정선아 

 

열아홉 나이에 <렌트>의 미미로 데뷔해 대극장 주역으로 떠오른 정선아는 행운의 신데렐라라는 수식어와 함께 뮤지컬계에 발을 들였다. 그때 사람들이 몰랐던 건 정선아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가 아닌 춤추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학생 시절 홀린 듯 뮤지컬에 빠져든 이후 그녀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동안, 학교 밖에서 밤늦도록 춤추고 노래했던 발칙한 십 대 소녀의 성장기는 그대로 한국 뮤지컬의 역사가 되었다. 

 

 

꿈을 현실로 만든 열정

 

평소 공연을 마치면 여행을 통해 재충전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집을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죠. 지난 2월 <아이다> 공연을 마친 이후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요?

<아이다> 서울 공연이 끝을 향해 갈 때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죠. 곧 지나갈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다> 지방 공연이 취소되고, 다음 작품에도 출연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각보다 오래 쉬었어요. 처음에는 우울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으면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해질 뿐이잖아요.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았어요. 요가, 발레 같은 신체 훈련을 계속하고 성악 레슨도 받으면서 무대에 서지 않는 동안 배우로서 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또 지난 9월에는 모교인 동국대학교의 대학원에 입학해 다시 연기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어떻게 견디나 싶었던 긴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어요.

 

SNS를 통해 대학원 입학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어요. 배우로서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았는데, 뒤늦게 학구열에 불탄 이유는 뭐예요?

공연을 할 때는 바빠서 대학원은 감히 생각도 못했어요. 대학도 13년 만에 졸업했는걸요. 근데 어느 책 제목처럼 멈추니까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이왕 쉬게 된 거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앞으로 내가 배우 생활을 하는 데 양분이 될까 고민했어요. 나는 평생 실기로만 연기를 터득한 사람이니까, 공부를 통해 이론과 실기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연기에도 이성과 감성의 밸런스가 중요하더라고요. 대학원에 들어간 뒤 대학 때 제대로 못 읽었던 책을 전부 다시 사서 읽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공부가 너무 어려워서 살짝 후회도 했어요. (웃음) 코로나19 때문에 대부분의 수업이 비대면으로 이뤄지니까 더 편하지 않냐고들 말하는데, 저는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컴퓨터도 잘 못 다루고, 타고나길 대면에 강한 편이라 비대면 수업에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다행히 대면 실기 수업도 병행하고 있어요. 나이 어린 친구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고, 그 친구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죠.

 

과거 인터뷰에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후배 양성에 기여하고 싶다는 얘기를 자주 해서 대학원 공부는 그 길로 나아가는 단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대학원에 간다니까 주변에서 다들 ‘교수하게?’라고 물어보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번에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깨달은 건,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이에요. 저는 고등학생 때 데뷔해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대학생 시절 공부에 소홀했고, 교수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몰랐어요. 일찌감치 데뷔해서 활동하는 내가 최고인 줄만 알았죠. 근데 내가 연기를 잘하는 것과 누군가 연기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더라고요. 제가 너무 자만했어요.

 

데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열아홉 살 때 <렌트>의 주연 미미로 데뷔한 이야기가 지금도 뮤지컬계에 전설처럼 전해지잖아요.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대극장 뮤지컬 오디션을 볼 생각을 했어요? 

<렌트> 오디션이 있기 훨씬 전부터 뮤지컬배우를 꿈꿨어요. 당시 제가 다니고 있던 학교는 예술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0교시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이 있었는데, 저는 날마다 야간 자율 학습에서 빠지고 댄스 아카데미에서 밤늦게까지 춤을 췄어요. 그리고 다음 날 늦게 학교에 갔죠. 엄마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엄마가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주셨거든요. 그때는 뮤지컬이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인기 있지 않고 뮤지컬 학과도 흔치 않았기 때문에 저는 특이한 애 취급을 받았어요. 주변에 가수를 꿈꾸는 친구는 있어도 뮤지컬배우를 꿈꾸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요. 제가 애들한테 내 꿈은 뮤지컬배우라고 하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던 게 기억나요. 또래 중에 저 같은 애가 없었기 때문에 오디션에서도 눈에 띈 것 같아요.

 

<렌트>를 공연한 2002년은 지금보다 성 소수자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았던 때잖아요. 게다가 스트립 댄서이자 마약 중독자이자 에이즈 환자인 미미는 당시로선 생소한 캐릭터였을 텐데, 고등학생이 이 작품을 이해하고 연기했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라워요.

이해도 못하고 연기도 못했죠. 물론 그땐 내가 잘하는 줄 알았지만! (웃음) <렌트>가 국내에서 초연한 게 2000년인데,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저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2층 첫 줄에 앉아 그 공연을 봤어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고등학생인 저에게 <렌트> 같은 파격적인 공연을 보여줬다는 게 놀랍죠. 그날 공연을 보고 <렌트>의 음악에 푹 빠졌어요. 지금이야 유튜브로 쉽게 공연 영상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때는 제작사인 신시컴퍼니 이름을 검색해야 겨우 <렌트> 음악을 찾아 들을 수 있었어요. 전 그걸 계속 틀어놓고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 정보가 뜨기 전부터 노래를 다 외우고 있었죠. 오디션을 볼 때는 미미처럼 파마머리를 하고 속눈썹까지 붙이고 갔어요. 대표님이랑 심사위원분들이 지원서를 보고서야 고등학생인 걸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생각해도 그 열정이 대단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데뷔해 갑작스레 주목을 받으면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첫 작품부터 단숨에 대극장 뮤지컬 주연으로 발탁되었으니 이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을 법한데요. 

모두가 절 예뻐하지는 않았겠죠. 근데 그때는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을 안 썼어요. 무대에 서는 게 마냥 좋고 즐거웠거든요. 절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있었다 한들 전혀 몰랐을걸요? 성인이 되어 다른 작품을 하나둘 맡고 나서야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어요. 함께 공연했던 선배 배우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으니까요. 2002년 <렌트>에서 제 상대역이었던 로저 역의 이건명 오빠만 해도 저랑 띠동갑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마음 편하게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없었죠. 그래서 한 살 차이였던 김호영 오빠한테 진짜 의지를 많이 했어요. (2003년 발행된 <더뮤지컬>에도 정선아 씨와 김호영 씨의 첫 인터뷰가 나란히 실려 있더라고요.) 맞아요, 그랬죠! 호영 오빠도 저처럼 2002년 <렌트>로 데뷔했는데, 당시 오빠는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는데도 힘든 점이 많았다고 해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등학생이라 스트레스를 안 받았나 봐요. 누가 뭐라 해도 흘려듣고. (웃음) 멋모를 때는 자신감이 하늘 끝까지 닿았는데, 오히려 경력이 쌓이고 아는 게 늘어나니까 무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겠더라고요.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저도 나이를 먹을수록 겸손을 배우고 있어요.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

 

한동안 ‘한국의 비욘세’라는 별명이 따라다녔을 만큼 정선아 하면 섹시하고 파워풀한 디바의 이미지가 떠올라요. 배우로서는 한 가지 이미지로 고정되는 게 부담될 수도 있는데, 혹시 이런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요? 

저는 항상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처럼 거칠고 에너지 넘치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런 역할이 노래도 드라마틱하고 연기도 재미있더라고요. 그렇지만 매번 비슷한 캐릭터만 맡았던 건 아니에요. 지금 제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이다>의 암네리스와 <위키드>의 글린다도 당시로서는 모험이었어요. 그 전까지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였던 제가 사랑스럽고 코믹한 캐릭터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캐릭터거든요.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선교사 사라를 연기한 것도 새로운 시도였죠. 물론 이지나 연출님이 그 역할을 제안했을 땐 ‘네에?’ 반문했지만 (웃음) 제 안의 다른 면을 알아보고 끌어내 주셔서 재밌게 연기했어요. <드라큘라>의 미나도 차분한 귀족 아가씨라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내면에 강인함이 있고, 음악 또한 파워풀해서 의외로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모차르트!>의 콘스탄체나 <킹키부츠>의 로렌처럼 비중이 크지 않은 역할을 맡아 빛나는 존재감을 보여주기도 했죠. 

제가 <킹키부츠>의 로렌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다들 놀랐어요. 왜 주인공이 아닌 역할을 맡으려고 하느냐는 사람도 있었고요. 저는 사람들이 그런 얘길 하는 게 더 의아했어요. 아니, 내가 하겠다는데 왜들 그러세요? (웃음) 저는 그때그때 저에게 재밌게 느껴지는 역할을 고른 거예요. 남들이 뭐래든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성격이거든요. 말씀하신 <모차르트!>와 <킹키부츠>는 모두 국내 초연 때 참여한 작품이기도 해요. 저는 초연이 좋아요. 아무리 해외에서 들여온 라이선스 뮤지컬이라 해도 한국에서 한국말로 연기하는 건 새로운 일이잖아요. 처음이라는 설렘 속에 고민하며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즐거워요.

 

대표작 <아이다>와 <위키드>는 여러 시즌에 걸쳐 참여했어요. 마음만 먹으면 더 다양한 작품을 경험할 수 있을 테고, 어쩌면 과거의 자신과 비교당하기보다 박수받으며 떠나는 게 속 편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여러 번 같은 역할로 돌아온 데에는 나름대로 소신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인터뷰에서 ‘박수칠 때 떠나겠다’는 철없는 말을 남발했던 시절이 있어요. 그때는 나이를 먹으면서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있다는 걸 몰랐어요. <아이다>의 암네리스는 이번 시즌까지 세 번을 연기했는데 똑같은 역할이지만 시기별로 느껴지는 게 정말 달랐어요. 물론 나이를 먹으면 성량이나 체력은 전과 달라질 수 있죠. 그럼에도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최정원 선배님처럼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간 분들을 보며 느껴요. 무대에서 가슴으로 관객을 울리는 게 고음을 더 시원하게 지르고, 호흡을 더 길게 끄는 것보다 훨씬 멋지더라고요. 이제 저도 무대 위에서 정말 멋있는 게 뭔지 깨닫는 나이가 된 듯싶어요.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 크고 빛나는 왕관을 쓰시는 선배님을 보면서 아, 나도 저런 배우가 되어야겠다 다짐해요. 그러니까 제가 더 깊은 향기를 내는 배우가 되면 시간이 지나 같은 역할을 연기했을 때 관객은 더 열광해 줄 거라고 믿어요. 

 

<아이다> 초연 당시 암네리스가 아닌 아이다로 오디션을 봤다가 고배를 마신 일화가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지난 시즌에는 거꾸로 제작사로부터 아이다 역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면서요?

맞아요, 근데 제가 암네리스를 고집했어요. 욕심을 냈다면 암네리스와 아이다 둘 다 연기해 본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겠죠. 평소 도전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아이다가 부르는 노래도 정말 좋아해요. 하지만 디즈니 씨어트리컬이 전 세계에서 <아이다> 공연을 종료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번 시즌이 마지막 공연이 되었잖아요. 제 인생 마지막 <아이다>를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암네리스로 함께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으로 암네리스를 깊이 있게 연기하고, 멋지게 보내주고 싶었죠. 그리고 관객들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암네리스로 기억되고 싶었어요. 

 

<위키드>의 글린다도 지금은 찰떡 캐스팅으로 언급되지만, 정선아 씨가 그 전부터 꿈꿔 왔던 역할은 엘파바라고 들었어요. 아이다에서 암네리스로, 엘파바에서 글린다로, 욕심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옷을 찾기까지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나요?

어렸을 때라면 고집대로 했을지도 모르죠. 2005년 <아이다> 초연 오디션에서 연출님께 ‘더 나이 먹고 암네리스로 오디션을 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속으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으니까. (웃음) 근데 직접 공연을 보니까 암네리스가 나에게 더 어울리겠다는 감이 오더라고요. <위키드>의 글린다도 대본을 보기 전까지는 생각조차 안 했던 역할이에요. 막연히 성악을 전공한 배우만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아무래도 <위키드>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는 엘파바의 솔로곡인 ‘Defying Gravity’잖아요. 그때만 해도 연기보다는 무대 위에서 유명한 노래를 부르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 노래가 좋다,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고 싶다 생각하며 주구장창 그 곡만 연습했죠. 그런데 나중에 전체적인 대본을 읽어 보니 글린다가 제 성격과 잘 맞겠더라고요. 시험 삼아 글린다의 솔로곡 ‘Popular’를 연습해 봤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바꿨어요. 옳은 선택이었죠. 제가 <위키드> 오디션 때 짧은 치마를 입고 악보를 안고 오디션장에 들어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거의 넘어질 뻔했거든요. 으아악 하면서 악보가 사방으로 파라락 날아갔는데, 연출님이 더 볼 것도 없다고, 쟤가 글린다라고 하셨대요. (웃음) 

 

<위키드>는 한국에서 공연되기 전부터 줄곧 ‘꿈의 뮤지컬’로 여러 번 언급했던 작품이에요. 캐스팅 당시 인터뷰에서 ‘이제 꿈을 다 이뤘다’고 말했을 만큼이요.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목표로 삼은 것을 손에 넣은 뒤 지향점을 잃은 듯 공허해하거나 방황하기도 하는데, <위키드> 이후는 어땠나요?

<위키드>를 통해 무대 위에서 이루고 싶은 건 정말 다 이루었어요. 유명하고 좋은 노래를 실컷 불렀고, 예쁜 의상도 원 없이 입었어요. 무엇보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글린다의 서사가 마음에 들었어요. 대본이 워낙 잘 짜여 있어서 제가 억지로 감정을 쥐어짜내지 않아도 진심으로 빠져들어 연기할 수 있는 배역이었죠. 이 역할로 관객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은 건 물론이고요. <위키드>로 더없는 행복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마친 뒤 공허해지기는커녕 여유가 생겼어요. 마음에 여유가 있으니까 어떤 무대에 서도 행복하고 즐거워요. <위키드>를 공연한 뒤 노래 욕심이나 의상 욕심이 하나도 안 나요. 그래서 이후에 <킹키부츠>의 로렌을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저한테 <위키드>는 큰 선물이에요. 언제든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지는 작품이죠.


 

혼자보다 함께 빛나는 무대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에 다시 연기해 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첫 번째는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요. 왜냐하면 제가 올해 결혼을 했잖아요. 코로나19 때문에 아직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요. 어쨌든 안나는 불같은 사랑에 끌리면서도 남편과 아이 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갈등하는 여자이니까, 실제로 유부녀가 된 지금 연기하면 또 다른 감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보디가드>의 레이첼! 레이첼은 가수 역할이기 때문에 다른 뮤지컬과 다르게 마치 콘서트를 하는 듯한 색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마지막 커튼콜에서 관객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소통하는 게 너무 신나더라고요. 사실 초연을 앞두고 그 유명한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한국어로 불렀을 때 과연 관객분들이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 주실까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커튼콜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기시는 모습을 보니 기뻤어요. 게다가 보통 뮤지컬 객석은 젊은 관객들로 채워지는데, <보디가드> 때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장년층까지 극장을 찾아 환호를 보내주셨어요. 그분들이 익숙한 노래를 들으며 옛 추억에 잠기셨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고 뿌듯했죠. 아직도 커튼콜 때 즐거워하던 관객들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 지금 말하면서 떠오른 건데 나이를 좀 더 먹으면 <맘마미아!>를 해도 좋겠네요. <맘마미아!>의 도나도 위시 리스트에 넣어놓겠습니다. (웃음) 

 

개인적으로 2007년 <해어화>, 2012년 <광화문연가>, <쌍화별곡>, 2018년 <웃는 남자>를 제외하면 창작뮤지컬 무대에서 자주 보지 못한 게 아쉬워요. 물론 그동안 정선아의 당당한 이미지에 어울리는 여성 캐릭터가 창작뮤지컬에 별로 없었지만요. 

저도 왜 그런지 궁금한데, 저한테 창작뮤지컬 대본이 거의 안 들어와요. 아마 제가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에 주로 참여했기 때문에 창작뮤지컬은 당연히 안 할 거라고 짐작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많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지만, 저도 창작뮤지컬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규모가 작더라도 탄탄한,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한 창작뮤지컬에 참여하고 싶어요. 지금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소극장 공연도 다양하게 보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올해 공연한 창작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도 재밌게 봤고요. 관객으로서 소극장 창작뮤지컬을 보는 건 참 즐거운데, 배우로서 익숙하지 않은 무대이다 보니 선뜻 뛰어들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제가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만 하겠다고 선을 긋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니까, 언젠가 저에게도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길 바라요. 

 

<아이다>의 ‘My Strongest Suit’를 비롯해 정선아 씨가 부른 뮤지컬 넘버는 뮤지컬배우 지망생 사이에서 오디션 곡으로 인기를 끌기도 했어요. 물론 원래도 유명한 뮤지컬 넘버이지만, 정선아를 롤모델로 삼는 후배가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죠.

제가 워낙 어릴 때 데뷔했고, 뮤지컬로 시작해 외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저처럼 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 친구들을 만날 때면 내가 어릴 때에 비해 많은 학생들이 뮤지컬배우를 꿈꾸고 있구나, 한국 뮤지컬 시장이 정말 많이 커졌구나 실감하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들이 부푼 꿈을 안고 발을 들인 이 뮤지컬계에서 실망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공연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어요. 저는 한국 뮤지컬의 화려한 부흥기 속에서 성장한 배우예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죠. 뮤지컬 시장이 위기를 맞은 게 비단 올해 시작된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그동안 너무 많은 작품이 충분한 준비 없이 무대에 오르면서 겉으로만 크고 화려한 시장이 된 게 아닌가 돌아보게 돼요. 지금이 한국 뮤지컬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실을 다져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제작사와 배우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해야죠. 

 

그동안 뮤지컬배우로서 남부럽지 않은 길을 걸어왔는데,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예전에는 서른에는 뭘 하고, 마흔에는 뭘 하겠다 같은 원대한 꿈이 있었는데요, 지금은 아주 소소한 것들이 다 소중해졌어요. 매일매일 아무 문제없이 공연이 올라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코로나19를 통해 새삼 깨닫고 있거든요. 코로나19로 동료들 얼굴 보기가 힘들어 전화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들 코로나19 걱정 없이 공연하던 때가 그립지만 이 시기를 통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고 얘기해요.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 해도 코로나19로 공연이 취소되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 자연히 겸손해져요. 또 프로덕션에 속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도 코로나19에 걸리면 무대는 멈춰야 해요. 공연은 나 혼자 잘나서 가능한 작업이 아니라 모두 함께해야 가능한 작업이라는 걸, 우리 모두는 한 팀이라는 걸 실감하게 하죠. 저 역시 불안에 떨며 공연 중인 다른 동료 배우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챙기게 되더라고요. 모두에게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지만, 어쩌면 이 시기가 뮤지컬이라는 울타리 안에 모인 사람들끼리 우애를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각자도생하기 바빴다면 이제는 힘을 합쳐 미래를 도모해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고 할까요. 나중에 이 모든 위기가 지나간 뒤에도 지금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며 매사에 감사하고 서로에게 끈끈한 뮤지컬계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그런 희망을 꿈꿔 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6호 202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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