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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BIOGRAPHY] 동지이자 연인, 그리고 뜨거운 동반자 - <22년 2개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No.229]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3-10-25 1,417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함께 살았던 기간은 2년을 채우지 못했고 검거 이후 옥중 결혼을 한 탓에 혼인 기간이라 할 만한 시기도 없었다. 게다가 가네코 후미코가 1926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을 다 합쳐봐야 5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짧은 만남은 두 사람의 일생에, 그리고 조선과 일본 양국에 결코 잊히지 않을 깊고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1919년 3월 1일, 모두가 벅찬 마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나가 만세를 부르던 날, 훗날 뜨겁게 만나 강력하게 이어질 두 남녀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조선의 피 끓는 청년 박열(본명 박준식)은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 후 더 큰 활동을 위해 일본으로 향한다. 한편 사생아로 태어나 조선의 친척 집에서 식모처럼 혹사당하고 있던 일본인 소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만세 시위를 보면서 독립을 향한 조선인들의 뜨거운 의지에 자신도 모르게 감동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일본에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우연히 알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뜨거운 영혼을 감지하고 곧 몸과 마음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파격적인 연애와 동거

 

첫 만남은 가네코 후미코가 적극적으로 박열에게 접근하면서 이루어졌다.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한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과 조선의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던 중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그의 비범한 정신과 기개에 한눈에 반해 다짜고짜 교제를 제안했다. 박열도 이 당당하고 당돌한 여인에게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후 두 사람은 도쿄의 한 작은 방에서 동거를 시작했는데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로맨틱한 동거와는 결이 다른, 파격적인 형태의 동거를 택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낭만적인 애정 관계가 아니라 같은 신념으로 뭉친, 철저한 동지 입장에서 교제를 시작했고 동거 중에도 이를 강조했다. 이는 그들이 함께 작성한 동거 서약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동등한 동지의 입장에서 동거하면서 한쪽의 사상이 변질되면 즉시 동거를 끝낸다는 조건을 명시했다. 1923년 두 사람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비밀 조직 ‘불령사’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무정부주의 활동을 시작한다. 이들은 천황 제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천황과 황태자를 제거할 폭탄을 입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이들의 운명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는 등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긴 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는 불안한 민심을 잠재우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이로 인해 많은 재일 조선인이 분노의 표적이 되어 살해되었다. 이 와중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불온한 사상범으로 체포되었고 심문 과정에서 그들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천황가를 해하려 한 대역죄로 기소당한다.

 

 

세기의 재판과 옥중 혼인 

 

박열 일당이 폭탄을 구입하려 한 건 사실이나 암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이들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들을 옭아맬 의도임을 간파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처음부터 죄를 인정하고 오히려 강하게 밀고 나갔다. 어차피 대역죄에는 사형이 구형될 것이 뻔했고 그럴 바에야 이 재판을 자신들의 신념과 사상을 세상에 알리는 장으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재판은 그야말로 매번 스캔들과 이슈의 현장이었다. 두 사람은 사모관대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와 시선을 사로잡았고 피고 측 발언을 이용해 천황 제도의 모순을 거침없이 비판하거나 무정부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신념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는 두 사람의 자유롭고 거침없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재판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어서 일제의 부당한 억압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국내외 기자들이 재판장에 벌떼처럼 몰려들어 취재 경쟁을 펼쳤고, 결국 일본 정부는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했다. 감옥에서도 두 사람의 믿음과 동지애는 변함없이, 오히려 더 굳건하게 이어졌다. 두 사람은 취조실에서 파격적인 포즈의 사진을 찍는가 하면 변호사를 통해 혼인 신고를 하고 옥중 결혼을 성사시켰다. 마지막 공판에서 두 사람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며칠 뒤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

 

이후 가네코 후미코는 다른 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향년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황의 감형에 불복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도 있고 일제의 암살설도 있으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아내였기 때문에 감옥에 있는 박열 대신 그의 형이 유골을 전달받았고 그녀의 생전 뜻에 따라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매장했다. 한편 박열은 22년이란 긴 세월을 복역하고 해방 뒤에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박열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귀환시키는 데 앞장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납북된 이후의 삶과 활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74년 세상을 떠난 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이 수여되었고 문경에 있는 생가터에 박열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때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단순히 사랑으로 엮인 연인이 아니라 같은 뜻을 품고 서로의 신념과 의지를 함께했던 동지이자 영혼의 파트너였다. 비록 함께했던 시간은 5년도 채 안 되고 그마저도 대부분 감옥에 갇혀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그들의 불꽃같은 삶과 사랑은 역사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한 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일본인은 단 두 사람인데 한 명은 가네코 후미코고 다른 한 명은 재판에서 박열과 후미코를 변호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라고 하니, 그들의 재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참고 자료 『대역죄인 박열과 가네코』, 김세중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9호 2023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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