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캔디는 ‘보호받을 줄만 아는 민폐 캐릭터’라는 비난을 주로 받는다. 하지만 이는 캔디가 아닌, 철저히 상대의 상황에 입각한 논리일 때가 많다. 캔디는 대체로 낯선 환경에서 곤경에 빠진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전 등장하는 상대는 캔디를 지켜봐 주는 대신 일방적인 도움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해결의 과정보다 결과에 집중한 서사가 캔디를 민폐 캐릭터로 만든다. 누군가의 수동성은 개인의 기질이기도 하지만, 환경적 영향도 짙다. 능동적 가능성이 물리적·정서적으로 지워졌을 때, 얼마나 많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캔디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것은, 뮤지컬 <시라노>의 록산이 주로 ‘캔디과 인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에드몽 로스탕 희곡의 여러 주제 중 록산을 둘러싼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드기슈의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극이 세 남성의 상황과 감정에 집중할수록, 관객은 그들의 시선을 투영한 이미지로 록산을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2시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록산을 향한 서로 다른 사랑, 폭압에 맞서는 저항의식, 전쟁의 비극을 담으려면 록산까지 돌 볼 여력이 없다. 그 결과 ‘사랑’으로만 재편된 록산은 눈치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판단되어진다. <시라노>는 2017년 초연 이후 여러 시즌을 거치며, 새로운 록산을 소개하려 부단히 애썼다. 그 결과 록산은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검술을 배운다. 하지만 작품의 서사가 ‘사랑의 행방’에 집중된 이상, 록산을 향한 오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냉정하게도 록산은 작품의 한계다.
그렇다면 우리는 록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역설적이게도 록산을 설명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조신함만을 원할 때, 록산은 내면에서 일어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좋아하게 된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과 그가 불편함 없이 군 생활을 하길 바라는 기원에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나 주저함, 가식이 없다. 사랑 앞에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록산은 또 다른 돈키호테다. 록산에게 문제가 있다면, 자신의 감정에만 몰두한 나머지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무례한 부탁을 이어갔다는 점에 있다.
그런 록산을 변화시키는 것 역시 사랑이다. 크리스티앙을 찾아 스스로 전장으로 나오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전방까지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 초연과 재연의 록산은 ‘애인’과 ‘아들’을 찾으러 왔다는 말로 검문을 피했다고 답한다. 이전 록산들의 전략이 개인의 선의에 기댄 감정적 호소였다면, 삼연의 록산은 세상의 이치를 파고든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이자 유일한 재산인 저택을 팔아 구입한 소금으로 등가교환을 시도한다. 세상 물정 모르던 온실 속 인물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을 지키는 전사가 된 셈이다.
록산의 성장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는 크리스티앙이라는 개인을 사랑함으로써 다른 세상을 만난다. 록산의 세계로 크리스티앙과 함께하는 가스콘 부대가, 전장에 있는 아군이, 전쟁이라는 비극에 희생되는 모든 인간이 흘러들어온다. 로맨틱에 국한된 사랑이 플라토닉의 사랑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록산이 베이커 라그노와 함께 크리스티앙을 찾아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록산의 선택에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넘어 고통을 같이 견디는 이들을 위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러 비극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에 나가지 못한 여인들이 몰래 밥을 지어 만든 주먹밥을 군복에 넣어주거나, 참사 현장의 한복판에서 전복죽을 끓여 나누는 일, 새로운 세상을 위해 거리에 모인 사람들이 사탕과 커피를 서로 건네는 장면들 말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타인들은 음식을 타고 연결된다. 검을 들고 직접 싸우는 이들 뒤에는, 다친 이들을 치료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록산은 더 넓은 의미의 사랑을 대표하는 존재인 셈이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강한 사랑이 변화와 연결을 만든다. 록산의 용기는 목숨을 담보로 매일 편지를 보낸 시라노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됐다. 기꺼이 움직인 록산의 행동은 자신으로 사랑받고자 하는 크리스티앙의 희생으로, 불리한 전세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투에 임하는 가스콘 대원들로까지 이어진다. 자신의 안위만을 고집하던 드기슈의 변화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대원들과 록산의 실천이 바탕이 됐다. <시라노>는 록산을 통해 ‘사랑’의 범위를 묻는다. ‘당신이 포용하는 사랑은 어디까지인가요.’ 지금의 사랑이 좁아도 괜찮다. 당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더 넓은 세상을 열고 더 다양한 사랑을 보여줄 테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활짝 문을 열고 그 변화를 편견 없이 마주하고 기꺼이 함께 흘러가 보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