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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리뷰]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아버지를 죽이고 우리는 '아직도' 사랑할 수 있는가

글 |이주영(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오차드뮤지컬컴퍼니 2026-09-09 149

이주영 문화 칼럼니스트가 한 편의 뮤지컬을 심층 분석하는 리뷰를 연재합니다.


 

 

“난 썩지 않을 거야.”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표도르 혼령의 절규 같은 주장에 풋 웃음부터 나온다. 혼령이 되어서도 변치않는 ‘까라마조프적 기질(심연의 모순, 괘락, 충동을 상징)’이다. 표도르 역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말맛과 뉘앙스는 조금씩 달라지지만 기실 ‘똥고집’, 혹은 ‘땡깡’으로 와닿는다. 성자의 시신은 썩지 않는다는 원작 속 ‘편견’을 교묘하게 뒤튼 대사다. 신을 의심하는 이반과 신성을 비웃는 표도르가 극중에서 번갈아 언급하는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의 스승이자 진정한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 그런데 그의 시신은 예상과 달리 빠르게 부패한다. 성자의 육체는 썩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기적에 대한 기대를 뒤흔드는 원작의 문제적 사건을 표도르는 자신의 방식으로 비튼다. 〈난 썩지 않을 거야〉, 이 작품의 첫 번째 넘버이기도 하다.

 

보통 살해된 자의 유령이라면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부터 따질 터인데 표도르는 자연의 섭리부터 부정하고 본다. 썩지 않겠다는 첫마디는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또 한 번 상식을 뒤집는 대사와 수미상관을 이룬다. 마지막 넘버 〈우린 까라마조프〉는 표도르의 “누군가 날 죽였다면/지옥을 떠날 수가 있잖아/너희 중 하나라면 잘 갈게”로 마무리된다. 자신을 살해한 범인이 친아들이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웃어야 하는지 울컥해야 하는지 혼돈이 온다. 자신을 죽인 아들에게, 죽이고 싶게 아버지를 미워하는 아들들에게 미안함 한 스푼의 쿨함을 담은 기묘한 대사다. 극 초반의 유치하고 잔혹한 표도르를 돌이키면 의아한 극적 전환이다. 아버지 표도르를 죽였다는 오명을 쓰고 구속된 맏아들 드미트리가 억울함과 분노를 터뜨리는 넘버 〈아버지와 아들〉에서 두 사람은 막말을 주고받으며 대립한다. 마치 두 마리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모양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물어뜯는 형이하학적 장면이다. 친부자지간인데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싸운다. 드미트리가 살해범으로 지목될 만한 정황이기도 하다.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혼령이 되고도 한참 뒤에서야 표도르는 자식들에게 고통만 준 아버지였음을 자각한 걸까?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대사와 넘버, 군무와 전환의 숨 쉴 틈 없는 이어달리기

지난 5월12일부터 9월6일까지 4개월여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투자증권홀에서 상연된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김경주 극작, 오세혁 각색·연출, 이진욱 작곡·음악감독, 이현정 안무)는 거친 대사와 기호 같은 안무, 아크로바틱 같은 발작 연기,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넘버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친부살해로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운데 캐릭터들의 전사도 복잡하다. 신과 인간, 혈육 간 증오, 각자의 무의식이 씨줄 날줄로 엮이다 보니 정신 바짝 차려도 관객 입장에서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상황에 이르기 쉽다. 등장인물들의 러시아식 이름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원작을 잘 모르고 처음 접한 관객은 객석을 나서며 도대체 무엇을 체험했는데 이리 숨이 가쁜지 어리둥절해진다. 대사가 잘 안 들릴 정도의 격한 감정을 마주하다 웅장한 남성 5중창 〈우린 까라마조프〉를 마지막으로 극장을 나서면 검색부터 하게 된다. 원작의 캐릭터가 뮤지컬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넘버 가사는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되짚는다. 각자의 경험치에서 비롯한 통증과 연민, 지적 호기심을 부여잡고 관련 영상과 자료를 찾다가 원작 소설을 다시 읽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친자가 친부를 잔혹하게 죽이고 친형제끼리 증오와 고통을 거울처럼 반사하며 신과 자유, 죄와 사랑을 둘러싼 철학적 고뇌를 시적 가사로 접하니 늪처럼 빠져든다. 그 중심에 중독성 강한 넘버 〈헛소리〉가 단단하게 자리한다. 기호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한 군무가 절정에 이른다. 가사가 다 들리지 않아도 돌림노래 같은 〈헛소리〉에 오감이 전율한다.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보다 누가 더 아버지가 죽기를 원했는가를 묻는다. 네 형제가 각자의 욕망과 공포를 서로 다른 가사로 토해낸다. 처음에는 각자의 목소리였던 것들이 겹치고 침범하고 뒤엉키면서 어느 순간 누구의 욕망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하나의 거대한 소리가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마음,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자신의 혈통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까라마조프라는 이름에서 달아날 수 없는 몸. 독백들이 한꺼번에 충돌해 중창이 된다. 이 작품에서 중창은 화해가 아니다. 침범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욕망이 내 안으로 들어와 무의식을 거쳐 내 목소리로 발화된다. 반복해서 들을수록 ‘헛소리’가 아니다. 무의식의 둑이 터진 듯 진솔한 자기의 말들이다. 그 숨 가쁜 이어달리기가 돌연 멈추는 순간도 있다. 알료샤의 〈사랑을 하고 싶지만〉이다. 긴 암전 속에서 독백과 노래만 남는다. 숨이 막힐 만큼 채우던 작품이 이번에는 거의 모든 것을 지운다.

 

작품의 오프닝을 돌이켜보면 낯선 민낯이다. 기묘하게 공명하는 사운드를 배경으로 네 형제가 위압적으로 등장한다. 무대 중앙의 깊은 문에서 한 명씩 걸어 나와 장방형의 높은 단을 둘러싸고 각자의 공간 앞에 선다. 드미트리는 감옥, 이반은 집필실, 알료샤는 기도실, 스메르쟈코프는 지하실이다. 이들이 나온 중앙 문이 닫히면 거대한 십자가가 드러난다. 조명에 따라 청색과 적색, 백색으로 변하는 십자가와 여러 겹의 아치, 성상과 촛불, 러시아어 낙서가 빼곡한 벽돌 벽은 성당이자 지하 무덤이자 때론 법정으로도 기능한다. 그 한가운데 제단처럼 솟은 장방형 단은 표도르의 관이자 침상, 심판대이다. 죽은 아버지는 검붉은 가운을 걸치고 맨발로 무대를 떠돌며 그 위에 훌쩍 올라서고 드러눕는다. 손과 얼굴은 피투성이다.

 

이 장엄하고 음산한 죽음과 애도의 공간에서 네 아들이 처음 합창하는 것은 뜻밖에도 탄생의 축복이다. “그대를 배었던 배는 복되도다. 그대에게 양식을 준 거짓말도 복되도다.” 네 사람이 아버지의 관을 둘러싸고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린다. 낳은 것은 어머니의 몸인데 그를 먹여 키운 것은 ‘거짓말’이란다. 이내 “특히 헛소리가 가장 복되도다.” 몸은 경배하는데 입은 복음을 뒤튼다. 무대 한쪽에는 육체에서 빠져나온 듯한 표도르의 혼령이 웅크린 채 네 아들을 바라본다. 죽은 아버지 앞에서 탄생을 노래하는, 기괴한 오프닝이다. 조금 전까지 자기 장례를 구경하던 표도르는 영혼이 다시 몸으로 들어온 듯 불쑥 고개를 든다. 네 아들과 죽은 아버지의 기싸움 아닌 기싸움이 본격화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방대한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100여 분으로 벼려낸 이 뮤지컬은 죽음에서 출발해 탄생과 가족의 기원을 거꾸로 더듬는다. 원작 후반의 부친살해와 재판을 시작점으로 옮기고, 아버지 표도르와 네 아들 드미트리·이반·알료샤·스메르쟈코프를 남겨 각자의 성장과 욕망, 신성과 부성, 죄와 사랑을 다시 배열했다. 누가 죽였는가에서 누가 죽이고 싶었는가로, 행동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다시 신에게로 파고든다. 작품이 던지는 질문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재배치는 무대에서도 방향을 갖는다. 오프닝에서 네 아들의 시선과 팔은 거대한 십자가를, 하늘에 있는 신을 향하듯 위로 뻗는다. 질문을 따라 작품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들의 시선과 몸은 아래로, 안으로, 더 좁은 무대의 심부로 향한다. 신을 묻다가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를 파고들다가 가족의 기억에 닿고, 마침내 두 아이가 몸을 접고 웅크린 장롱에 이른다. 성당에서는 신을 향해 몸을 활짝 편 아들들은 장롱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원작의 사상과 기억은 벼려진 서사의 질문을 대변하는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표상화되었다. 넘버와 안무, 신체 움직임까지 숨 쉴 틈 없이 이 방향성을 향해 연동되며 심연을 파고든다. 이미 죽어 유령인 상태로 등장한 표도르는 어떤 궤적을 거쳐 “썩지 않을 거야”의 집착에서 “잘 갈게”의 쿨함에 이르는가. 방대한 원작을 섬세하게 벼려내 화제가 된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의 각 캐릭터들이 대오각성하는, 그러나 본질은 그대로인 까라마조프적 궤적을 넘버 중심으로 심층분석해보자.

 

2018년 200석대 소극장에서 초연한 뒤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다섯 번째 시즌인 올해에 들어서 화제작으로 급부상했다. 2023년 406석 극장에 이어 올해 490석 규모로 몸집을 키웠는데도 객석은 거의 매회 들어찼다. 단숨에 대극장으로 점프한 것이 아니라 재공연을 거듭하며 조금씩 관객층과 규모를 넓혀온 대학로 창작뮤지컬 특유의 성장 궤적이다. 매 시즌 반복해서 보는 웰메이드 작품이지만 올해는 좀 더 특별했다. 더 넓어진 극장에 주위를 가득 메운 가족 단위 관객들, 특히 청소년과 맨 뒷줄 자막석을 빼곡이 채우는 아시아 각국의 관객들 사이에서 도스토옙스키 원작의 힘을 새삼 실감했다. 시대를 거스르는 고전의 힘이 동시대에 전하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방대한 원작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렸기에 이런 국가와 세대를 아우르는 몰입이 가능한 걸까.

 

 

성당에서 장롱까지, 5부자의 무의식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2018년 초연부터 주목을 끌었던 웰메이드 작품이다. 방대한 원작의 철학과 컨텍스트를 뮤지컬 무대에 맞게 잘 벼려냈다는 호평 덕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사건을 걷어내고 아버지와 네 아들을 중심으로 부친살해, 신, 자유, 죄, 사랑이라는 중심 주제를 골라낸 뒤 몰입도 높은 뮤지컬 문법으로 재조직했다. 수백 페이지의 인물과 가족의 역사를 지나 살인과 재판에 이른 원작의 긴 호흡을 뮤지컬은 단번에 잘라냈다. 원작의 수많은 갈등이 응축된 표도르의 죽음과 드미트리의 재판을 서두에 놓고 이반, 알료샤, 스메르쟈코프의 반응을 통해 본질을 건드린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가 아니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로 진행되다 보니 작품은 첫 장면부터 기선을 제압하듯 관객들의 집중을 끌어낸다. 큰 사건을 빵 터뜨리고 점점 더 미시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줌 인 방식이다.

 

무대 역시 그러하다. 신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는 성당, 죽은 아버지가 머무는 무덤, 죄를 가리는 법정, 네 아들이 숨어드는 방이 한 공간에 포개진다. 성당이 무덤이 되고 무덤이 법정이 된다. 네 귀퉁이의 각자 방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하다가 형제들의 기억과 욕망이 침범할수록 경계가 흐려진다. 원작에서 수십 쪽에 걸친 사유와 논쟁은 한 소절의 음률과 한 번의 경련으로, 철학적 논쟁은 독창과 중창으로, 기억은 무대 심부에서 열리는 문과 흙, 보드카, 장미 등의 오브제로 모습을 바꾼다. 수백 페이지의 문장이 무대디자인과 조명, 음향, 배우의 몸에 눅진하게 눌어붙는다.

 

무대 뒤 문이 닫힐 때 드러나는 십자가와 네 형제의 공간을 구분하는 천장의 아치, 벽돌과 촛불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곳은 조용한 성소가 아니다. 십자가 바로 아래 제단 같은 표도르의 관은 러닝타임 내내 피와 흙, 보드카 범벅으로 변한다. 아직 온전히 이승을 떠나지 못한 표도르는 신과 인간 사이, 중천 같은 관을 매개로 네 아들의 민낯을 끌어내며 자신의 속내도 드러낸다.

 

극 전반부 이반은 알료샤에게 신이 존재한다면 왜 죄 없는 아이가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지를 묻는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그 자유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을 왜 보고만 있는가. 특히 무고한 어린아이를 사냥개에게 물어뜯겨 죽게 한 장군의 이야기는 거대한 신학적 질문이다. 아이의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을 예로 들며 이런 인간도 구원받을 수 있으냐고 이반이 묻자 알료샤는 대답하지 못한다. 원작에서는 이 질문에 알료샤의 격한 대답이 곧바로 따라오지만 뮤지컬은 질문과 답 사이를 길게 벌려놓는다. 그 사이 관객과 알료샤가 통과해야 할 시간이 생긴다. 까라마조프가의 파국과 네 형제의 민낯, 표도르가 남긴 시간이다.

 

이반이 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버지 표도르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겹친다. 왜 아이를 세상에 만들어놓고 보호하지 않았는가. 왜 고통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가. 왜 ‘아버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 아버지가 되지 않았는가. ‘아버지’라는 이름에는 어떤 사랑과 책임이 요구되는가. 하늘의 아버지와 인간의 아버지가 같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뮤지컬은 대문자 아버지와 소문자 아버지를 겹쳐 놓으며 그 이름에 요구되는 사랑과 보호, 책임 자체를 심문한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아들들, 아들에게 죽고 싶다는 아버지, 사랑하면서 서로의 가장 깊은 상처를 귀신같이 찾아 후벼 파는 사람들이 벌이는 ‘가족극’의 시작점이다. 관객들이 반어적으로 부르는 ‘따뜻한 가족극’이라는 말도 그래서 마냥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살인사건으로 시작했는데 오래 들여다볼수록 작품이 반복하는 질문은 범죄보다 가족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혈연은 어디까지 집요하게 삶을 파고드는가. 가장 사랑받고 싶은 사람을 왜 가장 증오하게 되는가. 부모에게서 달아나려 할수록 왜 자신의 몸에서 부모를 발견하게 되는가. 거대 서사로 시작해 점점 개인의 심연을 파고드는 이 작품의 서사구조는 거대한 성당이자 무덤을 작은 장롱으로 축소시키기에 이른다.

 

 

신은 없다! 아버지도 없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반과 알료샤는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로 보인다. 이반은 신을 심문하고 신의 부재를 논증하려 한다. 알료샤는 신을 믿고 신의 부름에 답하는 위치에 있다. 친형제의 신학적 대립은 어린 시절 기억의 터널을 함께 지나며 새로운 국면을 향한다. 〈장롱 안에서〉다. 원작에는 어린 이반과 알료샤가 함께 장롱에 숨어 있었다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없다. 작품은 원작 곳곳에 흩어진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방치, 타인의 손에서 성장한 형제들의 유년, 알료샤에게 남아 있는 어머니 소피아와 종교적 이미지를 끌어와 ‘장롱 속 두 아이’를 구체화한다. 방대한 가족사를 설명하는 대신 두 어린아이의 심신을 장롱 하나에 집어넣고 그들의 무의식을 상상해본 것이다. 보호받지 못한 유년, 부모를 향해 갈구해온 애정을 피난처 같은 장롱 안에서 터뜨린다.

 

동시에 닫히면 십자가 형태가 드러나는 문 안쪽, 그들의 불안과 고통의 원천인 표도르가 손에 보드카를 잔뜩 묻혀 벽에 무언가를 그린다. 이반과 알료샤의 친모 소피아의 형상이기도, 성모의 이미지 같기도 하다. 성당이자 무덤인 공간에서 유령인 표도르가 자신에게는 생명수인 보드카로 죽은 아내를 그려내는 퍼포먼스가 기묘하게 따뜻하다. 그 앞에서는 두 아들이 장롱에 웅크린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다. 〈장롱 안에서〉 후반부에서 이반과 알료샤는 송재학의 시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의 일부를 함께 부른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이때 ‘그’는 우선 죽은 어머니 소피아로 읽힌다. 병든 몸으로 아이를 품었고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중창 바로 앞에는 밤마다 병든 어머니의 방을 찾아오던 표도르와, 동생의 눈을 가려 주던 어린 이반의 기억이 있다. 아이들을 장롱에 숨고 눈을 감고 입을 틀어막게 만든 아버지의 손과, 동생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 준 형의 손, 죽은 어머니의 손 위로 꿈속에서나 가능했을 다정한 누군가의 손이 겹친다. 누구의 손인지는 점점 모호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그 손의 감각만은 또렷해진다. 받지 못했기에 상상해보는 다정함이다.

 

“결코 눈뜨지 말라”는 표현은 보호의 자장가이자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질 다정함을 붙잡으려는 아이의 간청 같다. 상상 속 가족의 다정함이 장롱 속 풋잠에서 잠깐 생겨난다. 〈장롱 안에서〉는 어쩌면 이 까라마조프 가족에게 한 번도 온전히 존재한 적 없었던 다정함을 만들어내는 노래인지도 모른다. 알료샤의 신앙과 이반의 신에 대한 반항이 어린 시절의 상처에서 기인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작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한 두 사람의 무의식 속 근원, 혹은 교차점을 제시한다. 어른이 된 후 성당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언쟁하던 이들이 어린 시절 장롱에서 나란히 기댄다. 거대한 신학은 두 아이의 신체 크기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네 형제의 따로 또 같은 혼돈

드미트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자기 몸에서 발견한다. 표도르에 대한 증오와 자기혐오는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피를 몸에서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다고 광분하지만 그 말을 하는 성정부터 아버지와 닮아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욕망에 끌려다니며 사랑과 파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몸은 표도르와 판박이다. 스메르쟈코프는 아들이면서 아들이 아니다. 가족 안에서 태어났지만 하인으로 살고 형제들을 ‘도련님’이라 부른다. 피는 그를 까라마조프 안에 넣었지만 호명은 평생 그를 밖에 세웠다. 가족의 사랑과 인정이 없어도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을 흠모하고 따른다. “모든 것은 허용될 수 있다”라는 이반의 명제는 스메르쟈코프에게 친부살해를 허가하는 지시어이자 명분으로 작동한다. 표도르를 죽인 사람은 스메르쟈코프다.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이반은 과연 결백할까? 신과 사랑을 믿는 알료샤는 이 난장 바깥에 있을까?

 

알료샤의 독백 넘버 〈사랑을 하고 싶지만〉은 이 극단적인 까라마조프적 상황 한복판에 놓인 휴지기이자 사유의 시공간이다. 넘버 직전 알료샤는 처형을 기다리는 꿈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몇 분이 주어지자 누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생각하고, 할 말과 버릴 말을 하나씩 가른다. 시간이 거의 지나서야 할 말이 떠오른다. 이어지는 사랑의 노래는 죽음 직전까지 말을 버리고 또 버린 뒤 남은 것이 사랑이라는 뜻처럼 들리지만 그마저 확신은 아니다. 알료샤는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다가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고, 하느님에게 바친 몸이라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조금 남겨두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사람이 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른다. 고백하고 물러서고, 다가가고 다시 머뭇거린다.

 

빛도 사라진다. 알료샤의 얼굴이 흐려지고 몸의 윤곽이 없어지고 마침내 완전한 암전이 찾아온다. 짧은 장면 전환용 암전이 아니다. 무대와 객석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칠흑 같은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어디까지가 알료샤의 공간이고 어디부터가 관객의 자리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검은 바다이자 압도적인 고요가 동시에 다가온다. 필자는 늘 이 알료샤의 암전 속 독백에서 매번 우주에 떠 있는 상태를 상상한다. 알료샤의 혼돈을 객석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객이 잠시 같은 ‘모름’ 속에 들어가 진공상태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배우의 표정을 읽을 수도 없고 몸짓을 해석할 수도 없다. 꿈속에서 알료샤는 말을 하나씩 버렸다. 무대에서는 이미지마저 하나씩 없어진다.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서 사랑하고 싶다는 목소리만 남는다.

 

알료샤의 마지막 질문, “누구나 사랑을 하면 아픈가요.”에서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정답을 찾아서가 아니다. 질문의 주어가 달라지면서 범위가 확장되어 맥락이 전환되었기때문이다. ‘나’의 사랑과 ‘나’의 혼돈 안에 웅크리고 있던 알료샤가 ‘누구나’를 묻는다. 답을 얻어서 빛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나를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순간이어서 빛이 돌아온게다. 알료샤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사랑하고 싶어서 어쩌지 못하는 수도자이다. 그런 알료샤의 ‘모름’ 옆에서 드미트리와 이반, 스메르쟈코프의 죄와 책임은 점점 더 구체적인 실체를 얻는다.

 

 

아버지의 흙을 놓는 손

감옥에서 나온 드미트리는 아버지의 흙을 손에 쥔 채 〈발 없는 새〉를 부른다. “아버지 날 버리지 마세요”에 연이어 “아버지 이제 나를 놓아 주세요”라는 드미트리의 이중적 심연이 아프게 닿는다. 발 없는 새는 자유롭게 나는 새가 아니다. 내려앉을 곳이 없어 계속 날아야 하는 새다. 땅에 닿는 순간은 안식이 아니라 죽음이다. 드미트리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버림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손을 펴자 아버지의 흙이 떨어지고 감옥 밖으로 꿈처럼 빠져나온다. 아버지의 흔적을 털어내는 해방은 아니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실제로 상처 입힌 사람들을 기억하며 스스로에게 처벌을 기획한다.

 

자신을 키운 그리고리를 발로 찬 일, 스네기료프 대위의 수염을 잡아 길가로 끌고 다닌 일, 그 모습을 보고 온몸을 떨던 스네기료프 대위의 어린 아들 일류샤, 자신의 약혼녀 카체리나와 이반의 약혼녀 그루셴카를 괴롭힌 일을 하나씩 고백한다. 표도르를 살해한 사람은 스메르쟈코프다. 드미트리는 자신이 친부살해범이 아님을 공식화 한다고 해도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누군가가 나를 의심했다면, 의심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거야”라는 그의 말은 법적 유죄의 고백은 아니지만 자신의 욕망과 폭력이 타인의 삶에 남긴 공포를 인정하는 참회의 말로 작동한다. 아버지의 흙을 놓은 손으로 이제 자신이 주위에 남긴 상처들을 하나씩 헤아린다.

 

이반은 “살인자는 살인을 인정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외치면서도 드미트리가 범인이 아니라면 스스로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인식한다. 뒤이어 스메르쟈코프가 “당신이 죽인 거잖아”라고 되돌려줄 때 합리적인 이반은 자기 자신을 향해 의심의 잣대를 들이댄다. 드미트리의 〈발 없는 새〉는 이반의 붕괴를 예고하는 윤리적 전주가 된 셈이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에게서 표도르 살해의 자백을 듣는다. 스메르쟈코프는 발작을 꾸며 알리바이를 만들고, 그루셴카의 비밀신호를 이용해 표도르에게 접근한 뒤 쇠공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말한다. 표도르를 직접 살해한 사람은 스메르쟈코프다. 이 사실은 명백하다. 스메르쟈코프는 이반에게 “그래서 내가 대신 죽였잖아. 당신 뜻을 따라서”라고 말한다. 이반의 사상은 스메르쟈코프에게 행동을 허가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반은 “넌 내가 아니야”라고 외치지만 스메르쟈코프는 “난 당신의 형제야”라고 되받는다. 그는 이반의 분신이 아니다. 가족이 끝내 아들로 호명하지 않았던 사생아이자 하인이며 실제로 아버지를 죽인 별개의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생각과 행동을 단순히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 놓인 욕망과 침묵, 배제와 대화의 시간을 들여다보게 한다. 생각은 이반의 머리에서 나왔지만 쇠공이를 든 것은 스메르쟈코프의 손이다. 이 손을 움직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말들이 오갔던가.

 

 

몸의 발작, 사상의 발작, 공간의 발작

이어지는 〈발작〉에서 스메르쟈코프의 몸은 그 복잡한 질문을 경련으로 토해낸다. 표도르 무덤의 얼룩을 화장하듯 얼굴에 바른 그는 발작을 “내 육신에서 나온 육신”이라 명명했다. 표도르를 흉내 내며 “오 귀여운 아들아”,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제 혈육”이라고 조롱한다. 아들로 호명받지 못한 아들이 ‘자기 발작’을 ‘아들’이라고 호명하는, 정신분석적 해석이 풍성하게 펼쳐질법한 장면이다.

 

스메르쟈코프의 발작은 이 작품의 숨은 공신이다. 매 시즌 스메르쟈코프역 배우가 발작을 어떻게 해석해서 전달하는가가 관객들의 관심사로 부상한다. 그만큼 연기자도 고통이지만 관객들 입장에서도 고통과 카타르시스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범행을 가능하게 한 거짓 알리바이이면서 가족 안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스메르쟈코프의 몸이 무대 중심을 강제로 차지한다. 가짜 발작을 내세우며 부친을 살해한 스메르쟈코프가 진짜 발작 속에서 자신의 진실을 쏟아낸다. 자신의 발작을 “내 몸에만 들어가 사는 신앙”이라 부르는 스메르쟈코프 역시 지극히 까라마조프적이다. 앞서 〈헛소리〉에서 현란한 중창으로 떠돌던 “누가 행동을 했을까”, “누가 더 원했을까”라는 질문이 구체화되는 지점들이다.

 

발작은 전염된다.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목을 조르며 “넌 내가 아니야”라고 부정하지만 어느 순간 발작하듯 몸을 뒤튼다. 스메르쟈코프 주위로 여러 얼굴의 악마가 몰려들고 곧 이반의 〈대심문관Ⅰ〉이 시작된다. 스메르쟈코프의 발작이 몸의 발작이라면 뒤이은 〈대심문관〉은 사상의 발작이다. 원작에서 살인 이전에 제시되는 이반의 대심문관 사상을 뮤지컬은 살인 이후까지 끌고 와 다시 폭발시킨다.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의 몸에서 행동이 된 뒤다. 이반이 신을 향해 왜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는가를 묻기 직전, 스메르쟈코프는 이미 “당신이 나한테 자유의지를 줬잖아”라고 돌려준다. 신에게 던지려던 질문을 이반은 먼저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혈육에게서 돌려받는다. 신에게 향하던 질문은 형제에게, 그리고 이반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바로 이 지점이다. 무대 위 거대한, 천정같은 아치가 내려오며 웅장한 성당이자 무덤인 공간이 조금 낮아진다. 스메르쟈코프의 관절에서 시작된 경련은 이반의 몸과 사유를 거쳐 급기야 공간으로 번진다. 신을 향해 질문할수록 하늘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천장이 내려온다. 공간도 발작을 한다면 바로 이런 모양새일지 모르겠다. 사유는 팽창하는데 공간은 압착된다. 몸에서 시작한 발작이 사상으로 옮겨가고, 마침내 공간까지 전이된다. 알료샤의 혼돈과는 정반대다. 알료샤에게서는 빛을 빼앗아 공간의 경계를 없애더니 이반에게서는 공간의 부피를, 에너지를 빼앗아 사상의 경계를 없앤다.

 

공간의 변호 속에서 이반이 초반에 던졌던 질문이 돌아온다. 어린아이를 사냥개에게 물어뜯겨 죽게 한 장군. 그런 인간에게도 구원이 가능한가. 이번에는 알료샤가 강력하게 주장한다. “구원받을 수 없어. 그 장군은 사형이야.” 보편적 구원을 말하던 사람이 구체적인 악 앞에서 구원에 금을 긋는다. 그리고 울고 웃으며 무너지는 이반을 천천히 감싸 안는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지은 인간을 버리지 않는 것.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엄밀히 다른 이 선택지들은 이제 알료샤의 몫이다. 알료샤는 악을 악이라고 부르면서도 인간에게 다가간다. 처음에는 대답조차 못했던 동생이 형의 질문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형은 동생의 품 안에서 울고 웃는다.

 

첫 장면에서 네 아들은 신을 향해 팔을 위로 뻗었다. 이제 알료샤의 팔은 옆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향한다. 신에게 답을 얻어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에게 답을 얻지 못했는데도 다시 인간에게 간다. 알료샤가 이반을 안은 순간 세계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살인은 되돌릴 수 없고 이반의 질문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려온 아치는 그대로다. 알료샤의 포옹 하나로 하늘이 다시 열리지 않지만 새로운 세대가 판단하는 새로움의 무한한 가능성은 열렸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아버지

이 모든 질문의 한가운데 이미 죽은, 하지만 그 누구보다 활발히 작품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아버지 표도르가 있다. 표도르는 이 작품의 가장 추잡한 인물이지만 대표적인 악인은 아니다. 그는 “삶을 너무 사랑했노라”고 외치며 먹고 마시고 춤추고, 사랑이 자기 육체 안에 수십 번도 넘게 집을 짓는다고 노래한다. 다만 그의 집에는 아들들이 살 자리가 없을뿐이다. 표도르는 사랑을 감각과 소유, 욕망으로 인식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돌봄과 책임이 사랑의 한 형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들들이 자기에게서 떠나려 하면 묘하게 쓸쓸해한다. 한바탕 난장을 벌인 뒤 지쳐서 아들들에게 한마디씩 해달라고 청하는 초반의 장면이 아이러니하다. 스메르쟈코프는 내일 발작할 것이라 하고 이반은 모스크바로 떠날 것이라 한다. 알료샤가 아무 말 없이 이마에 입을 맞추자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것처럼 입맞춤을 하는구나”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이내 “사라져”라고 툭 던진다. 붙잡고 싶은데 말은 사라지라고 한다. 표도르의 사랑은 늘 이런 식으로 엇나간다.

 

앞서 드미트리와 표도르가 난투를 벌였을 때 조시마 장로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합니다. 나를 용서하세요”를 반복했다고 알료샤가 전한 바 있다. 표도르는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슬픔이다. 표도르는 사랑을 자기 몸속에 집 짓게 했지만 조시마는 타인 앞에 자기 몸을 낮추면서 사랑을 움트게 했다. 이 몸짓은 이후 드미트리가 자신이 상처 입힌 사람들을 떠올리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알료샤와 이반, 하마못해 스메르쟈코프도 결국 사랑을 전하는 방법을 각자의 방식으로 이어간다. 하지만 표도르만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표도르의 유령성은 〈여기가 어딜까?〉에서 “너희들이 태어나면 좋았어/불행하지 말라고 발가락마다 입 맞추었지”라는 기억을 꺼내며 명분을 갖는다. 좋은 아버지였다는 뒤늦은 변명이 아니다. 사랑의 순간은 있었지만 그 사랑을 관계로 지속시키지 못했던 인간의 깨달음이다. 혹은 자기만의 사랑법을 찾았으니 인간으로 살았던 의미를 다했다는 존재론적 성찰이다.

 

이제 그는 당당하게 네 아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른다.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 이반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까라마조프. 마지막은 빠벨 표도르비치 스메르쟈코프다. 아들로 호명받지 못했던 스메르쟈코프가 아버지를 죽였고, 아버지는 죽은 뒤에야 그를 아들의 이름으로 부른다. 너무 늦은 부성의 몸짓이다. 호명은 살인을 되돌리지 못하고 죽은 아들을 살려내지도 못한다. 표도르는 아버지가 되지 못한 채 아버지의 이름만 남긴다.

 

 

마지막 〈우린 까라마조프〉에서 다섯 남자의 몸이 다시 한곳에 모인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악마는 우리 마음속에 있으니까/자기 몸에 침을 뱉을 순 없으니까.” 장방형 단 위의 표도르를 네 아들이 에워싸고 팔을 뻗는다. 그 팔들은 아버지를 향하는 동시에 표도르의 몸에서 돋아난 여러 개의 팔처럼 뒤엉킨다. 아버지가 어디까지이고 아들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잠시 알 수 없다.

 

아버지를 향해 침을 뱉으려 했는데 그 아버지가 이미 자기 몸 안에 있다. 드미트리는 자기 몸에서 아버지의 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반의 생각은 스메르쟈코프의 몸에서 행동이 되었고,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던 스메르쟈코프도 까라마조프의 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알료샤라고 가족의 바깥에 홀로 설 수는 없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 혈연은 설명되지 않는다. 안무로 시각화되고 의미를 만들며 감정으로 확장된다. 표도르는 아버지가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까라마조프라는 흔적을 남겼다.

 

이제야 서두에서 먼저 언급했던 표도르의 마지막 대사, “너희 중 하나라면 잘 갈게”가 제대로 무게를 얻는다. 자신을 살해한 범인이 친아들이면 좋겠다는 기묘한 바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 스메르쟈코프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표도르 스스로 ‘너희’ 안에 넣어주지 않았던 혼외자이다. 아들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제야 떠날 수 있다고 말한다. 표도르는 관이자 침상이었던 장방형 단 위에 보드카를 뿌린다. 보드카가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그는 맨발로 단에서 내려와 무대 중앙 십자가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첫 장면에서 무대의 상수에서 등장한 떠돌던 혼령이 100여 분을 헤맨 뒤 비로소 무대 중앙, 십자가 저편으로 간다. 제대로 씻김을 한 후 한도 원도 다 내려놓은 모양새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아들들이 아버지와 함께 치러낸 씻김굿이자 천도제이자 기이한 사부곡이다.

 

아버지를 사랑해서 부르는 사부곡이 아니다.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는데 죽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를 어떻게든 보내기 위한 사부곡이다. 그런데 보내는 방법은 더 기묘하다. 아들들은 표도르가 흘려보낸 보드카와 흙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는다. 네 아들이 함께 아버지가 남긴 물질들을 자기 몸에 묻힌다. 세례 같기도 하고 씻김 같기도 한데 깨끗이 없애는 정화와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를 씻어내는 것인지, 아버지로 자신을 씻는 것인지 경계가 묘하다.

 

유령은 보드카를 타고 돌아왔다가 보드카를 남기고 떠난다.

 

 

우리는 까라마조프, 그리고 ‘아직도’

작품의 대단원은 원작의 엔딩과 다르면서도 묘하게 닿아 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부친살해 재판에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죽은 소년 일류샤의 장례와 그곳에 모인 아이들이 있다. 드미트리가 모욕했던 스네기료프 대위의 아들, 아버지가 수염을 붙잡혀 끌려가는 모습을 온몸을 떨며 바라보았던 바로 그 아이다. 알료샤는 아이들에게 죽은 친구와 함께했던 좋은 순간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파괴된 까라마조프 가족 바깥에서 기억을 나누는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뮤지컬은 원작의 수많은 가지를 걷어내며 일류샤의 긴 서사도 드미트리의 기억 속 짧은 흔적으로 남긴다. 대신 마지막에 제대로 치르는 것은 표도르의 장례다. 원작 종결부의 죽음-장례-기억-산 자들의 미래라는 운동이 뮤지컬에서는 표도르를 보내는 마지막 의례와 기묘하게 공명한다. 사랑했던 죽은 아이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사랑하고 증오했던 아버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라는 훨씬 불편한 질문과 만난다. 이 작품은 누가 죽였는가에서 누가 죽이고 싶었는가로, 행동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신으로 갔다가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다. 신을 향했던 알료샤의 팔은 무너지는 이반을 안았고, 아버지를 밀어내려던 네 아들의 손은 마지막에 아버지가 남긴 물질을 자기 얼굴에 묻힌다. 내려와 있던 아치가 비로소 다시 올라가는 지점이다.

 

알료샤는 누구나 구원할 수 있는 강한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사랑의 정답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가족의 파국을 막아내지도 못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 그는 “나약하다는 건 아직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직도’가 이 작품에서 유의미한 이유이다. 죽은 아버지는 아직도 아들들의 몸과 말과 욕망 속에 남아 있다. 장롱 속 아이들의 공포도, 사랑받지 못한 스메르쟈코프도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를 놓아주지 않는 ‘아직도’다. 그런데 알료샤의 ‘아직도’는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상처가 남아 있고 악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사랑이 파국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표도르의 첫 호언장담으로 돌아가보자. “난 썩지 않을 거야.”는 물성의 부패 여부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육체가 아닌 관계, 까라마조프가의 일원임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존재론적 선언이다. 표도르는 사라지지 않는 과거이고 알료샤는 그 과거와 결별한 미래도 아니다. 죽은 아버지의 흔적과 가족의 상처, 사랑이 낳은 폭력까지 지닌 채 그 바깥으로 조금 움직이는 미약한 미래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이 가족에게 사랑은 결코 무죄가 아니다. 관객은 100여 분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폭력을 감각한다. 작품은 이 지독하고 무서운, 증오가 가득 버무려진 사랑을 아무렇게나 폐기하지 않는다. 까라마조프적인 기질은 각자의 심연을 파고들어 돌아본 후 각자의 갈길로 향했다. 이렇게 서로를 망가뜨리고 우리는 ‘아직도’ 사랑할 수 있는가?

 

 


<참고문헌>

데리다, 자크.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서울: 그린비, 2014.

도스토예프스키, 표도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상·중·하. 김학수 옮김. 서울: 범우사, 1995[제2판].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서울: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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