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예술가들의 연인은 대체로 오해 속에 산다. 그들은 예술가의 희로애락을 함께하지만, 예술가의 성취를 독점했다고 비난받거나 사생활이 시대를 초월해 가십거리로 소비되기 일쑤다. 많은 것이 예술가의 입장에서 기술되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뮤지컬 <라흐 헤스트>는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던 김향안의 삶을 통해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예술과 사랑을, 예술과 삶을 온전히 분리할 수 있을까.
이상과 변동림, 김환기와 김향안에게 예술은 사랑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완성이다. 상과 동림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모멸과 수치심을 읽어내며 가까워진다. 환기와 향안은 서로의 글과 그림에서 고독한 영혼과 따뜻한 위로를 느낀다. 취향과 관점을 공유한 이들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수많은 ‘뮤즈’들이 예술가의 불안을 잠재우는 존재로 그려지고, 동림과 향안 역시 예술가의 곁을 지키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하지만 <라흐 헤스트>는 현상 너머의 것을 읽어내는 동림과 향안의 심미안에 더욱 주목한다. 동림은 소설의 다음 문장 앞에서 망설이는 상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고, 향안은 점과 선이라는 구조 안에서 환기의 깊은 그리움을 읽어낸다. 이상과 김환기의 예술 세계는 변동림과 김향안이라는 눈 밝은 첫 번째 관객에 의해 깊어진다. 이러한 섬세함에 화답하듯, 시인과 화가 역시 동림과 향안의 뮤즈가 되어 그들의 예술적 능력을 끌어내며 또다른 길을 연다. <라흐 헤스트>는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는 이들이 서로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성장을 돕는 모습으로 사랑과 예술을 증명한다.
<라흐 헤스트>에서의 사랑은 예술가로서의 동림과 향안을 발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인물의 심연을 향해 달려간다. 작품은 한 인물을 동림과 향안으로 나누고, 각자의 삶을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구성해 서로를 바라보도록 한다. 동림과 향안을 구분하는 요소 중 하나가 ‘후회’라는 감정이다. 물론 동림과 향안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동림의 태도가 ‘후회하지 않는다’라면, 향안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에 가깝다.
선택에 거침이 없고 단단한 마음으로 이상의 곁을 지킨 동림도 그를 동경에 혼자 보낸 일만큼은 괴로워한다. 함께하고픈 동림의 마음은 전달되지 못하고, 이상의 생은 끝난다. 하지만 이상의 죽음 앞에서 동림은 괴로울지언정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나간 일을 곱씹는 대신 찰나의 행복에 머무는 것으로 후회를 지우는 셈이다. 동림의 경험 덕분일까. 향안은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머뭇거리는 환기보다 먼저 움직이고, 그의 이름을 선택해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주도해나간다. 16시간씩 그림만 그리던 이에게 춤을 청하는 것도 향안이 이미 삶의 유한함을 아프게 감각했기 때문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향안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면 함께하는 순간을 찰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그렇게 사랑은 ‘나’를 읽는 예술이 되어 한 인간의 변화를 이끈다.
무엇보다 동림과 향안이 서로를 지켜보고 수시로 만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향안은 새로운 사랑을 주저할 때 가방 하나 들고 이상과 함께한 동림의 용기를 떠올린다. 사랑으로 상처 입은 동림의 마음을 읽어주고 위로하는 이는 향안이다. 동림은 향안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 자기 신뢰의 힘을 키워간다. <라흐 헤스트>는 과거와 미래의 만남으로 내면에서 생겨난 혼란의 원인과 결과, 해결방안 모두가 오직 자신에게 있음을 명확히 한다. 제 안의 상처를 마주하고 나를 비난하지 않고 스스로를 응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인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하는 용기에는 나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라흐 헤스트>는 말한다.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 누군가와 나눈 취향에도, 삶을 향한 의지에도, 나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그리움과 추억 안에도. 그렇게 사랑은 예술과 나의 삶에 남아 불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