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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BIOGRAPHY] <아르토, 고흐> 앙토냉 아르토, 잔혹한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No.226]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3-07-25 637

 

 

시인이자 극작가, 그리고 배우였던 앙토냉 아르토는 20세기 연극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잔혹 연극’으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아방가르드 연극의 뿌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예술 전반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과는 별개로 그는 평생 육체적,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받다 고독한 죽음을 맞이했다. 잔혹한 고통과 치열하게 투쟁했던 그의 삶과 유산을 되돌아본다.
 
 
 
고통과의 투쟁으로 점철된 삶
 
아르토는 1896년 9월 4일, 프랑스 남부의 항구 도시 마르세유에서 선장인 아버지와 튀르키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뇌막염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적이 있던 아르토에게 정신병의 징후가 처음 나타난 것은 열여덟이 되던 해였다. 유전성 매독의 영향으로 그는 갑작스러운 발작과 격렬한 신경성 통증을 경험했고, 이때부터 그의 삶은 죽을 때까지 기나긴 투병 생활로 점철되었다. 아르토는 정신 질환을 인정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며,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를 요구하곤 했다. 다량의 마약과 진통제를 스스로 투여한 아르토는 이로 인한 부작용으로 또 다른 약물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아르토는 연극과 영화, 멕시코와 아일랜드 여행 등 자신의 피폐하고 병든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시도하였지만, 언제나 그의 종착지는 병원과 요양원이었다. 1939년 빌에브라르 요양원을 시작으로 그는 장기간의 유폐 생활에 들어갔다. 몸과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아르토는 삶의 많은 시간을 요양원에서 지내야 했으나 이곳의 무료한 시간이 오히려 그를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극작을 하는 등 다양한 예술 창작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작업이 그의 치료에도 영향을 미쳐 한때 그의 병이 호전되기도 했다. 1948년 아르토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내장 출혈로 인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진통제를 주지 않는 의료진을 증오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약물을 복용한 터라 더 이상의 진통제 투약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죽음을 예감한 뒤에도 아르토는 창작 작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도 그는 원고와 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죽기 바로 전날에도 출판사 담당자와 만나 책에 대한 의논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침, 병원 관리자가 이미 사망한 아르토의 시신을 발견했다. 생전에 아르토는 결코 침대에 누워서 죽지 않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고 하는데, 마치 그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침대 다리에 기댄 채 앉아서 죽음을 맞이했다.
 
 
시와 연극, 영화를 넘나들다
 
육체와 정신을 갉아먹는 병마는 아르토를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오히려 그의 영감과 날카로운 정신을 단련하며 그를 예술의 길로 이끌었다. 아르토가 처음 예술적 재능을 발현한 분야는 시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항구에서 나고 자란 아르토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일찌감치 접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발달한 남다른 언어 감각은 열네 살 때 그가 친구들과 창간한 잡지와 여기에 발표한 시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신병이 발현하고 치료받기 시작한 뒤에도 아르토는 꾸준히 시를 쓰고 글을 지었다. 동시에 아르토는 1920년부터 극단에 입단해 배우로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아르토는 아틀리에 극단, 피토예프 극단 등을 전전하며 다양한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지만 극단과의 갈등과 건강 악화로 연기 생활을 순탄하게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극단에서의 경험과 작업에 대한 고민은 이후에 그의 연극 이론을 이루는 중요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한편 아르토는 영화에도 시나 연극에 못지않은 관심과 열정을 가졌고, 실제로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24년 전위적인 단편 영화 출연을 시작으로 아르토는 평생 <나폴레옹> <잔 다르크의 수난> 등 약 20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배우뿐만 아니라 영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로도 재능을 발휘했다. 여러 영화에 다양한 역할로 출연하긴 했지만 아르토의 배역은 대부분 단역에 그쳤다. 영화 속에서 아르토는 주로 반역자, 정신병자 등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당하는 인물을 맡아 연기했으며, 그들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와 삶의 고통을 드러냈다.
 
 
20세기 현대 연극의 선구자
 
시, 연극, 영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예술 작업을 이어갔지만 아르토의 흔적이 가장 깊고 선명하게 남은 분야는 역시 연극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진 서양 연극의 전통에 정면으로 저항하면서 연극의 본질을 변형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인물이었다. 아르토는 근본적으로 극적인 현실과 일상의 현실을 각기 다른 현실로 보았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극처럼 무대가 일상생활을 재현하거나 복제하는 것은 연극의 자멸 행위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무대가 실제의 삶과 분명하게 분리되는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으며, 교묘하게 인위적으로 재현될 때 비로소 진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그의 인식은 현대 연극의 연극성 개념과도 이어진다. 1932년 발표한 그의 저서 『연극과 그 이중』은 ‘잔혹연극론’이라는 중요한 연극 미학을 탄생시켰고, 이는 이후 제의 연극과 해체주의 연극 등 20세기 아방가르드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잔혹극’이란 용어는 한 문장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사유의 실마리로서, 창시자인 아르토를 비롯해 많은 연극인이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활용하면서 그 의미와 범주가 더욱 다양해졌다. 다만 이름에서 연상되는 단순한 폭력성, 신체적 잔인함의 묘사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굳어진 윤리나 체계, 인습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아르토가 추구했던 파괴는 단순히 부정하고 비난하는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전제 조건으로 한 파괴였다. 비록 아르토 자신은 스스로의 이론을 실제 무대 작업에서 구현하고 실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론은 이후 연출가 피터 브룩이나 장 루이 바로, 예르지 그로토프스키 등을 통해 20세기 아방가르드 연극의 큰 흐름을 만들어 냈다고 평가받는다.
 
*참고 자료 『아르또와 잔혹연극론』 박형섭 외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6호 2023년 7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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