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임병근이 연극 <오이디푸스>를 통해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섰다. 인간의 운명과 선택에 대한 교훈을 전하는 비극적 영웅의 이야기 속에서 집단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코러스장’ 역을 맡아 작품의 중심을 잡고 있는 임병근. 운명처럼 돌아온 무대 위에서 그가 손에 쥔 선택지는 단 하나, ‘멈추지 않는 것’이다.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무대에 다시 서서 객석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저도 궁금했어요.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면 어떤 기분이 들지. 근데 <오이디푸스> 첫 공연을 딱 올렸는데, 그냥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실 되게 긴장될 줄 알았거든요. 근데 무대에서 첫발을 떼는 순간 저 자신도 놀랄 정도로 편안한 기분이 들어서, 그게 되게 감격스러웠어요. 아, 무대가 나한테 이렇게 편안하고, 소중한 공간이었지. 잊고 있던 감각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어요.
<오이디푸스>와는 어떻게 만났나요.
작품의 연출을 맡은 서재형 연출가님과 오랜 시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연출님이 처음 출연 제안을 주셨을 때는 사실 짧은 고민을 했어요. 공연을 오랫동안 안 하기도 했고, 이런 정극을 해 본 경험도 많지 않아서요. ‘내가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이내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가 또 언제 이런 정극을, 이렇게 멋진 선생님들과 함께 할 수 있겠나’라는 생각으로 바뀌더라고요. 그래서 설레는 마음으로 도전하게 됐어요.

공연의 시작을 코러스장이 장식하는데, 임병근 배우가 내뿜는 묵직한 에너지가 시작부터 관객을 압도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코러스장은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해설자 역할을 하는데, 관객이 코러스 장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우선, 말씀하신 것처럼 묵직한 캐릭터이다 보니 발성이나 목소리 톤에도 무게감을 싣고자 여러 가지로 신경 썼어요. 캐릭터에 대해서 연출님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요. 또, 코러장은 해설자 역할을 하는 동시에 오이디푸스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요. 연출님이 연습 초반에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코러스장은 창극의 도창 같은 역할이라고요. 그 설명이 코러스장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어요. 때로는 오이디푸스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이디푸스 그 자체가 되기도 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이야기를 해설하고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코러스장이 하는 거죠. 다만 한 인물이 그렇게 다양한 역할을 하는 모습이 관객분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해야 이 캐릭터가 작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나요.
코러스장이 곧 오이디푸스이기 때문일까요. 커튼콜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연출님의 아이디어인데요, 서재형 연출님이 워낙 <오이디푸스>라는 작품의 전문가이기도 하고, 원래 굉장히 디테일한 분이세요. 연출님의 대본을 보면 빈 곳이 거의 없어요. 본인의 고민이나 아이디어들을 한가득 적어 두시거든요. 코러스장은 커튼콜의 마지막까지 코러스장으로 남아 있어요. 그리고 퇴장할 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오이디푸스를 바라보죠. 그때의 저는 ‘너는 어떤 선택을 했니? 그 선택에 만족하니? 그 선택을 받아들였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코러스장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해요.

어느덧 공연이 끝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오이디푸스>를 어떤 마음으로 마무리하고자 하는지 궁금합니다.
서재형 연출님의 공연은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모든 장면이 완성된 상태로 시작하고, 배우들도 거기에 맞춰서 디테일하게 연습하거든요. 물론 공연을 여러 차례 소화하며 캐릭터로서 깊어지는 부분은 당연히 있지만, 마지막까지 처음의 완성도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자 해요. 무엇보다 저희 코러스 배우들이 많이 고생하고 있는데, 배우들 모두 마지막까지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많은 분의 사랑을 받으면서 공연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선택과 운명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운명적인 선택은 무엇이었나요? 또,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은 아무래도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거죠. 제가 연극영화과 강의를 하면서도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요. ‘이 길을 선택한 너희들은 굉장히 용감한 사람이고, 나는 너희들을 존중한다’고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직업을 선택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건 제 인생에서 너무나 큰 선택이자, 정말 잘한 선택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 길을 선택한 덕분에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느낀 순간은, <오이디푸스>라는 작품이 제게 다가왔을 때예요. 배우는 선택 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계속 이 일을 하면 좋겠지만, 선택받을 날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죠. 그래서 무대와 거리를 둔 기간 동안 앞으로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면서 이런저런 도전을 하고 있었는데, 운명적으로 <오이디푸스>가 찾아왔어요. ‘아, 이 운명을 피할 수 없나 보구나’ 싶더라고요. (웃음)

SNS를 통해 <오이디푸스> 출연 소식을 전하면서 이런 말을 했죠. ‘마지막 기회, 마지막 무대라 생각하고 준비하겠다’고요. 무대와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다양한 선택지와 수많은 고민이 병근 씨의 앞에 놓였던 거겠죠?
무대에 서지 않는 동안 현실적인 고민들을 많이 했어요. 배우를 넘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죠. <오이디푸스> 덕분에 오랜만에 무대에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이번 작품을 계기로 배우로서의 일이 계속 주어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로서 또 선택받는다면 언제나 그랬듯 제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야죠.
코러스장의 대사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결정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데요, 이제 앞으로의 길에 대해서는 정해두지 않고,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해요. 원래 뚜렷한 목표를 가지기보다는 그 순간 저에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거든요. ‘내 운명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어 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요. 앞으로도 그렇게, 저에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살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꿈꾸지 않더라도, 은연중에 ‘나 언젠가는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면 그 일이 이루어지더라고요. 배우 활동도 그렇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랬어요. 여담이지만, 벌써 10년 넘게 강단에 서고 있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제게 꽤 잘 맞더라고요.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제 수업을 좋아해 주는 학생들의 반응도 좋고요. (웃음)
근데 또 모르죠. 내년에는 제가 또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거고요. 단 하나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거예요. 계속해서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그저 내게 무엇이 주어지든 간에 꿋꿋하게, 나태해지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자는 의미죠. 그러다 보면 기회가 생기고, 길이 열리니까요.
공연의 마지막, 모든 운명을 마주한 오이디푸스는 자신 앞에 놓인 길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임병근 배우는 이제 어떤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싶은가요.
마라톤에는 반환점이 있잖아요. <오이디푸스>가 제 반환점이 되어준 것 같아요. 배우 인생의 긴 여정에서 반환점을 돌고, 이제 다시 또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선 지금까지 잘 걸어온 저 자신을 먼저 칭찬해 주고 싶어요. (웃음) 그래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도 지금까지 잘 걸어온 것처럼, 꿋꿋이 버텨내면서, 내게 주어진 선택지들 사이에서 잘 선택하고, 그 선택과 나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멈추지 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