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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칼럼]뮤지컬은 '모든 것'을 품으며 발전했다

글 |최승연(뮤지컬 평론가) 사진 |아이스톡 2024-04-18 1,865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가 매월 주목할 만한 뮤지컬계 이슈를 심도 있게 들여다봅니다. 최승연 평론가의 칼럼은 매월 셋째 주 더뮤지컬 웹사이트를 통해 연재됩니다. 


 

 

고희경 교수의 책 『뮤지컬의 탄생』에서도 언급되었듯, ‘다양성’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변화시켜 온 보편적 가치다. 브로드웨이의 역사는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를 화두로 하여 이어져 왔으며 동시대 뮤지컬이 포괄하는 테마는 더욱 광범위해졌다. 2024년 현재 브로드웨이 라인업에 <더 후즈 토미> 리바이벌 버전, 2023 토니어워즈 베스트 뮤지컬상 수상작 <킴벌리 아킴보>가 포함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웨스트엔드도 사정은 비슷하다. 최근 <더 리틀 빅 띵즈(The Little Big Things)>가 초연 시즌 공연을 마쳤다. 세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장애’다. 주인공은 자폐증과 조로증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며,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전도유망했던 럭비 선수다. 그들의 장애는 소재적 차원이 아닌 서사의 전면에서 다뤄지며 작품 전체를 이끄는 주제로 확장되어 있다. 한국 공연계도 다양성 이슈와 무관하지 않다. 젠더, 장애, 환경, 동물, 우주, 로봇과 AI 그리고 현재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담론도 포괄하고 있다. 특히 앞의 이슈들은 젠더 프리(gender-free), 베리어 프리(barrier-free), 트리거 프리(trigger-free), 이른바 ‘3무(無)’의 가치로 활발히 다뤄지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 주목하려는 것은 한국 뮤지컬과 ‘장애’에 대한 것이다. 한국 뮤지컬은 특히 장애와 무장애 운동에 취약하다. 베리어 프리는 원래 건축계에서 사용되던 용어로서, 건축물에서 장벽을 없애자는 운동의 기조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장벽이 사라지기는 어렵기 때문에 ‘베리어 컨셔스(barrier conscious)’ 즉 ‘장벽을 의식하는’이라는 용어가 적극적인 의미의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원론적으로 뮤지컬의 장애 문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장애의 재현 방식 문제, 장애인 배우 및 스태프의 등용 문제, 장애인 관객의 객석 접근성 문제가 그것이다.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겠다. ‘좋은 이야기’지만 여러 상업적 요구로 충만한 한국 뮤지컬계에서는 요원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다음의 사례들은 장애에 대한 고려가 뮤지컬 현장에 이미 필요한 상황임을 알려준다. 더 이상 시장 논리로만 장애를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장애(적 상황)는 현장에 스며들어 있다.

 

사례1. 연극학자들과 함께 진행하던 어느 집담회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제 주변에 뮤지컬을 보고 싶어 하는 장애인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오페라의 유령>을 좋아하는데 한 번도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하고 있어요. 한국 뮤지컬 업계는 장애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나요?”

 

사례2. 어느 날 A공연을 보고 객석을 빠져나오던 중이었다. 객석 한 편에서 갑자기 찾아온 과호흡 상태를 진정시키고 있는 관객이 보였다. 옆자리 관객이 도와주고 있었으나 진정이 쉽지 않아 보였다.

 

사례3. B공연을 리뷰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하지만 1막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거의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자폐인 관객 한 명이 내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소음을 냈기 때문이다. 인터미션 때 극장 측과 협의한 후 다른 자리로 옮겨 2막을 관람했지만, 1막을 온전히 관람하지 못한 탓에 공연을 리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위의 경험적 사례들은 우선 ‘접근성’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접근성이란 장애인 관객의 극장 접근성을 포함하여 누구나 신체적, 정신적인 장애 없이 관극할 수 있는 극장 환경 지향성을 말한다. 현재 뮤지컬이 공연되는 대부분의 대극장과 두산아트센터, 국립정동극장 등은 장애인석을 보유하고 있지만 장애인들이 실제로 관극하고 귀가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또한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대학로 중소극장들은 접근성이 현저히 낮다. 물리적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1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매우 명확하다. 극장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동의나 법적인 규제가 따른다. 브로드웨이의 경우도 1990년에 ADA(American with Disability Act)가 제정되면서 법무부의 소송전을 통해 오랫동안 극장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2023년 9월에 개관한 ‘모두예술극장’은 무대 안팎으로 접근성 문제를 해결한 이상적인 극장 모델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뮤지컬과 장애에 대한 논의는 특정 극장 혹은 물리적 조건에만 국한될 수 없다. 이에 대해 상시적인 ‘접근성 매니저’ 포지션이 일종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접근성 매니저란 마치 극장의 안전요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현재 모두예술극장은 물론이고 2023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도 접근성 매니저를 적극 기용했던 바, 이 포지션을 통해 접근성 업무가 일원화, 전문화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온오프에서 접근성 정보를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니버설한 표지를 만든다든지, 제한적인 수준일지라도 하우스 매니저가 접근성 매니저 역할을 겸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공연 전 극장의 공기에 ‘돌봄’과 ‘환대’의 분위기가 더해질 것이다. 또한 접근성 회차를 따로 만들거나 미리 공지하여 혹시 모를 갈등 상황을 최소화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수어통역이나 한글자막, 음성해설 서비스 등 장애인 관객을 도울 수 있는 극장 내 요소들이 비교적 부담 없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인 상황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이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뮤지컬이 ‘모두가 관람할 수 있는 예술’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것이다. 위 사례3은 인식의 불균형 때문에 벌어진 일종의 사건이다. 필자의 앞좌석 관객은 B공연을 보고 싶고, 볼 수 있다고 판단해서 극장에 왔을 것이고, 그의 행동에 대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뮤지컬은 모두가 관람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관객과 극장 양자에게 올바르게 심어져 있었다면, 자폐인 관객을 포함한 모두가 극장에 온 목적을 충실히 만족시키며 편안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식의 전환은 뮤지컬이 장애를 서사 안에 끌어옴으로써 더 본격화될 수 있다. 현재까지 장애를 다룬 한국 창작뮤지컬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합체>(2022년 초연, 국립극장), <앨리스>(2023년 초연, 섬으로 간 나비), <헬렌 앤 미>(2023년 초연, 극단 걸판),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2024년 초연, 공연제작소 작작)가 전부다(장애인만을 위해 제작된 공연은 제외했다). <합체>와 <헬렌 앤 미>는 무장애 공연을 지향했는데 <합체>는 아예 음성해설사를 캐릭터로 만들어 무장애 요소를 양식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당사자성’의 측면에서 2024년 현재 공연되고 있는 <넥스트 투 노멀>, <디어 에반 핸슨>과 같은 방법론을 공유한 작품이다. 공연의 모든 지점에 스며 있는 당사자성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는 주인공의 서사를 매우 밀도 높게 구체화했다.

 

하지만 네 작품이 모두 국공립 단체의 제작이나 공적 지원금이 투입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복잡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은 무장애 공연이나 장애 서사가 민간에서 시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만약 관점을 조금 바꿔본다면 어떨까? 장애를 한계와 고통의 원천으로 응축시키기보다 오히려 ‘무엇이든 시도될 수 있는 토대’로 과감하게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2018년 세인트 앤즈 웨어하우스에서 초연되었던 <오클라호마> 이머시브 리바이벌 버전은 이에 대한 좋은 예다. 당시 극중 코믹 캐릭터인 아도 애니를 휠체어 타고 연기하는 알리 스트로커가 맡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명력 넘치는 인물로 수위를 높임으로써 공연은 전복성을 한층 강화했다. 앞서 언급했던 <더 리틀 빅 띵즈(The Little Big Things)>에서도 휠체어를 탄 배우 에드 라킨이 공중으로 올려지는 장면은 한계를 넘어서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상업적 가능성이 모색될 수 있는 지점들이다.

 

언젠가 모 대학 특강에서 만났던 한 학생이 떠오른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자신과 필담을 나눠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언어장애가 있는 친구였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저는 뮤지컬 작가가 꿈입니다. 이런 저도 가능할까요?” 그의 품에는 <팬레터> 대본이 있었다. 뮤지컬의 ‘능력 있는 몸’에 대한 선망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가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세상에 말을 걸어주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계속 질문하며 나아갈 뿐이다.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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