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찾아낸 배우들]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배우의 숙명. 그 숙명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무대를 찾아낸 배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배우 크루 ‘움직이는 배우들’입니다.

배우는 늘 누군가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는 날을, 운명적인 작품을 만나는 날을 기다려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배우 크루 ‘움직이는 배우들’은 그 기다림 속에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2019년 시작한 ‘움직이는 배우들’ 팀에는 현재 30여 명의 배우가 속해있다. 필요에 따라 멤버들이 모여 공연과 영상 작업을 넘나들며 작업한다.
그 중심에는 배우 이유리가 있다. 뮤지컬 <유미의 세포들> <룰렛> <제이미> 등의 작품에 출연한 그는 ‘움직이는 배우들’ 팀의 총괄 디렉터로서 팀 작업을 진두지휘한다. 그는 팀을 시작하며 ‘움직인다’는 단어에 두 가지 의미를 담았다. 배우 스스로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움직임으로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나의 움직임, 내 춤과 노래, 연기로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까? ‘움직이는 배우들’은 이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로 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사회의 아픔을 위로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움직이는’ 배우이자 ‘세상을 움직이는’ 배우가 되자는 뜻을 팀 이름에 담았어요.” (이유리)
최근 ‘움직이는 배우들’은 이유리와 송창근, 김영웅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송창근은 <헬스키친> <베어더뮤지컬> <벤자민 버튼> 등의 무대에 올랐고, 김영웅은 <유미의 세포들> <킹키부츠> 등의 작품으로 관객을 만났다. 최근 세 사람은 뮤지컬 넘버를 재해석한 커버 영상부터 밈을 활용한 숏폼 영상 등 자체 제작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이며 무대 밖에 또 하나의 무대를 만들고 있다.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영상 콘텐츠를 팀 작업의 주춧돌로 세워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리는 “2019년부터 ‘이제는 영상이 내 명함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무대를 넘어 영상을 통해 더 많은 이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모습을 담는 그릇을 더욱 완성도 높게 제작하면 배우 개개인이 가진 가능성과 가치를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영상 작업에 자신이 가진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부었다. ‘움직이는 배우들’을 통해 선보이는 대부분의 영상은 이유리가 직접 기획하고, 숏폼 영상은 그가 직접 촬영과 편집까지 맡는다. 뮤지컬 넘버 커버 영상 등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작업은 전문 스태프를 섭외하여 진행하는데, 제작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 역시 대부분 이유리의 사비로 충당한다.
“물론 큰 비용이 들어가죠.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서 전혀 아깝지 않아요. 무엇보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저에게 너무 많은 에너지와 영감을 주거든요. 제가 멈칫하는 순간에도 이 친구들이 저를 끌어 당겨줘요. 동료들이 없었으면 ‘움직이는 배우들’도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저에게 많은 힘을 주는 제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저희 작업에 더 많이 투자하고 싶어요. 물론… 투자자분들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저희를 마음껏 고용해 주세요. (웃음)” (이유리)

‘움직이는 배우들’ 작업을 향한 세 배우의 애정이 영상에 고스란히 묻어난 덕분일까. <비틀쥬스> <렌트> <시카고> 등 뮤지컬 넘버 커버 영상이 인스타그램에서 알고리즘을 타며 40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고, 촬영 현장의 뒷모습을 담은 일상 영상은 500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며 ‘움직이는 배우들’을 대중에 알렸다. 그 덕에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공연 오디션 현장에서도 세 사람을 알아보는 이가 늘어났다고. 이유리는 “아버지가 등장한 일상 영상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는데, 심지어 저희 아버지를 알아보시고 인사해 주신 분이 계셨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걸 보고 효도한 기분이었다”고 웃음 지었다.
세 사람이 꾸준히 협업하는 배경에는 서로를 향한 두터운 신뢰가 있다. 취향도, 성격도, 작업 방식도 다른 세 사람이지만, ‘내 말이 언제나 정답은 아닐 수 있다’는 공통 가치관을 바탕으로 서로의 시야를 넓혀주는 존재가 됐다.
“제가 피사체를 사랑해야만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데, 이 두 친구는 정말 사랑스러워요. 반짝반짝 빛나고, 매력이 넘쳐요. 영웅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순수한 친구예요.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사랑스럽고요. (웃음) 창근이는 저와 죽이 잘 맞아요. 서로 되게 솔직하게 대하는데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아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색깔을 가진 친구여서, 더 많은 분이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희 촬영, 연습 스케줄이 말이 안 될 정도로 빡빡한데요, (웃음) 두 사람이 불평불만 한마디 없이, 오히려 제가 놓치고 가는 부분을 잘 채워주면서 따라와 줘서 정말 든든해요.“ (이유리)
“누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나요. 콘텐츠 기획에 재능도 있고요. 무엇보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촬영하고 편집을 할 정도로 작업물에 대한 애정이 커요. 만드는 사람이 그 과정을 즐기고 있기 때문에 결과물이 좋을 수밖에 없는 거죠. 배우가 직접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시대가 됐는데, 누나는 그 흐름을 발 빠르게 캐치해서 한 발 먼저 걸어간다는 게 참 대단해요.” (송창근)
“배우는 틀에 갇혀 있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유리 누나는 제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계속 밖으로 꺼내주는 사람이에요. 힘들어할 때면 늘 많은 응원을 해주고요. 이렇게 나를 믿어주는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제게 힘을 줘서, 그에 대한 감사함을 정말 많이 느껴요. 특히 <시카고> 록시 넘버 커버 촬영을 하기까지, 저는 여러 번 고민하고 망설였는데 누나는 적극적으로 추진했거든요. 그 영상이 큰 반응을 얻는 것을 보면서 ‘역시 누나를 믿고 따라야 하는구나’ 싶더라고요.”(김영웅)

서로를 향한 신뢰가 빛난 결과물 중 하나가 단편 영화 <관찰자들>이다. AI 시대의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생각을 스크린을 통해 전달한 작업이었다. 무대 공연을 주로 하는 배우들이었기에 영화 제작은 더없이 낯선 일이었지만, ‘해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협업을 시작했다. 제작팀을 꾸리고, 대본을 쓰고, 촬영 콘티도 직접 하나하나 그렸다. 무모한 도전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이들의 열정은 결국 15분 분량의 영화로 탄생되어 지난 4월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씨네마에서 관객을 만났다. 시사회를 위해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은 최종 목표액의 553%를 달성할 정도로 호응을 얻었다.
다음 발걸음은 세 사람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인 무대로 향한다. 오는 9월 7일 충무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뮤지컬 <팔림프세스트>의 리딩 공연을 선보이는 것. 지워진 과거의 흔적 속에 숨겨진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번 대본 역시 세 사람이 공동 창작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세 사람이 각각 캐릭터의 층위와 서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꺼내놓으면 이를 발전시켜 대본으로 엮는 방식이었다. 영상이 아닌 무대를 택한 이유도 분명하다. 꾸며내지 않은 배우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관객과 나누는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로를 극한으로 몰아넣고, 이를 통해 그간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무대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이야기도, 음악도 강하게 충돌하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팔림프세스트> 역시 공연을 앞두고 진행한 펀딩에서 목표액의 539%를 기록했다.
“<팔림프세스트>는 ‘우리 셋의 끝을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영웅이와 창근이가 연기적으로 끝까지, 기존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무대 위에서 보고 싶었어요. 작곡가님께는 ‘우리가 연기의 끝을 보여줄 테니, 작곡가님은 음악의 끝을 보여주세요’라고 부탁드렸죠. 그랬더니 정말 강렬한 음악이 나왔어요.” (이유리)
“음악이… 정말 어려워요. (웃음) 연습 스케줄도 녹록지 않았어요. 누나는 늘 ‘우리는 이걸 할 거야. 해야 돼.’라는 태도로 작업을 시작하거든요? 이번에도 그랬고요. 처음에는 ‘그게 되나?’ 싶다가도 누나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되게 어이없으면서도 뿌듯하기도 하고…(웃음) 그래서 이번 <팔림프세스트>는 제 배우 인생에서 절대 못 잊을 작업이 될 것 같아요.” (송창근)

선택받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자신의 무대를 찾아낸 경험이 배우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송창근은 “이제 배우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시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스스로 움직이면서 발견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움직이는 배우들’은 내가 계속해서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준다”며 “배우는 굉장히 외로운 직업이다. 무엇이 됐든 결국 스스로 부딪히면서 깨달아 나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움직이는 배우들’ 동료들이 큰 힘이 되어준다”고 말했다. 이유리는 “직접 부딪히고, 문을 두드린 경험이 제 시야를 넓혀줬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뀌게 해줬고, 꿈꾸던 것을 이루게 만들어줬다. 나만의 색도 찾게 해줬다. 배우라는 직업을 계속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길러준 셈”이라고 배우로서의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영웅은 “배우가 선택받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선택을 기다리면서 ‘나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깃발을 흔드는 작업’을 ‘움직이는 배우들’을 통해 했다고 생각한다. 저희는 ‘선택받기 위한 선택을 한 배우들’인 것”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세 사람은 앞으로도 따로, 또 같이 움직일 생각이다. 이유리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붓이 되고, 팔레트가 되고, 물감이 될 준비를 마쳤다. ‘움직이는 배우들’ 작업을 하며 창작자로서의 자세와 배우로서의 자세를 동시에 배웠다”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김영웅은 “관객분들의 입장에서 ‘이 배우의 성장이 기대되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꿈을 좇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희망했다. 송창근은 “저는 좋은 질문을 남기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래서 저 역시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에게 좋은 질문을 남기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