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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보니 앤 클라이드> 김수빈 번역가, 작은 수첩에 적힌 문장들

글 |이솔희 사진 |이민옥 2026-02-06 100

 

2013년 뮤지컬 <스팸어랏>으로 번역 일을 시작한 김수빈 번역가는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를 비롯해 <비틀쥬스> <물랑루즈!> <킹키부츠> <렌트> 등 다수의 라이선스 뮤지컬에 재치 있는 말맛이 돋보이는 번역을 더해 작품이 한국 관객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다. 어느덧 13년째 번역가로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는 ‘배움’이었다. 아직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여전히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다는 김수빈 번역가는 인터뷰 현장에 포스트잇이 군데군데 붙어있는 작은 수첩을 지참했다. 손때 묻은 수첩에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부터 소설 속에서 발견한 문장,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위해 꼼꼼하게 적어둔 단어들까지, ‘배움’의 흔적이 가득했다.

 

2013년 <스팸어랏>으로 번역 작업을 시작했어요. ‘공연 번역가’라는 직업이 다소 낯설던 그 시절에, 이 일에는 어떻게 뛰어들게 되었나요.

대학 시절 교수님이 뮤지컬 업계에 계셨던 분이셨는데, 제가 수업 중에 외국 친구들에게 통역을 해주는 모습을 보고 '너 현장 일 좀 해볼래' 제안하셨어요. (웃음) 그렇게 처음에는 통역, 조연출로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러다가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요, 아무래도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현장에서 일하기가 녹록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번역 작업 제안이 들어왔어요. 그때만 해도 영역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아서 대본 번역은 작곡가 선생님들이 하시거나, 아니면 연출부 내에서 영어를 잘하는 누군가가 하는 게 일반적이었거든요. 그래서 한두 작품씩 번역을 하게 됐고…. 이렇게 '고인물'이 되었네요. (웃음)

 

이번에 새롭게 만난 <보니 앤 클라이드>는 2014년 재연 이후 11년 만에 다시 국내 무대에 올랐어요. 번역 작업을 할 때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나요.

라이선스 뮤지컬 번역을 할 때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와 적극적인 각색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보니 앤 클라이드>는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게 적극적으로 현지화하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모두가 알다시피 실존 범죄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어떠한 시선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고요. 김태형 연출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관객이 두 사람의 행적을 한 발짝씩 따라갈 수 있게는 해주되 이들을 범죄자로서 바라보는 시선도 놓지 않으면서, 관객이 어느 쪽에 이입할지는 관객의 몫으로 두고자 했어요. ‘보다 보니까 두 사람의 사연에 공감이 되네, 근데 내가 연민을 가지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같은, 어딘가 불편한 마음도, ‘이들이 한 행동은 그래봤자 범죄잖아. 이해 안 돼’ 같은 반응도 모두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죠. 블랜치나 보니의 엄마처럼 자신의 선과 소신을 지키는 사람들을 통해 ‘도덕적 나침반’을 놓아두는 작업도 정밀하게 했고요.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 블랜치라는 캐릭터가 머릿속에 각인되더라고요. 선함을 추구하는 블랜치는 마지막까지 클라이드와 보니, 벅의 범죄를 말리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공범 취급을 당하며 구속되는 허무한 결말을 맞잖아요. 블랜치라는 인물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요?

다른 인물들은 모두 죽음을 맞지만 블랜치는 살아남아 죗값을 치르게 되죠. 하지만 공연 초반부에 이런 질문이 등장해요. ‘감옥에 갔다 오면 정말 깨끗해지냐’고요. 감옥에 갔다 오면 죄가 씻겨 내려갈까요? 글쎄요. 심지어 블랜치는 처음부터 범행을 저지를 의도가 있었던 사람도 아니잖아요. 실제로 범행에 가담하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법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죠. 인물의 사정만 두고 봤을 때는 작품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하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법적 기준을 놓고 봤을 때는 죗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인 거예요. 관객은 그런 그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도, 마음이 불편하고 씁쓸할 수도 있죠. 보니, 클라이드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요. 명쾌하지 않은, 어딘가 복잡하고 찝찝한 감정으로 마무리되게끔 하는 게 이번 작업의 목표였어요.

 

이번 <보니 앤 클라이드> 번역과 각색을 하면서 11년 전 공연을 보셨던 분들이 느끼시기에 큰 변화는 아닐 수 있지만,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다시 잘 닦아서 재조립하는 작업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쁘띠 성형’을 하는 건데(웃음), 이전 시즌 공연을 보신 관객분들이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뭔가 더 재밌어!’라고 느끼실 수 있도록 큰 틀에는 변화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에 조금씩 변화를 주는 거죠. 저는 번역 작업을 할 때 대본 안의 감정의 비트값, 즉 감정의 덩어리를 설계해 놓는데, 그 덩어리는 같되 작은 변화들을 더하는 거예요.

 

각색 과정에서 원작의 창작진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듯합니다.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은 언제나 현지화에 대한 존중이 있어요. 다만 그 얘기는 많이 하셨어요. 1930년대 텍사스의 ‘모래 맛’을 내야 한다고요. (웃음) 그래서 해보겠다고, 너희의 그 ‘텍사스 감성’을 내보겠다고 했죠. (웃음) ‘텍사스 감성’을 내기 위해서 특정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등 우리의 언어로 선택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모래알 씹히는 애플 파이, 그와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초록색 사과의 존재가 그렇죠. 빨간색 사과가 아닌 초록색 사과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설익은 욕망을 의미해요. 그 오브제에 ‘텍사스 감성’의 서걱서걱한 느낌을 걸어주는 거죠. 또, 저는 각색 작업을 하면서 연출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편인데요, 이번 공연에서는 연출님과의 논의 끝에 삐걱거리는 마리오네트 같은 안무를 추가했어요. 보니와 클라이드를 제외하고 모두 운명에 묶인 목각 인형 같다는 점을 극작가인 아이반 멘첼과 프랭크 와일드혼 두 사람 모두 재미있게 보더라고요.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 역시 작품의 매력 중 하나죠. 특히 넘버 ‘보니’의 '낮에도 밤에도 보니 반가워' 같은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더라고요.(웃음) 번역을 통해 음악의 장르적 특징이나 라임 등, 음악적 측면을 잘 살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한국어는 영어보다 한 음절당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더 적잖아요. 그래서 제가 노래를 번역할 때 꼭 지키려고 하는 건 콘셉트를 확실히 잡는 거예요. ‘보니’는 클라이드가 보니에게 불러주는 세레나데예요. 편안한 상태에서 귀엽게 부르는 노래인 만큼 두 사람의 친밀감이 직관적으로 느껴져야 해요. 연인의 귀엽고 자연스러운 정서를 담으려면 말장난이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보니의 이름과 한국어 ‘보다’를 뜻하는 ‘보니’의 중의적 의미를 활용하고자 했어요. 노래를 부르는 배우의 특색을 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해요. ‘이 배우의 음색이 어떻지? 이 배우의 음역은 어떻지? 이 배우는 어떤 발음을 잘 구사하지?’ 이런 여러 사항을 고려하면서, 배우들이 이 넘버를 어떻게 부를지 상상하면서 번역을 해요. 배우만의 매력과 스타일이 잘 묻어날 수 있도록 이요. 그런데 사실 이 과정에서 저 혼자 무언가를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음악감독, 배우, 연출가 등 많은 분들과 계속해서 논의하죠. 그래서 ‘유연함’이 번역가에게 중요한 자질 중 하나예요. 어떤 것을 넣고 뺄 것인지, 이 대본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설계하고 디자인할 것인지 빠르고 유연하게 결정을 내려야 해요. 퍼즐을 맞추고, 바느질하는 것처럼 섬세하게 하나하나 조율해야 하죠.

 

또 하나 덧붙이자면, 번역가에게는 '총알 모으는 일'도 중요해요. (웃음) 이 작품에는 이 단어가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면 메모장에 적어두고, 책을 보다가 눈에 띄는 문장이 있으면 또 메모장에 적어두고. 그렇게 ‘어딘가에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단어와 문장들을 모아두면 소중한 자산이 돼요. 그러다가 새로운 작품 번역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작품과 어울리는 단어들을 쭉 써내려 가요. 그 작품만의 사전을 만들어 주는 거죠. 그때 모아두었던 '총알'들이 힘을 발휘해요. 막상 실제로 그 작품에 사용하게 되는 단어가 10%도 안 될지언정, 제가 모아둔 단어의 정서 안에서 완성 시키려고 노력해요.

 

 

 

번역가님이 공연 번역 작업을 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재미 아닐까요.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이긴 한데요. 뮤지컬은 상업 예술이고, 공연을 자주 보러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연례행사처럼 1년에 한두 차례 보러 오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렇기에 늘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 '재미있기' 위해서 창작진이 해내야 하는 많은 일이 있고요. 나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해선 안 되고, 작품 속에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관객이 잘 따라올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재미가 생기고, 관객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죠. 그러면 공연을 보고 난 후의 정서적인 변화도 따라올 거고요.

 

<보니 앤 클라이드> <비틀쥬스> <물랑루즈!> 등 번역가님의 손을 거친 다수의 작품이 현재 관객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번역가로서의 활약뿐만 아니라 작가, 드라마투르그, 다큐멘터리 감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직업인 김수빈‘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걸어갈 계획인가요.

우선 제게 꾸준히 일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고요. (웃음) 공연이 여러 차례 진행돼도, 관객의 입에서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때가 와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아요. '이 대사, 이 가사가 좋더라' 같은 반응을 넘어서, 관객분들이 제가 참여한 작품의 대사와 가사를 그냥 ’원래 그거잖아‘라고 받아들여 주시는 때가 되어야 그제야 작품이 혼자서 잘 서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처럼 잘 서 있는, 좋은 작품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는 건 저에게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번역이라는 게, 계속해서 기량을 키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새롭게 배우는 점이 있거든요. 일을 하면서도 늘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요. 또, 최근에는 번역 작업뿐만 아니라 극작 등 창작의 영역과 맞닿을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생겨서 더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제 영역을 넓혀서 다양한 분야를 배우고, 그러면서 시의성 있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지금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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