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진 공연 칼럼니스트가 더뮤지컬 칼럼을 통해 공연 속 여성 캐릭터를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친구들과 종종 나누는 대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일제강점기나 독재정권 시절에 살았다면, 끝까지 신념을 지킬 수 있었을까. 독립운동가나 민주화 운동가처럼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진실만을 말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한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대부분 사람에게 생존의 위협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신념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뮤지컬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이 던지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어디까지 지킬 수 있는가.
작품은 1937년 소비에트 연방을 배경으로 한다. 스탈린은 소련의 일인자가 된 후 자신의 정적과 혁명동지를 비롯해 고위 장교, 소수민족 사회주의자들,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을 ‘반혁명분자’라는 이름으로 숙청했다. 경제 체제 개편 과정에서 아사한 이들도 수천만 명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1937년은 스탈린의 대숙청이 정점에 이른 때다.
실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관객은 쉽게 공포를 느낀다. 무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거대한 스탈린의 초상화는 맨과 우먼의 좁은 집을 내려다보고, 이들을 사방에서 지켜보는 플레이어의 시선은 감시 사회의 압박감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권력은 서로서로 감시하게 하고, 자신을 스스로 검열해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다. 튀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는 인간의 몰개성과 획일화를 강요한다. only one이 아닌, one of them이 되어야만 하는 시대. 맨과 우먼은 그런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이웃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사라지지만, ‘할당량’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체포와 연행의 맥락은 이미 사라졌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다음 차례가 자신일지 모른다는 불안은 더욱 커진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공포에 잠식당하거나,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고발하거나.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은 비지터의 방문으로 두 사람이 감추고 있던 진실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작품은 역사 속 개인이 경험하는 무력감과 인간 내면의 악, 진실 앞에서의 변화에 주목한다. 비지터의 폭로로 건실하고 다정해 보이던 맨이 점차 나약한 내면을 드러낸다면, 신경쇠약에 가까울 정도로 불안해하던 우먼은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된다. 우먼은 작은 소리에도 쉽게 놀라고, 방음이 되지 않는 벽 너머의 비명을 오르골 소리로 덮는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 혼자 보내는 탓에 불안은 커지고, 현실의 공포는 회피로 이어졌다. 그런 그에게 맨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확인해주는 존재다.
문제는 안전하다고 느낀 울타리가 붕괴한다는 점이다. 맨은 거짓 진술로 이웃을 고발하지만, “진실은 이미 시작된 숙청을 멈출 수 없는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예술가들이 총살당한 게 내 편지 때문이겠어?”라는 반문도 이어진다. 우먼은 그런 맨을 강하게 비난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은 그 비난이 사실은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게 된다. 우먼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같은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우먼은 맨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비겁함을 마주하고 말한다. “내가 한 짓이 부끄러웠어.” 이 수치심은 단순한 죄책감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우먼은 부끄러운 짓 한 번 한 적 없다고 믿었던 아빠의 다정함 속에서 자랐다. 그런 아빠의 좋은 딸,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가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린 것이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요, 아빠”라는 탄식에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혐오가 담겨 있다. 수치심을 오래도록 공포라는 가면에 감추고 살아온 이가 우먼이다.
그런 우먼의 결정적인 변화는 아빠의 진실이 드러나며 찾아온다. 자신이 믿어온 가치는 무너졌고, 안식처라 여겼던 아빠와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어렵게 덮어두었던 과거의 수치들이 쏟아지려던 순간, 자신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결심과 함께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의 수치를 받아들이고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 아닌, 폭력으로 모든 것을 다시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취약함을 들키지 않기 위한 공격이 자신의 생존과 아빠의 명예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다.
유토피아를 꿈꾸던 맨은 죽음으로써 공포의 굴레에서 탈출하지만, 우먼은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러나 우먼은 다시 꼭두각시가 되어 비지터의 품에 안긴 채 빈 껍데기처럼 움직인다. 과연 이 생존을 해피엔딩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먼의 무자비한 폭력은 온전히 개인만의 책임일까. 그가 느낀 수치는 자신에게서만 온 것인가. 결국 작품은 인간 내면의 악마를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악마는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자라고, 공포와 수치심은 억압된 시대에서 태어난다. 과연 우리는 맨과 우먼의 시대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