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CRITIC] 판틴의 꿈과 장발장의 집 - <레미제라블> [No.229]

글 |정수연(공연 평론가) 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2023-10-25 1,266

 

 

 

뮤지컬이 된 대하소설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본 사람들은 많지만 소설 원작을 다 읽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일단 분량이 장편을 넘어 대하소설에 가깝다. 단편 소설이 주를 이루는 요즘의 독서 경향으로는 읽을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은 분량이다. 분량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은 서사의 친절함(?)이다. 인물과 사건을 소개한 후 그것들의 배경을 처음부터 설명하는 방식을 원형 작문법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은 그 형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예를 들어볼까. 소설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미리엘 주교의 젊은 시절을 자세하게 담아낸다. 그의 과오와 좌절 그리고 성숙이 설명되어야만 그가 왜 장발장에게 조건 없는 환대를 베풀었는지 알 수 있기에 그렇다. 떼나르디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워털루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인데, 소설은 이 사람을 등장시키기 위해 워털루 전쟁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다. 지배자의 과욕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던 전쟁의 실체를 설명해야만 거기서 살아 나온 떼나르디에가 악한이기는 해도 괴물은 아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역급도 이런데 주인공을 설명하는 호흡이 어떨지는 굳이 말하지 않으련다. 비단 사람뿐 아니라 하수도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만도 100여 쪽이 할애되니 이래저래 만만한 서사는 아니다.


그래도 이런 건 인내하면 넘어갈 수 있는 장애물이다. 이 소설을 읽기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이 뒤집히는 시대에 휩쓸려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 있다. 역사의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은 승리이지만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매번 실패한 거사였다. 이 소설의 배경인 1832년 6월 봉기도 그랬다. 흔들리는 시대는 언제나 참담하고 잔혹한 법.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읽어내기에 눈보다 힘든 건 마음이다.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런 ‘비참한 사람들’을 통해 자기네 프랑스를 이야기했다.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은 추한 괴물이거나(『노트르담의 꼽추』), 장애가 있는 부랑자(『웃는 남자』), 사회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니(『레미제라블』), 역사의 전지적 시점이 아니라 비참한 이들의 낮은 시선으로 프랑스 사회의 역사와 인간을 조망한 것이다. 이상이 아닌 현실의 시선이요,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시선이다. 이런 시선으로 볼 때 혁명은 아름답고 신성한 절대적 선의 세계가 아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격동기는 많은 이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대가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위고는 이 사람들을 무작정 선으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런 낙관은 혁명을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위고가 포착하는 혁명이란 무엇일까? 혁명의 씨앗은 과연 어디에서 싹을 틔우는 걸까? 문학은 역사가 놓친 혁명의 본질을 웅숭깊게 다루어낸다. 그 본질을 사람에게서 찾을 때 사람의 이야기는 강(大河)처럼 흐르기 마련이다. 

 

 

 


 
악몽이 되어버린 꿈

 

뮤지컬은 원작 소설의 수많은 역사적 맥락과 사회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극의 중심에 오로지 사람들을 부각한다. 원작의 의도를 잘 살린 각색인 셈이다. 그럼에도 언뜻 원작과 많이 달라 보이는 것은 인물 중에서도 특히 주인공을 원작과 다르게 설정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장발장을 중심으로 마리우스의 서사가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시작과 끝을 갈무리하는 인물은 판틴과 장발장이다. 이 두 사람의 서사를 중심으로 전체 이야기를 아우르는 해석을 한 것이다. 뮤지컬의 시작을 보면 그 해석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야기는 감옥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장발장의 프롤로그로부터 시작한다.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은 가석방되어 19년 만에 세상에 나오지만 다시 범죄자로 전락할 기로에 서고 만다. 그때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에게 조건 없는 은혜를 베풀고, 태어나 처음 환대를 경험한 장발장은 새로운 시작을 결심한다. 여기까지가 프롤로그다. 


프롤로그가 끝난 후 메인 테마가 연주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시작에는 판틴이 있다. 그녀는 비참한 사람의 전형이다.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사람이고, 성희롱에 노출된 노동자이며, 자식을 키우지 못하는 엄마이고, 남편이 없는 젊은 여자이니, 약자의 조건을 모두 모아놓으면 아마 판틴일 것이다. 이 여자에게 삶은 투쟁조차 할 수 없는 모멸이요 짓밟힘이다. 어떤 것도 꿈꿀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사람의 삶이다. 판틴의 노래(‘I Dreamed a Dream’)에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있다. 영원한 사랑과 신의 자비를 믿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삶은 노래와도 같았다. 하지만 영원할 거라 믿었던 사랑이 남자의 이기적인 욕망임을 알게 된 순간 꿈의 유효 기간은 끝나버리고 만다. 떠나버린 사랑이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싶지만 이런 꿈은 헛된 것임을 이제는 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악몽일 뿐이다. 


이건 모든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창녀(판틴), 도둑(장발장), 고아(코제트), 사기꾼(떼나르디에), 부랑아(가브로쉬), 소매치기(에포닌), 이들의 삶에 꿈이 있을까? 실패한 혁명이 가져온 절망, 무리한 전쟁이 가져온 가난, 권력이 저지른 폐해, 이 모든 것을 삶으로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꿈이나 희망은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판틴의 꿈은 ‘dreamed’라는 과거형이다. 하지만 비참한 현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거가 그랬듯 미래마저 소망이 아니라면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판틴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기만 하다. 
판틴은 온갖 삶의 수난을 겪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는다. 서사의 분량으로만 보자면 차지하는 몫이 크지 않지만 판틴이 던지는 질문은 이 작품을 이끄는 핵심적인 주제다. 이 이야기는 판틴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환대를 경험한 사람의 내일

 

극의 시작점에 장발장과 판틴을 연이어 배치한 것은 뮤지컬의 뚜렷한 의도다. 이 두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도플갱어이기 때문이다.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힌 장발장의 삶은 가난한 사람이 죄인이 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장발장도 판틴과 마찬가지로 억울한 사람이요 비참한 인생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판틴은 불행하게 죽었지만 장발장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간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 답은 그들이 무엇을 경험했는가에 있다. 판틴은 모멸을 겪으면서 죽어갔고 장발장은 환대를 경험하며 살아났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훔쳐야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선물로 베푼다. 지금껏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뒤 세상을 적대하던 장발장은 거짓말처럼 새사람이 된다. 그전까지 그에게 세상의 원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교의 조건 없는 환대를 통해 장발장은 삶의 새로운 원리를 깨닫는다. 세상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한 ‘죄수 장발장’은 이제 없다. 그랬을 때 장발장은 비로소 스스로 질문하는 자가 된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그 질문의 자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곤경의 장소라 해도 그는 자신을 향해 질문하고 사람들 앞에 대답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다. 그는 자기 대신 죄수 장발장으로 오해받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베르 앞에서 자기가 진짜 장발장임을 밝힌다. 이것은 도덕적 자아만이 할 수 있는 자기 고백이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장발장의 진짜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이제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를 안다. 


타인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장발장에게 그 감각은 자신이 환대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니 그 사람은 바로 판틴이다. 판틴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장발장은 자신의 문제에 집중하느라 그녀의 처지를 모른 척했고, 그 결과 판틴은 창녀로 전락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아직 죄수였을 때 그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온전한 환대를 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난한 여자 판틴을 향해 환대를 베풀지 않았던 거다. 장발장의 죄의식은, 그를 범죄자로 낙인찍은 자베르가 아닌, 오직 판틴으로부터 비롯된다. 
판틴은 장발장에게 평생을 짊어져야 할 사랑의 빚을 남긴다. 바로 어린 딸 코제트다. 고아가 된 코제트는 누군가에게 온전히 의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약한 자다. 장발장은 코제트를 온전히 사랑으로 책임질 것을 판틴에게 맹세한다. 이 맹세와 더불어 장발장에게 내일은 도망치는 죄수의 불안한 시간이 아니라 코제트와 함께하는 미래로 의미가 바뀐다. 코제트를 더 사랑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이제 장발장의 마음은 과거가 아니라 내일의 하루를 향한다(‘One Day More’). 과거의 인간에서 내일의 인간으로 탈바꿈하기. 장발장에게 내일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더 사랑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서 그는 변화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지식인으로서 위고는 실천적인 공화주의자이지만 작가인 그가 말하고 싶은 혁명의 원천은 바로 사랑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혁명의 가치는 언제나 자유와 평등에 있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가치는 갈등과 투쟁의 과정에서 번번이 좌초됐더랬다. 어느 한쪽의 가치만으로 혁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지식인 위고는 혁명에 참여한 당사자로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렇다면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작가로서 위고는 끝내 실패하지 않는 혁명을 상상한다. 그것은 박애, 즉 사랑의 혁명이다. 


장발장이 주인공인 이유가 이것이다. 그는 평등을 누려본 적 없고 자유마저 빼앗긴 사람이다. 자유와 평등은 그의 삶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가치일 뿐. 장발장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끝까지 사랑하는 것, 이것이 장발장이 삶으로 보여주는 혁명의 가치인 거다. 정치적 혁명은 실패했어도 사랑의 혁명은 실패할 수 없으니 뮤지컬에서는 두 개의 혁명을 나란히 대비시킴으로써 이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해 낸다. 자유와 평등의 장소는 바리케이드지만 사랑의 장소는 바로 집이다. 장발장의 사랑은 집이라는 키워드로 압축된다. 이는 서양 문학의 전통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을 이르는 메타포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은 삶의 처소일 뿐 아니라 영혼의 성장과 안식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추방당한 나그네나 쫓기는 이방인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곳이 바로 집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집을 나그네와 이방인에게 내어주어 환대하는 이에게는 언제나 신의 축복이 임했다.


장발장은 고아 코제트에게 집이 되어준다. 장발장의 보호 안에서 코제트는 자라고 성장하며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간다. 코제트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을 가진 숙녀로 자랄 수 있었던 건 장발장이 따뜻하고 안전한 집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발장은 마땅히 돌아갈 집이 있는 마리우스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보낸다. 세상을 바꾸고자 기꺼이 거리에서 목숨을 바치려는 이 뜨거운 청년을 살리기 위해 그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한다. 이 젊은이를 집으로 보내주시길, 오직 평화와 기쁨을 그에게 주시길, 만약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자기를 데려가시길(‘Bring Him Home’). 장발장은 죽어가는 마리우스를 자기 목숨을 다해 구해내고 그를 다시 삶으로 돌려보낸다. 


다른 이들에게 집이 되어주었던 삶의 시간이 다 소진되었을 때 비로소 장발장은 자기의 집을 신에게 청한다. 사랑을 배운 나의 삶은 축복이었으니 이제 나를 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Bring Me Home’). 그를 마중하러 나온 사람은 바로 판틴이다. 살아서는 장발장이 판틴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죽음을 앞둔 순간에는 판틴이 장발장을 향해 웃으며 손을 내미는 거다. 판틴의 인도를 받으며 안식의 집에 들어섰을 때 그를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사람은 미리엘 주교다. 환대의 선물을 시작한 사람이 그 열매를 맺은 장발장을 기쁘게 환영하는 것이다. 
장발장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또 있다. 혁명의 때에 바리케이드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함께 모여 힘차게 민중의 노래를 부를 때 감동이 밀려오는 건 이들 역시 끝까지 사랑한 사람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자유를 사랑하고 평등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 이들이 남긴 사랑의 열매로 지금껏 세상은 조금씩 더 나아져 왔을 것이다. 


뮤지컬이 이런 이야기를 담아내다니. 이 작품에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품위가 있다. 인물과 상황이 선율로 번역되어 어우러질 때 그 음악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장르의 참맛을 알게 되는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최고의 뮤지컬을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어 기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9호 2023년 10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