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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난세> 최석진, 확신과 의심의 경계에서 [No.213]

글 |이솔희 사진 |맹민화 2022-09-28 2,360

<난세> 최석진
확신과 의심의 경계에서

 

“무대 위에서는 확신을, 무대 아래에서는 의심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죠.” 확신과 의심을 무한히 반복하며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해 온 최석진이 <난세>를 통해 또 한 번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이번에 그가 그려낼 인물은 잔혹한 면모를 지녔지만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이방원이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확신과 의심의 경계에 서 있는 지금, 최석진은 어떤 각오를 품고 있을까.

 

 

수많은 질문 끝에 찾은 답


최근 막을 내린 <더 테일 에이프릴 풀스>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미오 프라텔로>, 개막을 앞둔 <난세>와 <비더슈탄트>까지. 석진 씨는 최근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로 손꼽히잖아요. 배우에게는 다양한 캐릭터로 관객을 만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텐데, 요즘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나요?
요즘 제 하루는 정말 공연으로 가득 차 있어요. 연습실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공연 중인 작품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매일매일이 즐거워요. 물론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그걸 뛰어넘을 만큼 행복해요. 배우는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공연하는 순간이 진심으로 행복하거든요. 저는 배우 활동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연기가 제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쉼 없이 무대에 서지 못 할 거예요.

 

<난세>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이야기를 다룬 초연 창작뮤지컬이에요. <난세>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 출연을 결심하게 됐나요?
보통 역사극은 픽션이 가미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가상의 인물이 나오거나, 갈등 구조를 심화해서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거나. 그런데 <난세>는 사건의 순서가 조금 바뀌는 정도를 제외하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요. 그래서 실존했던 인물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관객분들 입장에서도 정도전과 이방원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드라마틱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더 깊숙이 와닿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뿐만 아니라 함께 호흡을 맞추는 배우, 스태프들 모두 제가 신뢰하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출연을 마음먹게 된 이유 중 하나예요. 특히 연출부터 극작, 음악까지 모두 소화하신 김은영 작곡가님에 대한 믿음이 컸죠.

 

최석진이 생각하는 이방원은 어떤 인물인가요?
아무래도 실존 인물이다 보니 제 해석을 덧붙이는 게 조심스럽지만, 저는 이방원이 권력욕에 눈이 먼 인물로만 그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만을 지닌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여말선초라는 정치적 격동기를 겪은 인물이잖아요. 난세 속에서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자신이 이 난세를 끝내고 백성을 잘 보살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해 왕이 되는 것을 꿈꿨다기보다는, 백성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왕의 자리를 꿈꾼 거죠.

 

<난세>는 이방원보다 정도전의 이야기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방원의 숨겨진 서사를 잘 보여주기 위한 고민이 깊었을 것 같아요.
제가 이번 공연에서 가장 경계하는 점은 이방원이 정도전에게 외면당해 울분을 터트리는 모습이 설득력 없이 그려지는 거예요. 그 과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이방원이 일차원적으로 보일 것 같거든요. 대본에 있는 것을 잘 표현해내는 게 배우의 몫이지만,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대본에 없는 부분까지 생각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도 배우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실존 인물을 연기할 때는 배경지식을 탄탄하게 쌓는 게 중요하잖아요. 우리나라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일수록 더더욱 그렇죠.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테이블 작업이 이렇게 수월했던 적이 없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 사회탐구 영역에서 국사와 근현대사를 선택할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시험에서 1등급을 받기도 했고요. (웃음) 그래서 정도전과 이방원에 얽힌 이야기는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오히려 고민이 깊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미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다 알고 있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흥미롭게 그려낼 수 있을까 걱정됐거든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인물을 무대에서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지 않아요?
맞아요. 이방원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창작자에게도, 배우에게도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연습하는 중에도 문득 ‘누군가 이방원을 이렇게 그려낸 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하지만 실존 인물을 제 해석대로 재창조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래서 <난세>라는 작품 안에서 이방원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이방원은 연민의 시선으로 봐야 하는 인물일까? 아니면 정의로운 정도전에게 위기감을 심어주는 인물로 그려져야 하는 걸까?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죠.

 

그 결과 어느 정도 해답을 찾았나요?
제가 표현하는 이방원이 관객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하지만 제게는 백성들을 위해 난세를 끝내고 싶었던 이방원의 마음이 가장 크게 다가왔어요. 분명히 분노를 터트리는 장면인데도 어느 순간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고요.

 

 

성실이 가져다준 성장

 

<난세>는 이방원과 정도전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석진 씨가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목표 의식이요. 저는 한 해의 계획을 미리 세운 다음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매일 목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해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많이 하는 편이죠.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흘러갈 때도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심지어는 쉴 때도 어떻게 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요. 그만큼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목표가 중요해요. 스스로를 옥죄는 성격이 가끔은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렇게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게 마음 편해요.

 

그럼 최근에는 어떤 목표 의식을 지닌 채 달려가고 있나요?
‘선한 성실함’을 가진 배우가 되는 거예요.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막연한 성실함이 곧 선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래요. 보통 ‘성실하다’는 단어를 생각하면 선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성실함이 선함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동안 매일의 목표를 가지고 성실하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더 나아가서 선한 성실함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또 하나 드는 생각이 있는데,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낸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막연하게 성실하고, 그저 결과만 생각하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냈죠. ‘지금 당장은 이렇게 힘들어도 버티다 보면, 공연이 성공적으로 올라가면 행복하겠지’라는 마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살아낸다’가 아닌 ‘살아간다’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새겨두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이제는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 속에서도 행복하고 싶어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건강한 내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러려고 노력해요.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야지’,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최근에는 SNS 계정을 없앴어요. 지금 내가 목표하는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SNS에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만 올라온다는 것도 알지만, 사람인지라 은연중에 남들과 날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여러모로 건강하게 지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2018년 <트레이스 유>를 기점으로 쉼 없이 활동한 지 어느덧 4년이 흘렀어요. 4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봤을 때 달라진 점이 있나요?
공연계에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 (웃음) 그러면서 저를 알아봐 주시고,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아졌죠. 그런데 사실 배우로서의 마인드에는 변화가 없어요. 삶에 안정감이 생긴다거나 차기작에 대한 고민이 없어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 불안해하는 건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대화를 나누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단단한 내면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어요?
가끔씩 흔들릴 때면 공연이 저를 붙잡아 주는 것 같아요. 내가 연기를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마음 때문에 힘든 경우가 많으니 그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죠. 개인적으로 매일 되새기는 말이 있는데, 배우는 무대 위에서는 확신을 가져야 하고, 무대 아래에서는 의심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무대에서 나 자신을 의심하며 연기할 수는 없으니까 무대에 있을 때만큼은 내가 하는 연기에 확신을 가지되, 공연이 끝나면 ‘내가 한 연기가 정말 맞는 걸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죠. 그래야 배우로서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뮤지컬배우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면요.
익숙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잊지 말자. 뮤지컬배우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모든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너무 익숙해져서 소중함을 잊게 되는 순간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더라고요. 사람이 늘 새로운 마음으로 살 수는 없어도,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은 꼭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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