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인터뷰 | <총각네 야채가게>의 박정환 [No.80]

글 |이민선 사진 |박인철 2010-05-25 6,789


 

당신이 지닌 열정과 현명함이 부럽다

 

박정환이 그동안 맡았던 역할들을 훑어보니, 몽골에서 온 순수한 청년 솔롱고(<빨래>), 의연히 아마추어 밴드를 이끄는 준철(<오디션>), 그리고 꿈을 향해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청년 CEO 태성(<총각네 야채가게>) 등 실제 나이에 비해 젊은 역할이 많았다. 일부러 어려 보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 역할들은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젊게 사는 비결이 정신 연령이 어린 탓이라고 했지만, 흔히 말하듯 순수한 열정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있었던 것은, 쌓이는 시간만큼 넓어진 시각이 더욱 현명하게 젊음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었다. 

 

어떤 배우든 처음 공연에 눈뜨게 한 작품이 있기 마련이다. 박정환에게 그 작품은 중학교 3학년 때 본, 기국서 연출의 <햄릿4>였다. 티켓은 지물포를 운영하시는 아버지의 고객이 장판이 잘 깔린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준 것이었다. 말 그대로 우연히 다가온 공연이었다. 도무지 중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제목의 공연이라 동행 없이 혼자 간 극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무대를 만났다. ‘햄릿’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탑 조명 아래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보는데 가슴이 뛰었다. TV 화면을 거치지 않고 바로 눈앞에서 본 연기라 그 느낌은 더욱 강렬했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나 저거 해야지!’ 이후로 줄곧 그 생각만 했다.


그래서 박정환은 대학 연극과에 진학했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뮤지컬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연극과 뮤지컬은 생리가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연극판만을 즐겼다. 그러던 중 2005년에 연극 <아가멤논>을 만났다. 그리스 출신의 연출가 미카엘 마르마리노스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고전에서 ‘아가멤논’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원작대로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대신 록 가수처럼 노래를 했다. <아가멤논>에서 불렀던 그의 노래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뮤지컬 <어쌔신>과 <미스터 마우스>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뮤지컬 장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몸소 경험하면서 깨어졌다.


그를 평소보다 더 밝고 여유롭게, 그리고 듬직한 맏형으로 만들어 준 작품은 <총각네 야채가게>이다. 배우의 캐릭터가 작품에 녹아나기도 하지만, 작품 속 캐릭터에 맞춰서 실제 성격이 조금 변하기도 한다고 하니, 지금의 그는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인 사람일 것이다. 박정환이 연기하고 있는 ‘총각네 야채가게’의 젊은 사장은 꿈을 향해 즐겁게, 열심히 일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 중에서 맏형인 그는 실제로도 극에서처럼 후배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끌어주는 리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다섯 총각의 개성과 열정, 그리고 우정으로 빚어지는 하모니를 작품의 매력으로 꼽았다. <총각네 야채가게>는 관객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미덕을 지녔다. 다섯 주인공의 고민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고 갈등이 열정만으로 해결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한 관객들에게 선한 즐거움을 준다는 점은 무시 못할 장점이다. 게다가 팀워크를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에 맞게, 네 총각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에서 끈끈한 우정이 느껴진다.


박정환은 <총각네 야채가게>뿐만 아니라 전작 <영웅을 기다리며>, <형제는 용감했다>로 코믹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연극 <미친 키스>나 <이>에서처럼 무겁고 어두운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매 공연마다 성격이 많이 다른 캐릭터를 오갔던 것을 되새겨볼 때,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하다. 그가 지금 연습 중인 작품은 주드 로와 마이클 케인이 출연한 동명의 영화로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 연극 <추적>이다. 이 작품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치밀한 심리극인데, 상반된 분위기의 작품을 오가는 것이 의아하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와 진지함이 공존한다.


대단한 인기를 끄는 작품이나 배역이 아니더라도 그는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다양한 캐릭터로 변신해서 안정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가 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 무대에 서든 신뢰 가는 배우라고 할 만하다. 끊임없이 그가 입을 옷을 건네주는 제작진들이 있고, 그 의상이 어울린다고 칭찬하고 조언해주는 관객들이 있는 걸 보면, 무대에 선 그가 얼마나 믿음직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박정환은 밤이든 낮이든 기분이 내킬 때면 집에서 기타를 치며 편하게 노래를 부르곤 한다. 그래서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으로 거처도 옮겼다. 노래가 좋아 뮤지컬 무대에 서고 있지만, 그는 성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가요에 친숙한 음색이라 클래식한 뮤지컬에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다. 그리고 연기 톤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라, 지금까지는 주로 소극장 창작 작품에 참여했다. 그 스스로 고민을 거듭하며 직접 캐릭터를 만들어 나아가는 작업이 더 흥미로웠지만, 굳이 창작 작품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자신의 시야가 조금 좁았음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더 다양한 작품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가 무대에 서는 것은 거창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벚나무에 수수한 벚꽃이 아닌 화려한 장미가 핀다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지만, 그것은 꽃과 나무의 공생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전체 조경을 해치지 않고 제 자리에 핀 벚나무의 벚꽃처럼, 박정환도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어울리는 무대 위에서 피었다가 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 처음에는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지만, 연기를 하면 할수록 불필요한 욕심과 고집은 쳐내고 지우면서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내고자 한다. 


새로운 십년을 맞는다는 것은 늘 호기심과 두려움을 수반한다. 30대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 있는 박정환은 미리 다음 단락을 구상하고 있다. 그가 스무 살을 맞았을 때는 크나큰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고, 서른이 될 때에는 혼자라는 느낌에 너무 외로웠다. 서른아홉에서 마흔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선 그는 무엇이 자신을 기다릴지 기대하고 있다. 지난 시간을 반성해보고, 한 발 더 멀리 내딛는 기회가 되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다. 인터뷰 도중 여러 차례 자신의 나이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아닌 다가올 시간에 대한 다짐과 기대로 들렸다.

 

박정환에게 2010년은 바삐 지나갈 것 같다. 이런 저런 공연 계획으로 이미 몸과 마음이 분주하고, 5월 초에 발매될 뮤지컬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음반 소식에 들떠 있다. 이정열, 서범석, 박은태, 배해선 등이 참여한 가요 리메이크 앨범인데, 그는 가수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를 스윙 스타일로 편곡해 불렀다며 즐거웠던 녹음 작업을 회상했다. 내년에는 작곡도 해볼 계획이라는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눈을 반짝였다. 열정과 의지가 고이지 않고 흐르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그를 보며 새삼 재확인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0호 201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