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형 연출가의 생존기: 장르는 넘으라고 있는 것>
9월의 이야기: 소리극
2009년 2월, 연극 연출가로 데뷔한 이기쁨은 올해로 16년째 ‘창작집단 LAS’를 이끌고 있다. 연극, 국악 극, 아동극, 뮤지컬, 콘서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만들어온 그는, 그 어떤 한 분야로도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연출가다. 이기쁨 연출이 이처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생계형 연출가’로서의 현실 때문이다. 생활인으로서의 생존, 극단 대표로서의 책임, 그리고 연출가로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 얽히고설켜 고단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주어진 작업을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니, 어느새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필모그래피가 쌓여갔다. 화려한 능력으로 쌓아 올린 결과라기보다는,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행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격은 이런 여정을 가능하게 했고, 그 속에서 이기쁨만의 배짱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금부터, 이렇게 고군분투하며 버텨온 이기쁨 연출가의 ‘생존기’를 매달 장르별로 하나씩 살펴보자.
<죄와 벌> 공연 장면. 사진= 창작집단 LAS
얼마 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소리극 <죄와 벌>을 짧게 공연했다. 이 작품은 2019년 산울림 소극장에서 열린 <산울림 고전극장>을 통해 초연되었다. 공연을 만드는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그렇듯, 나 역시 고심 끝에 만들어낸 결과물이 좋은 성과를 얻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무대에 오르길 바란다. 연출을 업으로 삼고 소규모 극단을 운영하며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단순하다. “극단과 작품의 생명력은 공연을 통해 증명된다.” 가능하다면 초연에서 멈추지 않고 후속 기회를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작품을 알리는 것. 그것이 창작자이자 극단 대표로서 내가 걸어야 할 방향이며, 의무이자 책임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사비를 털어서라도 공연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슬프지만 종종 빚도 진다. <죄와 벌>도 마찬가지였다. 정지혜 소리꾼의 초안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초연 이후 6년 동안 “다시 공연할 수 없을까?”라는 말을 해마다 되뇌게 만들 만큼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바라고 버텨 기회를 만들어낸 덕분에 <죄와 벌>은 다시 관객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소리극 <죄와 벌>’이었을까? 내 손을 거쳐 간 여러 작품 중, 왜 이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생각한 걸까? 더운 여름, 짧았던 2회의 공연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질 여유가 생겼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공연을 처음 접한 건 ‘타루’라는 팀을 통해서였다. 2010년대 초, 나는 <판소리, 애플그린을 먹다>, <오늘, 오늘이>의 연출부를 거쳐 <운현궁 로맨스>에서 연출을 맡으며 타루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그 시절 함께 했던 또래 소리꾼들은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전통예술계를 이끄는 인물들이 되었다. 극립창극단의 이소연 소리꾼, 이날치밴드의 안이호와 권송희 소리꾼, <팬텀싱어3>의 고영열 소리꾼, 그리고 올해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수상한 최호성 소리꾼 등등. 모두가 너무나도 눈부신 행보를 걷고 있다. 그들과 함께 만든 <운현궁 로맨스>는 ‘국악뮤지컬’이라는 장르로 불렸다. 전통예술을 낯설어하는 관객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이름이었겠지만 나에게 그 단어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판소리로 노래를 하고, 가야금과 거문고, 해금과 대금, 피리로 음악을 연주하는 이 공연을 어떤 형식으로 풀어내야 할지 깊이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성공적인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려 있었고 작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왜 이 극을 만들어야 하는가, 판소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는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무사히 공연을 올려낸 후에 다른 여러 전통예술단체와의 작업이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생계를 위한 업무 수행’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완창 판소리를 보게 되었다. 처음 본 완창 판소리는 나에게 명확하고 또렷한 메시지를 안겨주었다. “판소리는 ‘말’이다.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강력한 말이다.” 연극에서 배우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말로 극을 끌고 간다. 나는 명확한 서사를 선호하는 연출가로서, 언제나 ‘어떻게 말해야 장면이 살아나는가’를 고민해왔다. 반대로 ‘어떻게 말하지 않아야 장면이 효과적인가’도 마찬가지다. 뮤지컬 역시 내게는 ‘말에 음을 붙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판소리는? 대답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말’이다. 심지어 소리북 하나, 부채 하나만 있어도 무대가 되는, 극한의 효율을 가진 강력한 말. 그날 서촌의 고즈넉한 한옥 마당에서 펼쳐진 완창 춘향가. 소리꾼의 호흡 하나, 손짓 하나에 울고 웃던 관객들. 그 소리의 힘에 나는 완전히 매혹되었다. 바로 그날, ‘판소리’라는 세계가 명료해지며 나만의 ‘판소리’를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죄와 벌>은 그날 이후 작업한 첫 신작이었다. 800페이지가 넘는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소설을 90분 분량의 번안극으로 각색한다는 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지만 어떠한 선입견 없이 ‘판소리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시작한 첫 작품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의 불안정한 내면과 사상을 표현하기에 판소리는 매우 적절한 언어로 느껴졌다. ‘말’과 ‘소리’의 속성을 살리면서도 김승진 작곡가의 서양악과 혼합되어 만들어지는 불협의 미묘한 기운은, 마치 이 극 자체가 하나의 ‘라스콜니코프’가 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 내가 쌓아온 연극적 표현, 지혜 소리꾼의 작창(판소리를 짓는 과정을 작창이라 한다. 작곡과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선후 안무가의 움직임이 더해지며 이 극은 완성되어 갔다. 유선후 안무가는 내가 자주 협업해 온 예술가 중 한 명이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는 흔히 말하는 뮤지컬 안무가들과는 다른 결을 지닌 창작자다. 주로 무용 씬에서 활동하는 유선후 안무가의 뮤지컬 참여작으로는 <종의 기원>을 꼽을 수 있는데, 초연 당시 낯설고 기묘한 안무가 관객들의 격한 반응(!)을 끌어냈었다. 유선후 안무가는 서사를 신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데 독창적인 해석력을 지니고 있다. 기묘함을 넘어 기괴하게 느껴질 때조차 있는 그의 움직임은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 음악극 <나는 재미있는 낙타예요>, 소리판 <해녀탐정 홍설록> 등에서 큰 매력을 발휘했다. <종의 기원>을 준비할 때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작품이다 보니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뮤지컬스러운’ 안무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유선후 안무가를 섭외하게 되었다. 이는 무모하면서도 과감한 선택이었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림과 흡사하게 구현되었다. 유선후 안무가는 <종의 기원>에서도 그만의 해석과 안무 스타일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사이코패스인 ‘한유진’을 새로운 종(種)이라 한다면, 그 종의 형상을 ‘나무’로 상상해냈다.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존재로서의 상징성을, 뻗어나가는 팔다리와 손가락을 통해 괴물 같은 형상을 구현해내길 바랐다. 이러한 상상력은 <죄와 벌>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으며, 입과 악기, 그리고 몸으로 내는 소리가 결합되며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내는 공연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소리극’이라 부르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전통극은 대부분 ‘창극’이라 불렸고, 간혹 ‘국악뮤지컬’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든 나에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명칭이었다. 그래서 이후 내가 연출하는 전통극은 대부분 ‘소리극’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소리극’은 장르적 구분을 위한 명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작업의 방향성과 태도를 담은 언어이기도 하다. 판소리는 ‘말’이고, 말은 곧 이야기이며, 이야기는 시대와 현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다. 나는 이 다리 위에서 공연을 만들고 있는 것이고!
<체공녀 강주룡> 공연 장면. 사진=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죄와 벌>이 내게 ‘소리극’의 시작이었다면, <체공녀 강주룡>은 이 형식이 어떤 사회적 의제를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이자 대답이었다. 강주룡은 1931년 평양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조선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였던 인물이다.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던 조선의 여성 노동자가 자기 몸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 저항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 사실은, 그 자체로 극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실존 인물을 토대로 픽션으로 그려낸 소설 『체공녀 강주룡』을 홍단비 작가와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와 함께 소리극으로 재창작하였다. <체공녀 강주룡>을 준비하며 ‘소리극’이라는 형식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었다. 판소리를 단지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판소리라는 전통의 언어를 빌려 동시대의 이슈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는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라는 단체와 함께 지속적으로 고민하던 것이다. 강주룡의 이야기 역시 단지 역사적 인물로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외침을 지금의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말’로 되살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판소리의 구조는 매우 유용했다. 서사와 감정이 동시에 분출되는 이 형식은, 강주룡이라는 인물의 고단한 삶과 불타는 저항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재구성’으로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판소리는 원래 민중의 언어였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큰 울림을 전하는 형식이었다. 그 원형의 정신이 강주룡의 서사와 만났을 때, 나는 이 형식이 지닌 힘을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내 작업의 또 다른 방향을 마주하게 되었다. 소리극이라는 형식이 단지 전통과 현대의 결합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질문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 <체공녀 강주룡>은 그 해답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나는 이후로도 ‘소리극’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전통의 깊이와 동시대의 감각이 만날 수 있는 접점으로, 서사의 울림과 정서의 떨림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무대로. 그 무대에서 잘 담은 ‘말’로 시절을 보여주고, 잘 쌓은 ‘소리’로 마음을 울릴 수 있기를 여전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