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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지금 가장 빛나는 라이징 스타 - 기세중 [No.176]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18-06-04 7,458
세상을 향한 한마디 



 
인터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중에게 풍선을 들려주고 해맑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게 한 게 실수란 걸 깨달았다. 소년처럼 앳된 인상과 달리 그가 꺼내놓는 이야기는 상당히 터프했으니까. 말하자면 클로즈업 사진처럼 턱을 살짝 치켜들고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이 그의 본래 캐릭터에 가깝다. “학교 생활이 잘 안 맞았어요.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왜 내가 두발 검사를 당해야 하는지, 야간 자율 학습을 해야 하는지. 내 인생인데 학교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스프링 어웨이크닝>(그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풍의 학창시절을 거쳐 경희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이유도 연기에 큰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연기를 시작한 건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어요. 노래도 남들한테 지기 싫어서 연습한 거지, 딱히 뮤지컬을 하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이처럼 반항심으로 가득했던 그를 뮤지컬의 길로 인도한 건 바로 <맨 오브 라만차>.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나서는 기사 돈키호테의 이야기에서 기세중은 그 자신의 의문과 맞닿은 대사를 발견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누구를 미치광이라 부를 수 있겠소?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오!’ “그 대사 때문에 뮤지컬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기득권이 만든 질서를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살았는데, <맨 오브 라만차>가 비슷한 얘길 하는 작품이더라고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무대에서 캐릭터의 입을 빌려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기세중이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 것은 2016년 JTBC 오디션 프로그램 <팬텀싱어>에 출연하면서부터다. 그래서인지 소위 ‘방송빨’로 하루아침에 뮤지컬 무대에 선 줄 아는 이가 많지만, 사실 그는 2013년 데뷔해 차근차근 성장해 온 배우다. 3년간 앙상블로 활동하며 저임금과 차별에 시달리기도 했다. “뮤지컬에서 앙상블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죠.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만큼 대우는 안 해줘요. 부당한 일을 겪어도 쫓겨날까 봐 아무 말 못 했어요.” 편의점 물류 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서른 전까지 하루에 라면도 못 먹을 만큼 돈을 못 번다면 배우를 그만두겠다’ 다짐했다는 그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심정으로 <팬텀싱어>에 지원했다.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는 서바이벌 경연 방식이 그의 성미에 맞진 않았지만, <팬텀싱어> 출연을 계기로 금전적 여유와 ‘하고 싶은 대사가 있는’ 배역을 얻은 것만은 사실이다. 작년부터 그는 연극 <보도지침>의 김정배, 뮤지컬 <나폴레옹>의 앤톤, <배니싱>의 명렬,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으로 쉬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선이 가는 외모의 기세중에게 주로 제의가 들어오는 건 여린 캐릭터. 하지만 실제 그는 오토바이를 잘 타고(싸이카 헌병대 출신이다), 스카이다이빙 같은 스릴 있는 활동을 즐기며, 세고 다크한 노래를 좋아한다. 외모와 다른 건 성격만이 아니다. 기세중의 노래를 처음 듣는 이는 예상치 못한 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놀라곤 한다. “항상 최종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이유가 목소리 때문이었어요. 이미지는 여린데 목소리는 굵은 편이라 어떤 역할을 맡겨야 할지 애매한 거죠.” 자신과 동떨어진 캐릭터를 맡는 게 힘들었던 때도 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캐릭터든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는 법을 익혔다. “이제는 저만의 장점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제 모순적인 특성을 살려 어떤 캐릭터든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자고 생각하게 됐어요.”


 
5월 개막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기세중이 맡은 역할은 착하지만 유약한 신사 애슐리. 아내인 멜라니에게 충실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스칼렛을 뿌리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기세중은 2014년에도 이 작품에 앙상블이자 애슐리 커버로 참여한 바 있다. 주연으로 돌아온 그는 애슐리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명확히 피력했다. “애슐리의 우유부단한 말과 행동은 정말 스칼렛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상처주기 싫어서 나온 거라고 생각해요. 힘든 처지에 놓인 스칼렛을 모질게 대할 수 없어 듣기 좋은 말로 타이르려 한 게 오해를 샀다고 봐요. 저도 20대 초반에 그랬거든요. 상처 주기 싫어서 누구한테나 친절했더니 오해가 생기더라고요. 착한 사람 콤플렉스랄까. 그런 면을 잘 표현해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어요.”
 
이제 막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기세중은 어떤 목표를 바라보고 있을까. “서른 전까지 무대 위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제 목표였어요. 그 목표를 연극 <보도지침>으로 이뤘죠. 지금 스물아홉이니까 서른 전까지 그런 작품을 한 번 더 만나면 좋겠어요.” 이어서 그는 서른다섯까지 자신을 믿고 찾아온 관객들로 소극장 하나를 꽉 채울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호기로운 목표도 덧붙였다. 두 마리 고양이의 집사이자 길고양이들의 캣파더로서 언젠가 안락사 없는 동물 보호소를 차리는 꿈도 꾸고 있다. 배우로서 꿈의 역할은 두말할 것 없이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하지만 이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50대는 돼야 할 것 같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모든 게 허황된 꿈처럼 들린다면 그가 잡을 수 없는 별을 향해 손을 뻗는 돈키호테의 형제라는 점을 기억하시길. 물론 궁극적으로 그가 서고픈 무대는 늘 한결같다. “마음에 드는 대사 한 줄이면 돼요. 진심으로 쏟아낼 수 있는 대사가 단 한 줄이라도 있다면 그 무대에 서는 의미가 있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6호 2018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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