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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우리에게 낯선 작곡가 에릭 사티 [No.122]

글 |최영현 (더뮤지컬 리뷰어 1기) 사진제공 |안산예술의전당 2013-11-14 4,961

너무 일찍 찾아 온 미래 에릭 사티 생전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예술가들이 사후에 재조명되고 재평가를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그들의 예술을 대중이 이해하는 데에는 시차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866년 5월 17일. 프랑스에서는 너무도 일찍 시대를 앞서 한 작곡가가 태어난다.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로 음악사에 새로운 문을 열고 현대음악에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던 작곡가. 평생 가난과 고독, 그리고 기이한 행적으로 기억되는 작곡가. 그러나 그의 이름도, 그의 음악도 여전히 낯선 작곡가. 그의 이름은 에릭 사티(Erik Satie)다.

 

 

 


세기 말에 나타난 괴짜 음악가, 에릭 사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옹플뢰르에서 태어난 에릭 사티는 4살 때 파리로 이주하지만, 이듬해 어머니의 사망으로 다시 옹플뢰르로 돌아와 12살까지 조부모 밑에서 자란다. 10살 때 성 레오나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에게 처음 피아노를 배웠다. 13살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지만 생활기록부에 ‘재능은 있으나 게으르고 결석이 잦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성실하지도, 성적이 좋지도 않은 학생이었다. 사티 역시 음악원의 아카데미즘에 염증을 느껴 자퇴를 하고 보병대에 입대한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일부러 병을 얻어 1년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한다.

 

제대 후 사티는 몽마르트르에서 본격적인 예술가의 삶을 시작한다. 1887년 말 시작된 몽마르트르에서의 생활은 1889년 파리 남부 아르괴유로 이주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 사티는 ‘검은 고양이’라는 이름의 카바레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고, 많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24살이 되던 1890년에는 ‘미학적 장미 십자단’이라는 신비주의 계열의 종교 단체의 공식 작곡가로 활동하며 곡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바그너를 신봉하던 교주와 음악적 견해 차이로 1년도 채 못 되어 교단을 탈퇴했다. 그 후 그는 스스로 지도자 예수의 예술수도회를 창설하여 스스로 교주이자 유일한 교도가 되었다.

 

사티는 1898년 아르괴유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곡을 발표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친다. 「한 마리 개를 위한 물렁물렁한 진짜 전주곡」, 「바짝 마른 태아」, 「지긋지긋한 고상한 왈츠」 같은 기이한 표제와 ‘놀라움을 가지고’, ‘잠시 홀로되기’, ‘마음을 열라’ 등과 같은 주석을 곡에 붙였는데, 이는 기존 음악에 대한 냉소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기이한 표제와 달리 음악은 단순하면서도 순수하고, 유쾌했다. 1905년에는 늦은 나이에 스콜라 칸토움에서 음악 공부를 시작하여 성실하게 학업을 마쳤다.

 

1911년부터 그의 음악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면서 ‘프랑스 6인조’, ‘아르괴유 악파’ 등 그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따르던 젊은 작곡가들이 등장했다. 사티 음악 인생의 절정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찾아왔다.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였던 장 콕토와의 만남은 사티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또 콕토는 그의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장 콕토, 파블로 피카소,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등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발레 <퍼레이드(Parade)>에서 사티는 타자기 소리, 비행기 소리, 엔진 소리 등과 재즈 등이 결합된 실험적인 음악을 선보이며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태어난

후기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조류가 형성되었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사티는 기존 음악의 미학과 화성을 배척하고 일체의 허식이 없는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으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또 그는 평생 한 가지 스타일에 머물지 않았다. 20대 초반에는 기하학적인 고대 선율의 곡을, 20대 중반에는 종교적인 신비주의 곡을, 30~40대에는 특유의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곡을, 50대에는 다양한 양식의 곡을 선보였다.

 

이러한 사티의 음악 세계는 당시 대중들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동시대 작곡가인 드뷔시와 라벨에게 영향을 끼치고, 스트라빈스키에게는 신고전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단순한 작풍, 배경음악으로서 음악의 역할을 강조한 가구음악, 발레 <퍼레이드>에서 보여준 음악적 실험 등에서 이미 미니멀리즘, 뉴에이지, 구체음악 등 현대음악의 윤곽과 가능성을 예시해주었다.

근현대 음악의 선구자적 삶을 살았던 사티는 평생 가난하고 고독했다. 아르괴유로 이사 후 몽마르트르까지 걸어 다닐 만큼 가난했지만, 곡 의뢰비가 많다고 불평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는 걸 보면 가난은 사티 스스로가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드뷔시, 콕토 등을 비롯 수많은 예술가와 교류했지만 그는 늘 혼자였다. 그의 음악은 사람들을 끌어모았지만, 반골 성향은 사람들을 멀어지게 했다. 괴팍한 성격의 외톨이였지만 그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의 사랑을 했다. 상대는 인상파 화가들이 앞다투어 그리고 싶어 했던 모델이자 여류 화가였던 쉬잔 발라동이었다.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연애는 6개월 만에 끝나고 만다. 사티가 27살 때 일이다.

 

1917년 사티 생애 최대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칸타타 「소크라테스」를 작곡했고, 르네클레메르의 무성 영화 <막간>의 영화 음악과 초현실주의적 발레 <메르퀴르> 등의 곡 작업을 맡았다. 평생 술을 즐겼던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1925년 6월, 간경화로 59세에 생을 마감한다. 사후에 아르괴유에서 생활하는 27년 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거처가 공개되었다. 텅 빈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 중고 피아노, 평생 닳아 해질 때까지 입고 버리고 또 입기를 반복했던 열두 벌의 똑같은 회색 벨벳 양복(심지어 그중 여섯 벌은 입어보지도 못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폐품 같은 물건들 그리고 쉬잔에게 부치지 못한 연애편지 한 묶음이 있었다.

 

 

독특한 음악 세계와 인생의 궤적을 그렸던 사티의 삶과 음악은 다른 장르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소설가이자 작곡가인 아라이 만은 사티의 유년 시절부터 몽마르트르에서의 삶을 소설  『에펠탑의 검은 고양이』  속에 빼곡하게 적어 내려갔다.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 나갔던 사티의 음악이 음악가들이 아닌 대중들의 귓가를 간지럽힌 것은 1963년 프랑스 영화 <도깨비불>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되면서다. 사티가 세상을 떠난 지 38년이 지난 후였다. 사티는 생전에 자신의 삶과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2011년 안산예술의전당에서 제작된 음악극 <에릭 사티>는 신인 영화감독이 사티가 살았던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시간 여행을 한다는 독특한 컨셉으로 사티의 음악과 삶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품이 올해 다시 재정비돼 올라간다. 비교적 그의 삶을 충실하게 반영한 이 작품에서 세상에 너무 일찍 온 천재의 고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2호 2013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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