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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rsona] <서편제> 어둡고, 빛나고, 아름답다 [No.87]

글 |박민정 일러스트레이션 | 권재준 2010-12-24 4,425

 


무엇이 먼저였을까. 불행이 재능을 만들어서? 아니면 재능이 주어진 행복을 거스르게 해서? 대체 왜 예술을 하는 것일까? 빵도 밥도 안 나오는데! 그럼에도 어떤 이들에게 ‘유희’는 생존의 문제가 된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그들만의 놀이를 한다.
송화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동호는 작고 시들어버린 누나를 보자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씩씩하고 생명력 넘치는 그녀를 누가 저렇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아직도 소리가 좋아? 소리를 하면 행복해?”
동호는 어느새 어린아이로 되돌아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왜 그래, 동호야….”
“그래서 결국 누나 곁에 남은 건 뭐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 송화는 한번도 ‘소리’가 무언가 보상해주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아버지 유봉은 소리를 통해 삶의 남루함을, 자신의 초라함을 극복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애초에 그녀는 ‘조작된’ 한(恨)으로 소리를 완성할 사람이 아니었다.
“멀쩡하던 눈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왜 원망을 안 했겠니. 그런데 그게 꼭 아버지 잘못은 아닌 것 같았어.”
“왜?”
“그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내 운명이지 않았을까. 단지 눈멀 운명에 처한 내 곁에 아버지가 있어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누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아무리 무거운 짐도 짊어지다보니 결국 익숙해지더라.”
아버지 유봉은 송화의 눈을 멀게 하고 사무치는 한으로 소리를 완성하라고 했지만 눈먼 삶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은 더 이상 송화가 한탄할 불행이 아니었다. 어떤 시점이 지난 후부터는 한이 맺혀서가 아니라 밥을 먹는 일처럼 꼭 필요해서 소리를 하게 된 것이다. 
“나도 배부르고 따뜻하게 지내는 게 좋아. 그런데도 그것만으로는 만족이 안되게 생겨 먹었나봐. 한 사람을 만족시켜주는 게 음식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저마다 민감하게 감각하는 건 다르잖아.”
“아버지는 누나 가슴속에 한을 심어주는 걸로 만족하지 못했어.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라고 했잖아. 예술로 승화? 말 한번 거창하네.”
동호는 아버지에게서 상처를 빌미로 주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한 남자의 허영밖에 보지 못했다. 유봉은 자신의 자격지심을 송화의 한으로 치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세상은 ‘그 사람은 아픔이 많아.’라며 상처 받은 사람의 위악(僞惡)에 관대해지기도 하지만 그 상처라는 것을 꺼내놓고 보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사람의 ‘소심한 시위’일 뿐인 경우가 많다.
“동호야, 나를 억압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운명이야. 운명 속에 갇혀서 발버둥 친 거야.”
“운명 탓 좀 그만 해. 누나는 충분히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도 있었잖아.”
송화는 ‘소소한 행복’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소소한 행복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행복이 아닌 행복의 클리셰를 즐기고 있는 것 아닐까. 행복을 연출하는 장면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누구나 다 하는 것을 이루어 냈다는 만족감.
“누나는 진짜 행복을 몰라. 누나가 그런 행복을 느껴본 적 없어서 소리 타령이나 하는 거라고!”
“불행을 예감하면서도 구렁에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거부할 수 없었어. 네가 말하는 행복한 삶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했을까?” 
“누나는 평생 소리나 하고 살았으니 그게 다인 줄 알지. 하지만 그것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한 행복도 많아. 우리가 어렸을 때, 내가 누나를 바라보면 누나 얼굴에 활짝 피어오르던 꽃을 기억해. 소리하는 누나 얼굴에서는 볼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이었지.”
송화는 고개를 숙이고 거칠고 메마른 제 손을 바라봤다. 한평생 무언가 잡으려고 애써 본 적 없는 손이다.
“제아무리 명창이라도 삶을 망치면서까지 소리를 찾아 헤맬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다 가짜야.”
동호가 울먹이듯 외쳤다. 하지만 정말 소리를 좇던 송화의 행복은 다 ‘가짜’였을까. 그녀는 손아귀에 움켜쥔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행복으로 충만했던 순간이 많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몰라서 무엇이 더 큰 행복인지는 비교할 수 없다.
“동호야, 그런데 나는 한번도 내 인생이랑 소리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 적 없어. 불행이 원인이 되어 소리를 한 건지, 소리에 재능이 있어서 내 인생이 불행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동호는 자꾸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송화를 다그쳤다. 그는 소리를 통한 송화의 기쁨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엄청난 세계를 송화와 공유하지 못한 데서 오는 소외감 때문에 어린애처럼 심술이 났다. 송화는 그런 동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그럽고 따뜻한 누나 역할에 충실해 차근차근 설명하고 타이르고만 있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7호 2010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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