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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디아길레프> 아름다움의 제단 앞에 선 괴물 [No.209]

글 |김영주(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2-08-30 1,177

<디아길레프>

아름다움의 제단 앞에 선 괴물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전설적인 발레단 발레 뤼스를 만들고, 발레를 종합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유럽은 이 천재 제작자가 만들어낸 낯설고 매력적인 ‘러시아’라는 세계에 열광했다.

 

 

가장 뛰어난 발레 제작자가 되기까지


디아길레프는 애초에 예술가가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재능 없는 음악도였다. 부유한 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완고한 아버지와는 딴판으로 풍부한 미적 감수성을 가진 아이였다. 그의 천성을 알아보고 예술에 대한 사랑과 안목을 북돋아 준 사람은 새어머니 엘레나 파나에바였다.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음악에 쏠려 있었다. 실제로 당대에 저명한 작곡가였던 림스키 코르사코프에게 사사하였는데, 엄격한 스승은 디아길레프에게 음악가로서 재능이 전무하니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했다. 코르사코프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디아길레프는 예술가가 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대신 이십 대 중반에 예술 전문지 『예술세계』를 성공적으로 창간해 황실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디아길레프가 서구 문화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어린 시절 스승인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파리에서 공연하면서부터다. 공연은 성공했지만 재정적인 문제가 있어서 오페라보다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드는 발레로 선회했는데, 이것이 디아길레프가 이끈 발레단 발레 뤼스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그는 발레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도 발레는 좋게 보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즐거운 여흥, 나쁘게 보자면 ‘지적인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동등하게 볼 수 있는 정신적인 수고가 필요 없는 볼거리’로 폄하되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지만, 이 말은 젊은 시절의 디아길레프의 발언이다. 발레를 존중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가장 뛰어난 무용수와 안무가, 작곡가,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를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잇달아 걸작을 만들어 낸 그 안목과 수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디아길레프의 등장 이후 발레의 위상은 음악과 미술, 문학, 춤이 함께하는 종합예술로 높아졌다. 디아길레프는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미하일 포킨, 바츨라프 니진스키, 레오니드 마신 그리고 의상 디자이너 레온 박스트와 함께 <불새>(1910) <세헤라자데>(1910) <목신의 오후>(1911) <봄의 제전>(1913)을 만들었다. 

 

 

탐미적인 삶의 비극


유럽 활동 초기에 디아길레프는 선진 유럽에 러시아 문화를 선보이고 싶었던 로마노프 황실의 후원을 받아 활동했지만(공교롭게도 ‘피의 일요일’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황제의 숙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그의 후원자였다.) 이후에는 매너리즘에 빠져 쇠약해진 유럽의 예술계가 먼저 그의 ‘러시아’를 필요로 했다. 파리로 상징되는 극도로 섬세하고 세련된 우아함에 지쳐 점점 노쇠해 가던 유럽은 원시적인 에너지로 들끓는 화려한 러시아 문화에서 새로움을 찾았기 때문이다. ‘디아길레프는 외국인들을 위해 러시아를 발명했다’는 코코 샤넬의 평가에는 놀라운 통찰이 담겨 있다. <불새>와 <세헤라자데>처럼 당대 유럽인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는 신선한 작품들은 무리 없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유럽의 예술계는 물론이고 패션계와 사교계에서까지 러시안 스타일이 가장 핫한 트렌드가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 미술과 신화에 바탕을 둔 <목신의 오후>와 21세기 관객의 시선으로 보아도 충격적인 원시 부족의 인신 공양을 춤으로 그려 낸 <봄의 제전>에 이르자 세상이 뒤집혔다. 당대 유럽의 문화 수도를 자처하는 프랑스 파리에서 그저 여흥거리로 취급받았던 발레는 단박에 가장 전위적인 장르가 되었다. 디아길레프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봄의 제전>은 작품의 지지자와 반대자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질 정도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의 안무가는 전설적인 무용가 니진스키이다. 니진스키와 디아길레프의 관계는 그 후 레오니드 마신, 세르주 리파르에게서 똑같이 반복된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원숙한 성인 남성이 미성숙한 소년에게 애정을 주면서 그의 재능을 꽃피우고 성장시키는 전형적인 그리스식 사랑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선언하고도 사회에서 매장당하지 않고 인정받은 최초의 위대한 동성애자’이자 평생을 탐미적이었던 디아길레프가 매번 그런 식의 사랑을 한 것은 놀랍지 않다. 다만 문제는 그가 끝까지 ‘그리스식’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현자들과 달리 어리고 미숙한 연인들이 주체성을 갖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언제나 철저하게 상대를 구속하고 고립시켰으며 그들이 견디다 못해 다른 여성 무용수와 비밀 연애라도 하려고 하면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해서 온갖 모욕과 공격을 퍼부었다. 당연히 관계는 매번 파국으로 치달았다. 디아길레프가 자신을 떠나 헝가리 귀족의 딸과 결혼한 니진스키의 커리어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어떻게 니진스키의 삶을 광기 속에 갇히도록 몰아갔는지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가지는 명확히 해 두고 싶다. 디아길레프는 예술 세계에서 자신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성취할 수 있었던 방식과 실존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를 아름답게 지켜 나가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끝내 배우지 못했다. 그는 위대한 예술을 세상에 끄집어내고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꾼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랬다.


말년의 그는 공연 제작을 완전히 포기하고 희귀 고서 수집에 몰두한다. 물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예언 때문에 평생 배 타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그가 숨을 거둔 곳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였다. 장례식을 치를 돈이 없어서 친구 코코 샤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디아길레프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작가 장 콕토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괴물, 이것은 신성한 괴물, 기적이 일어나야만 삶에 만족한 러시아 왕자.” 그는 괴물이었지만, 우리는 이 괴물에게 아름다움을 빚지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9호 202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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